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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마도- 절로도강.면벽참선.선문답 등 禪宗畵 대표주제

대한유성 2018. 12. 12. 11:27

달마도

 

직지인심’‘마음을 배우는 법가르쳐
절로도강.면벽참선.선문답 등 禪宗畵 대표주제
고려시대부터 성행조선 중기 김명국 작품 걸작


달마도란 중국 선종의 개조(開祖)로서 숭앙받고 있는 인도의 선승 달마(達摩)를 그린 그림을 일컫는다. 달마도는 나한도나 독성도처럼 불교의 바라문을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불화의 일종으로 볼 수 있으나 나한도나 독성도처럼 예배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때로 달마 스님의 행적이 설화도(說話圖) 형식으로 사찰 건물의 외벽장식용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으나, 달마도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의는 묵필(墨筆)을 잡는 사람에게는 직지인심(直旨人心)의 경지를, 감상자에게는 마음 비우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데 있다.

달마스님은 중국 선종(禪宗)의 시조인 보리달마(菩提達摩)이다. 5세기 경 남인도 향지국의 셋째 왕자로서 일찍이 출가해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했고, 스승의 부촉에 따라 선법을 펴고자 중국으로 왔다. 달마스님이 중국 땅에 온 시기는 남북조시대인 양()나라 무제(武帝) 연간(520 921)이라는 설이 유력하고, 중국에 들어 온 통로는 광동성 홍콩 부근 또는 서역통로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사진설명: 〈달마상〉(김명국,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달마스님이 중국에 들어 올 당시 양나라 무제는 많은 절을 짓고 불탑을 쌓고 많은 승려를 양성하는 등 나름대로 불교 발전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스님을 궁궐로 초대해 후하게 대접했다. 이 무렵 왕은 지금까지의 자기 공덕이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참이라, 그 공덕이 과연 얼마나 큰가를 달마에게 물었다. 이에 달마스님은 거리낌 없이공덕이 조금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남의 칭송을 바라는 공덕은 이미 공덕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이다. 왕은 달마스님의 무례함을 괘씸하게 여겨 그를 은밀하게 죽인 후 웅이산(熊耳山)에 묻어 버렸다.(일설에 달마 스님이 혜가에게만 법을 전수한 것에 불만을 품은 다른 제자가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일이 있은 몇 년 뒤 어느 날 송운(宋雲)이라는 사람이 서역에 사자로 갔다 돌아오던 중 총령(蔥嶺)에서 달마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달마는 지팡이에 짚신 한 짝을 꿰어 어깨에 메었고, 발은 그냥 벗은 채였는데, 송운이, “지금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달마는나는 서쪽으로 간다.”고 하면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송운이 궁궐로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이상히 여겨 달마의 관을 확인해 보도록 명했다. 관을 열어 보니 놀랍게도 시신은 간 데 없고 짚신 한 짝만 뒹굴고 있었다. 달마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왕은 군사를 불러 즉시 달마를 뒤따라가 죽이도록 명했다. 추격대가 달마를 발견했을 때 그는 양자강 가에 도착해 강을 건너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들이 덮쳐잡으려 하자 달마는 몸을 날려 강을 건너갔다. 그런데 이때의 정황은몰래 강북으로 건너갔다(潛廻江北)”, “갈대를 꺾어 강을 건넜다(折蘆渡江)”, “갈대를 타고 강을 건넜다(乘蘆而渡江)”, “갈대 한 가지를 꺾어 강을 건넜다(折蘆一枝渡江)”고 하는 식으로 각 시대를 거쳐 오면서 신비화 됐다. 어쨌든 양자강을 건넌 달마는 곧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참선 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달마를 벽관바라문(壁觀婆羅門)이라 부르기도 한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달마스님 전기(傳記)의 내용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야기 속의 각 행적들이 달마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달마스님의 행적 중에서 그림의 소재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은 ①갈대 한 가지를 잘라 타고 강을 건너가는 장면, ②짚신 한 짝만을 지팡이에 꿰고 가는 장면, ③면벽참선 하는 모습, ④양 무제와 선문답하는 장면이다. 이밖에도 상반신을 초상 형식으로 그린 달마상도 많이 그려졌음은 물론이다.

달마 스님의 다양한 행적 중에서도 갈대 한 가지를 꺾어 타고 양자강을 건너는 장면이 인기가 높은데, 최고의 걸작이 조선 중기의 김명국이 그린 〈달마절로도강도(達摩折蘆渡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다. 달마 스님이절로도강하는 장면을 능숙하고 걸림이 없는 운필, 윤택한 묵법, 활달하고 간결한 선묘로 표현한 작품으로, 선종화의 묘미가 그대로 드러난다. 김홍도가 그린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와 〈좌수도해도(坐睡渡海圖)(간송미술관 소장)라는 제목의 달마 그림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그림은 김홍도달마절로도강의 소재를 새롭게 해석해서 그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명국의 작품과 다른 점은 두 그림 모두 바다를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과 달마 스님 얼굴에서 조선 사람 체취가 물씬 풍겨난다는 점이다. 또 다른 그림으로 심사정이 그린 〈절로도해도(折蘆渡海圖)(개인 소장)가 있다.

 

 

사진설명: <달마절로도강도>(김명국, 국립중앙박물관)

 

달마절로도강도 다음으로 많이 그려진 것이 두건(頭巾)을 쓴 달마의 상반신을 초상 형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대표작으로 김명국의 〈달마상(達摩像)(국립중앙박물과 소장)이 있다. 이런 형식의 그림을달마도라 하지 않고달마상이라고 하는 것은 인물 자체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김명국이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려서 남겨 두고 온 작품으로 우리 박물관이 사들여 와 소장하고 있다. 두건과 옷을 작위(作爲)와 기교를 걸러낸 절제된 묵선으로 처리한 이 작품은 선종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현대인의 작품으로는 석정 삼락자(三樂子)의 〈달마상〉이 눈에 띈다.

감상용 달마면벽도는 지금까지 쉽게 대할 수 없었으나, 최근 일본인이 소장했던 김홍도 화첩을 고미술품 경매장에 내놓음으로써 또 하나의 감상용 달마도가 햇빛을 보았다. 10폭 화첩 중 하나인 〈구년면벽좌선도〉는 김홍도의 대담하고 거침없는 필력이 잘 나타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달마 주변에 섬광 같은 것을 표현 한 것인데, 신비화 하기 위한 수법으로 생각된다. 한편, 혜가가 달마스님 앞에서 자신의 팔을 자른 이야기를 주제로 한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는 청도 운문사 비로전을 비롯해 몇몇 사찰에 벽화로 남아 잇다. 운문사 비로전 달마벽화는 조선후기 제작된 걸작으로, 면벽참선하는 달마 스님을 크게 부각시키고, 그 아래에 자신의 팔을 잘라 스님에게 바치는 혜가의 결연한 모습을 작게 표현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설명: <절로도해도>(김홍도, 간송미술관 소장)

 

달마도의 작례 문헌 관련 기록이 고려시대부터 적지 않게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예로써 공민왕이 평소 승련사의 각운(覺雲)스님의 도행을 숭상해 직접 〈달마절로도강도〉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줬다는 기록이 있다(동문선). 그리고 고려시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도 달마화상과 달마대사상에 대한 기사가 나타나고 있어, 이 시대에도 달마도가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집에서도 달마상에 붙인 제시(題詩)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으며, 사명대사가 달마도를 그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밖에 김명국의 〈달마상〉과 유사한 구도로 된 그림이 〈한국회화대관〉 등 미술사서에 사진으로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달마도는 선종화(禪宗畵)의 일종이다. 선종화의 가장 큰 특징은 여백이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백은 관조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표현과 미표현의 경계에서 항상 표현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화가가 진리에 육박하기 위해서는 형()이 아니라 여백을 강조해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종화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묵선이 대상의 윤곽을 묘사하는 수단이 아니라 선 그 자체로써 완결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종화의 골필(骨筆)은 직절간명(直截簡明)한 견성오도(見性悟道)의 법문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허균/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
불교신문 2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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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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