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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커스리더學]三國志經營-4.5.6.

대한유성 2012. 10. 1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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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거짓 정보에 넘어간 조조, 불바다에 갇히다

 

三國志經營-4. 삼국지의 '백미' 적벽대전에서 배워라

 

삼국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적벽대전은 단연 '백미'로 꼽힌다.

208년 조조의 대군과 손권, 유비의 연합군이 적벽을 둘러싸고 펼친 이 전투는 적은 수의 군사가 대군을 이긴 대표적 전투로 꼽힌다. 특히 당대 최고의 지략가들이 펼쳐내는 각종 병법과 두뇌싸움이 으뜸이라는 평가다.

 

정사에 남은 기록이 짧고 모호해 정확한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고 심지어 일부 사실이 아니라는 의혹까지 있지만,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적벽대전 속에는 분명 오늘날 경영자들이 곱씹어볼 부분이 많다.

 

 

 

 

반간계에 속아 자신의 장수 처형
유비연합군, 바람 이용한 화공 펼쳐
글로벌기업 치열한 정보전 보는 듯
현지 사정 이해 못하면 백전백패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참을 가려라 =적벽대전은 조조군의 연환계(連環計)와 연합군의 화공(火攻)으로 요약된다. 연합군은 화공 즉, 불로 공격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배에 어떻게 불을 붙이는 가였다 .

전투를 앞두고 조조의 군대에 연합군의 밀사가 찾아온다. 연합군 주유 수하의 대장 황개가 조조에 투항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황개는 후방에서 식량 운반대열이 도착했으니 이를 기회로 부대를 이끌고 오겠다고 했다.
밤이 되자 밀서의 내용대로 뱃머리에 청룡어금니 깃발을 꽂은 황개의 선단이 20척가량 다가왔다. 황개의 선단이 가까이 접근해서야 조조군의 정욱은 '배의 몸체나 움직임의 속도를 보아 식량운반선이 아니다. 황개의 투항은 거짓'이라고 외쳤고, 조조는 이에 대응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조조 진영은 불어오는 동남풍을 맞으며 불길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왜 투항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조조는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작업에 실패했다.

적벽대전 직전, 조조는 적벽 일대의 지형에 밝고 수전에 능한 형주의 군사 채모와 장윤을 확보했다. 수전에 약한 조조로서는 큰 힘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조는 이들이 연합군과 내통했다는 허위정보를 믿고 이들을 참수시켰다. 삼국지연의 속 '반간계' 이야기다.

당시 조조는 그의 참모이자 연합군 주유의 친구인 장간을 주유에게 보내 항복을 권하는 척 했다. 이때 주유는 장간과 술을 마신 뒤 탁자 위에 채모와 장윤이 자신과 내통하는 내용의 '가짜 서신'을 놓아두고 자는 척 했다. 장간이 훔쳐간 이 가짜 서신에 조조는 격노하며 이들을 참수시킨 것이다.

이후 조조는 또 다른 형주의 군사를 주유측에 거짓으로 투항시킨 후, 첩자노릇을 하게끔 한다. 하지만 조조와 달리 주유는 이들의 투항이 계략임을 간파하고 오히려 이를 역이용했다. 이 때 주유측은 황개가 곧 조조측에 투항할 것이라는 거짓정보도 미리 흘린다. 이 잘못된 정보로 조조는 황개의 투항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된 셈이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들은 그야말로 정보전을 펼치고 있다. 정확한 정보와 잘못된 정보를 구분하고 판단해내는 것도 리더의 중요역할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가지 정보로 판단하는 것보다 이미 축적된 데이터와 쏟아지는 데이터를 대조 분석해 정확히 활용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현지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라 =황개의 선단은 강풍을 타고 화공을 전개해 조조의 선단에 큰 타격을 입혔다. 반간계와 고육계, 연환계 등 수많은 전략 중에서도 적벽대전의 절정을 찍은 것은 바로 이 기습 화공이었다. 때마침 불어왔던 바람, 화선의 접근을 쉽게 허용한 조조.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였을까?

결론은 아니다. 화공을 택한 연합군은 적벽 장강의 동쪽 해변에 위치한 적벽지역의 특성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겨울에도 적벽 지역에 동남풍이 하루 이틀 불기 때문에 시기를 잘 택하면 화공이 가능하다는 걸 미리 안 것이다.

반면 조조군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당시 조조군은 배멀미로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크고 작은 배를 십여척씩 쇠사슬로 묶어 넓은 판자를 깔아두는 '연환계'를 택했다. 배를 묶어두면 화공에 속수무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조군이 이를 택한데는 한겨울이니 북풍이 불고 동남풍이 불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는 여기서부터 엇갈렸다.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현지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시장을 무시하고 기존 방법만 고수해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시장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라. 그리고 현지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라. 카멜레온처럼 상황에 맞는 색깔을 택해야한다.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인 제프리 이멜트는 "현지 기업과 동일한 관점에서 전략을 수립하라"고 조언한다.

현지화에 따른 희비는 한중수교 20주년이 된 2012년, 국내 기업의 중국 진출 성적표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랜드, 크린랩, 락앤락, 오리온 등 대표적 성공기업으로 꼽히는 업체들의 공통점은 '현지화'에 집중했다는 사실이다. 락앤락은 차(茶) 문화가 발달한 중국인들의 특성에 집중해 이중 망으로 설치된 상품을 출시했고, 이랜드는 팔다 남은 제품이 아니라 초기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중국시장에 특화한 상품만을 선보였다.

◇긴장 늦추지 말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라 =당시 조조의 군대는 우월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거리 이동에 따른 피로 누적, 풍토병, 질병 등으로 전력이 약해졌다는 점을 감안해도 조조군의 대패는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였다. 우월한 전력을 가진 조조군의 패배 원인은 방심과 전쟁의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위험요인을 무시한 데는 당시 연이은 승리에 도취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또한 조조는 기름을 바른 볏짚이 가득 실린 황개의 선단이 안전거리 내로 들어오기까지 아무런 점검도 하지 않았다. 돌계단도 두드려보고 건너란 말이 있듯 큰 전쟁을 앞두고 안전장치가 필요했다는 지적이다.

연합군의 치밀함에도 배울 대목이 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려라. 동남풍이 불어야 한다. 황개는 208년 동짓날 밤, 기다림 끝에 동남풍이 불자 기름을 바른 마른 갈대, 볏짚을 싣고 기름천으로 덮은 선박을 몰고 조조군측으로 다가갔다. 대기하던 유비와 주유는 조조의 군영에서 불이 솟아오르자 즉시 수륙 양군을 몰아 총공격을 단행했다. 적벽은 불바다가 됐고, 조조의 대군은 참패했다.

 

 

 

 

[포커스리더學]

싸움은 하책…싸우지 않고 이김이 상책이오

 

三國志經營-5.적벽대전 그 이후…유비 '무혈입성'을 터득하다

 

최고의 승리는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손자병법의 전승(全勝)전략을 첫번째로 꼽는다. 진정한 고수는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법이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하후돈, 장료, 조인 등에 각각의 성을 맡긴 후 퇴각했다. 주유를 선봉으로 한 오나라는 승리의 기세를 이어 조조군을 추격했다. 이후 오나라군의 공격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오나라 주유군과 위나라 조인군의 전투가 전개된다. 일년여의 진흙탕 싸움. 그 끝에 남군을 비롯한 중원의 주요 성을 차지한 자는 누구일까. 오나라도 위나라도 아닌,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유비의 세력이었다.

 

조조와 손권 사이서 전략적 요충지 힘 안들이고 빼앗아

리더는 경쟁의 목적이 싸움 아니라 승리라는 점 알아야

경쟁업체 노력도 자사의 이익으로 만드는 전략 세워라

 

 

 

 

◇무혈입성의 남군성 전투= 주유는 남군을 지키던 조인을 치며 전략 요충지인 형주를 빼앗으려 한다. 하지만 조인의 분전으로 주유군과 조인군은 일년이나 싸움을 벌인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치열한 싸움에서 밀린 조인군은 결국 조조가 남긴 비책을 꺼냈고 다시 승기를 잡는데 성공한다.

반면 주유는 조조의 계략으로 패하고 부상까지 당하며 수세에 몰렸다. 이후 주유가 택한 방법은 자신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이었다. 조인군이 이에 속아 영채를 습격하면 역습한다는 계획이었다. 결국 조인군이 이 같은 계획대로 속으며 주유군이 다시 승기를 잡고 조인은 하후돈이 있는 양양성까지 달아났다.

 

조인이 떠난 후 주유는 남군성에 입성하려했다. 그러나 이미 제갈공명이 수를 써 점령한 상태였다. 유비와 공명은 기반, 즉 영토를 확보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었다. 주유군과 조인군의 전투를 틈타 공명이 남군성 공격을 지시한 것이다.

 

격분한 주유는 남군을 공격했으나 유비의 세력에 패했다. 또 공명은 형주성과 양양성에 각각 거짓정보를 보내 군을 이동시킨 후 장비와 관우가 점령하게 한다. 오나라와 위나라가 싸웠던 양양, 남군, 강하 등 주요성은 유비의 세력 아래 있게 됐다. 무혈입성. 싸우지 않고 성을 얻은 것이다.

 

고수들의 전략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던 조조가 적벽의 패배로 그 기회를 놓치자 오나라 손권과 주유의 세력이 커졌다. 그 틈에서 유비도 주요 성을 차지한다.

 

현명한 전략가는 전투에서 아군의 희생을 줄이려 한다. 적은 손실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이가 곧 승자다. 전투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은 비즈니스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타사의 노력조차 자사의 이익으로 만드는 전략이다.

 

리더는 경쟁의 목적이 싸움이 아닌 승리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싸움을 승리를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테오도르 레빗은 "소비자는 4분의1인치 구경의 드릴을 사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구경의 구멍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도구가 아닌 결과물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는 소비자가 이 제품을 통해 최종적으로 얻을 결과물을 고려해야 한다. 결과에 목적을 두면 시야가 더욱 넓어지고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은 피해갈 수 있게 된다.

 

경쟁업체에서 자원을 투입하는 것까지 자사의 이익이 되도록 하라. 개그맨 이경규가 KBS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꼬꼬면'을 출시한 이후 하얀국물라면 돌풍이 불었다. 이 때 몇몇 업체들은 하얀국물 열풍에 편승해 상품을 출시했고 라면은 빨간국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린 하얀국물라면 시장이 확대되는 효과를 얻었다. 경쟁사가 잘될 수록 더욱 돈을 버는 기업들도 있다. 대행수수료를 수익원 기반으로 성장한 업체들이 그 일례다.

 

손자병법에서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으로 꼽는다. 적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만이 승리의 비법이 아니다.

 

◇백성을 품은 형주 4군 장악=중원의 성을 공략하며 유비군은 강대세력으로 성장했다. 영토를 넓힌 만큼 수중에 넣은 양양, 형주 등을 방어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가 됐다. 특히 형주는 지리적으로 침략을 받기 쉬운 곳에 위치해있었다. 이때 유비는 형주의 방어를 위해 4군을 장악해야한다는 조언을 받게 된다. 조언을 해준 이는 마씨 5형제 중 형주를 잘 아는 마량이었다. 마량은 형주 남부의 영릉, 무릉, 계양, 장사의 4군을 지배하에 둬야하고 반드시 민심을 얻을 것을 강조했다.

 

당시 형주 4군의 경우 장사는 한현, 영릉은 유도, 무릉은 금선, 계양은 조범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후 유비는 마량에게 직책을 주고 4군을 공격, 장악한다.

 

장악하는 과정과 장악 이후 유비가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일찍이 마량이 강조했던 민심이었다. 유비는 성 점령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성을 오래 지키기 위해서는 백성의 신뢰를 얻는 것이 큰 숙제임을 안 것이다.

 

기업의 목적도 멀리 내다볼 필요가 있다. 자사의 이익과 실적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기업은 오래갈 수 없다. 거래처를 희생양으로 밟고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 한 기업이 무너지면서 다른 연계기업들이 피해를 입는 모습도 비일비재하다.

 

유비는 한왕조의 부흥과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대의를 따로 떼서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 구성원 전체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곧 국력강화의 길임을 파악한 셈이다.

 

리더에게는 전체의 발전을 크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포커스리더學]

자신의 아들을 죽인 적장도 항복하면 내 부하

 

三國志經營-6.시인이며 디자이너였던 조조, 대륙보다 큰 인재 욕심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만큼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흔치 않다. 조조는 삼국지연의에서 권모술수에 능하고 잔혹한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난국 때마다 일명 '난세 리더십'으로 재조명받는다.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이해관계, 논점 등에 따라 확연히 달라진다.

분명한 사실은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治世之能臣 亂世之奸雄ㆍ평화로울 때는 유능한 신하, 난세에는 간교한 영웅)이라는 문장에 가둬둘 인물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재라고 판단되면 "영웅에게 출신을 논하지 말라"...능력중심 발탁

신하들 반대한 전투 강행 "만류했기에 철저히 준비해 승리했다" 포상

 

 

 

 

◇스스로 갈고닦고 본인에게 엄격=조조는 정치, 경제에서부터 서예, 건축, 의상디자인 등에까지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다. 조조는 손자병법 관련 문헌을 수집, 정리해 13편으로 엮고 해설하는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 또 '맹덕신서'라는 병법서를 짓기도 했다.

 

조조의 뛰어난 지략과 병법은 폭넓은 지식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조조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도 평가됐다. 이는 모두 그의 인재등용 과정에서 좋은 인재를 발굴할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낮에 군사전략을 궁리하고 밤에 유교경서를 읽으며 사색에 잠겼다'고 묘사한다. 또한 '높은 곳에 오르면 시를 읊조리고 새로운 시가 나오면 음악에 맞춰 노래했다'고 말한다.

 

조조는 엄격했다. 스스로 법을 만들고 이를 어기는 자는 아무리 지위가 높다 해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는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조조는 전쟁에 출전하며 백성들의 밭을 밟지 않도록 말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했는데 밭을 밟을 경우 주인의 목을 베 엄하게 다뤘다. 하루는 자신의 말이 밭을 밟았고 조조는 자신의 목을 치라 했다. 부하들이 그를 만류하자 조조는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전 부하에게 나눠줌으로써 경각심을 일으켰다 한다.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리더는 스스로를 갈고 닦고 자신이 정한 기준을 지키는 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경외감을 갖게 하는 한편 원칙을 공유하게끔 하는 것이다.

 

◇철저한 인재등용, 용인술의 달인=조조는 평생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유재시거(唯才是擧), 즉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특별한 재주가 있는 사람을 찾으려 했다.

 

조조 주위에는 이미 그의 능력에 호감을 표하는 많은 인재가 있었으나 인재에 대한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인재에 대한 그의 시각은 건안 15년에 발표한 일종의 인재등용 성명서 '구현령' 에서 더욱 자세히 나타난다.

 

 

  "천하의 인재는 위정자가 적극적으로 찾아내지 않으면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는 청렴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든가, 충성심이 증명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다든가, 또는 신분이 낮아서 못 쓴다든가...등의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

마음에 드는 인물이 있으면 다소 결점이 있더라도, 자신의 타입이 아니더라도, 등용하고 볼 일이다. 능력에 따라 부하를 부릴 수 있는지 여부가 지도자로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조조는 능력을 갖춘 인재라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영웅에게 출신을 논하지 말라'는 것이 조조의 철학이었다.

 

조조가 총애했던 책사 순욱은 적군 원소의 부하였다가 조조의 부하가 돼 관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순욱이 원소의 곁을 떠나 조조에게 왔을 때 그는 문 앞가지 마중을 나와 손을 잡고 "당신과 같은 우수한 참모는 내게 있어 옛날 자방(장량)과 같은 존재"라며 기쁨을 드러냈다.

 

또한 조조는 자신의 맏아들인 조앙과 조카 등을 죽인 적군의 장군 장수가 관도대전 이후 항복하자 과거를 따지지 않고 장수를 받아들이고 장수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허저, 전위, 장요, 가후 등도 조조가 발굴해낸 대표적 인물들이다.

 

조조는 철저히 실력 중심으로 인물을 선발했다. 이는 학연, 지연 등이 넘쳐나는 오늘날 리더의 인재등용에 시사 하는 바가 크다. 특히 조조는 자신이 선발한 인재가 다소 결점이 있더라도 용인하며 대신 적재적소에 배치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왔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처럼 이는 리더의 주요 역할이기도 하다.

 

◇신속한 결단력과 실용주의= 오환정벌은 조조의 조직장악력과 통솔력을 드러내는 일화 중 하나다. 원정을 나서기 전, 많은 신하들이 조조를 만류했다. 하지만 조조는 자신이 결정을 내린 것에 지체하지 않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오환정벌에 나섰고 결국 승리한다.

직후 성으로 돌아온 조조는 정벌을 말린 신하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숙청대상이라 다들 예상했던 것과 달리 사실 이는 포상명단이었다. 조조는 "승리를 거뒀지만 다소 무모했다. (신하들이) 만류했기에 더 준비해서 이길 수 있었다"고 이유를 말했다.

 

조조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리더였다. 각종 전투병법과 인재등용 과정에서도 그의 결단력과 실용정신이 확연히 드러난다. 조조는 천하의 인재를 구하는 포고문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효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능력만 뛰어나면 좋다'고 했다. 이는 명분보다는 구체적인 실리를 추구하는 실용주의, 합리주의로 평가된다.  

 

조조는 전투에서도 의외의 수를 제안해 적을 제압했다. 전체를 상대로 하기보다 적의 허를 찌르며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그의 방식은 오늘날 때때로 적을 속이는 권모술수로 저평가되기도 하지만 실리를 추구하는 그의 방식으로도 이해된다.

 

조조가 완벽한 리더였던 것은 아니다. 조조의 아버지와 친인척을 죽인 대가로 죄 없는 서주 백성 수만명을 살해한 서주대학살, 여백사의 식솔들을 죽인 후 여백사까지 죽인 일화 등에서는 조조의 잔인성과 냉정하고 성급한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여색도 심하게 밝혔다. 젊은 시절 원소와 함께 신부를 강탈해 온 일에서 이미 그가 여색을 좋아하는 것이 드러난다. 처와 첩 중 성씨가 분명한 이만 열다섯명이라고 전해진다.

 

 

도움말 :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 아시아경제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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