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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커스리더學] 라이벌 리더 ①② 원효와 의상

대한유성 2012. 10. 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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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외통수攻' 연개소문···'뒤통수打' 김춘추

 

 

 

 

역사 속 리더들에게는 시대를 막론하고 늘 라이벌이 존재한다. 닮은 듯, 대조적인 그들이 어떻게 경쟁하고, 승패가 엇갈렸는지 그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자. 이는 경쟁 사회인 오늘을 살아가는데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이벌 리더① 권력욕과 복수심으로 맞선 고구려와 신라의 두 영웅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서로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점, 중국에서는 200년간 분열돼 있던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 그 뒤를 이은 당나라가 한반도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이 격동기에 맞섰던 인물이 신라의 김춘추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 신라의 친당 정책에 분노
당항성 점령 후 당태종 침략 물리쳐


◇김춘추와 연개소문=연개소문이 권력을 잡기 한 해 전인 641년, 백제에서는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다. 야심만만한 의자왕은 신라의 서부 지역을 공격, 대야성 등 4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백제군은 대야성을 지키고 있던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의 목을 베 신라로 보낸다.

사위와 딸의 목을 보는 김춘추의 심정이 어땠을까? 당장 보복을 하고 싶었겠지만, 당시 신라 군사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기로 한다. 신라와 고구려가 적대관계였던 점을 감안할 때 그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화친의 조건으로 신라가 빼앗은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김춘추가 요구를 거절하자 연개소문은 그를 고구려 정세를 염탐하러 온 첩자라고 보장왕에게 거짓 보고하고, 별관에 가둔다.

첩자로 몰린 김춘추는 자칫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김춘추는 보장왕에게 신임을 얻고 있는 선도혜라는 신하에게 뇌물을 준 뒤 '신라로 돌아가 선덕여왕에게 청해서 고구려의 요구를 들어 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리고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해 당 태종을 설득,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한다.

한편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간 김춘추가 친당 정책을 펴자 크게 분노해서, 백제와 연합해 당항성을 점령한다. 당항성은 신라가 뱃길로 당나라를 오갈 수 있는 중요 통로로, 당 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와 화친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신을 옥에 가두는 강경책을 썼고, 고구려를 정벌할 구실을 찾던 당태종은 몸소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하지만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은 계속된 당나라군의 침공을 모두 격퇴했다.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김춘추와 연개소문 간 대결의 대리전 성격이 없지 않다. 두 사람은 한반도에서 패권을 겨누던 라이벌이었지만,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맞붙어 대결한 일은 없다.

대신 김춘추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해서 강대국 당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당나라는 김춘추의 신라를 대신해서 연개소문의 고구려를 징벌하려 했다. 바꿔 말하면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대결은 김춘추의 외교력과 연개소문의 군사력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당 태종의 한반도 지배에 대한 야심이 맞물려 있었다.

고구려 힘 빌리는데 실패한 김춘추
외교력 발휘 당나라와 군사동맹 맺어


◇절반씩의 승자=김춘추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엇갈린다. 김춘추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와 우리나라의 영토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시켰다는 점에서는 비판 받고 있다.

연개소문도 마찬가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을 "조선역사 4000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높이 평가했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임금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무자비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돼 있다.

두 사람의 생애를 이끌어갔던 핵심 동력은 무엇일까. 김춘추에게는 그것이 '복수심'이라 할 수 있다.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지 못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대야성 함락으로 사위와 딸을 잃었을 때의 정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는 백제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를 찾아가 원조를 구했고, 그것이 좌절되자 당나라로 건너 가 온갖 굴욕적인 사대 외교를 서슴지 않으며 군사동맹을 맺어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

연개소문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당나라와의 치열한 투쟁도 따지고 보면, 자기에게 온갖 수모를 안겨주었던 반대파를 억누르고 독재 권력을 다지기 위한 측면이 없지 않다. 독재자들이 절대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대외 강경책을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이다.

강렬한 동기는 이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 해에 세상을 떴다는 것도 상징적이다. 왕위를 계승한 김춘추는 재위 7년째인 660년 3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서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에 대한 복수를 끝낸 그가 삶을 지탱해 왔던 핵심적인 추동력을 상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춘추는 연개소문보다 10년쯤 젊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4년이나 먼저 세상을 떴다.

연개소문이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지켜냈던 고구려는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그가 죽자 자식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내분으로 고구려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김춘추와 연개소문은 당대의 영웅이오, 강력한 라이벌이었지만 어느 쪽도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굳이 승패를 따진다면 절반씩의 승자다.

라이벌 관계인 두 리더가 치열하게 경쟁하되, 경우에 따라 협력했다면 함께 더 큰 발전을 이룩할 수도 있다. 그들이 대승적인 차원에서 협력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으리라.

 

 

 

[포커스리더學]

사람들을 찾아간 원효…사람들이 몰려온 의상

 

라이벌 리더 2.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왕실이나 귀족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발전했던 반면 신라에서는 백성에게까지 두루 불교가 전파돼 호국 신앙으로 발전했다.

 

원효와 의상은 두 번이나 함께 당나라로 불법을 공부하러 가려고 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둘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출신 성분이 달랐고 스님으로서의 수행 방법이 달랐으며 사상과 학문에 대한 태도에도 차이가 있었다.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 원효(617~686)

불법의 평등을 주장한 의상(625~702)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불법공부를 하러 가던 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포기한다. 원효가 잠결에 목이 말라 표주박에 고여 있는 물을 시원하게 마셨는데 다음 날 날이 밝아서 보니 토굴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무덤 속이었고 표주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해골바가지였다.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셨다는 것을 안 원효는 심한 구역질을 하며 일체유심조라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 후 원효는 자신을 소성거사(卜姓居士, 아랫것 중의 아래)라고 낮춰 부르며 백성에게 부처님 말씀을 알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애썼다.
 
말과 행동이 거칠었던 원효는 많은 구설이 뒤따랐다. 절이 아닌 여염집에서 자고 광대들이 쓰는 칼과 봉으로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술집과 창녀집을 드나드는 등 파계승과 같은 기행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백성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그 과정에서 불법을 전파했다. 덕분에 백성도 '부처'를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불심을 키울 수 있었다.
 
의상은 젊은 시절 원효와 함께 고구려의 보덕 스님 등에게 가르침을 받고 당나라로 건너가서는 화엄 사상의 대가인 지엄 스님 밑에 들어갔다. 지엄 스님이 입적한 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문하생들을 가르치며 화엄 사상 연구에 정진했다.
 
의상이 당나라에 머문 기간은 10여 년쯤이다. 그 동안 한반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는 한반도에 들어 와 있는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투쟁했다. 귀국 후 의상은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절을 지어 불법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그는 백성에게 불법을 가르치기보다 제자들의 교육에 더 힘썼다. 의상의 밑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있었고 이들이 화엄종이란 큰 교단을 형성했기에 그를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라고 한다. 반면 원효는 교단을 통한 가르침보다 대중 교화에 더 힘썼던 까닭에 그의 제자들이 의상처럼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여인에 대한 태도 또한 달랐다. 원효가 과부였던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은 일은 널리 알려진 에피소드다. 의상에게도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선묘는 의상이 처음 당나라 양주에 도착해서 머물었던 양주성 주장(州將)의 딸이다. 그녀는 한 눈에 의상에게 반해 그를 유혹하려 했지만, 불법을 공부하러 온 의상의 굳은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10년 사랑이 무위로 끝나고 의상이 신라로 돌아가게 되자 선묘는 바다에 투신, 용이 돼 의상의 뱃길을 보호한다. 또 의상이 귀국한 후에도 용이 된 선묘가 여러가지 신통력을 발휘해서 의상을 돕는 일화를 남겼다.
 
만일 원효와 의상이 세속적인 라이벌이었다면 자신과 여러 면에서 이질적인 상대방을 서로 비난하며 내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효와 의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벗이었고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으며 부족한 것을 상대방에게서 배웠다.
 
원효는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그에 따르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깨우침을 주고 있다.
 
"조금 들은 좁은 의견을 내세워 거기에 따르면 좋다고 하고, 반대하면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갈대 구멍으로 하늘을 보면 좋다고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늘을 보지 못하는 자라고 말한다."
 
의상의 화엄사상도 우주 만물이 대립하는 것이 아닌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가르침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하나라고 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배척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족한 것을 상대방에게서 배우며 함께 넓고 깊은 부처님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흔히 라이벌이 있으면 불편해 한다. 또 라이벌에 대해서 부담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라이벌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한 일이다. 맞서는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며, 노력함으로써 더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은 발전의 원동력이다.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다할지라도, 나와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고, 부족한 것을 상대방에게서 배우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함께 더 큰 발전을 이룩한다면, 그래서 함께 승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창조적인 라이벌 관계다. 원효와 의상의 삶에서 그러한 본보기를 볼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
/ 아시아경제

 

 

 

 

 

 

1. 원효 스님

 

스님의 법명은 원효(元曉), 법호는 화정(和靜), 속성은 설씨(薛氏),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압량군 불지촌(押梁郡 佛地村 : 지금의 경산군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스님은 10세에 출가하였는데 남달리 총명하여 출가 때부터 스승을 따라 경전을 배웠다. 성인이 되어서는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 스님은 경학뿐만 아니라 유학(儒學)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다.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에 주석하고 계신 보덕 화상(普德和尙)의 강하(講下)에서 <열반경>, <유마경> 등을 수학하였다. 영취산 혁목암(靈鷲山赫木庵 : 지금의 통도사 산내암자)의 낭지(郞智) 화상에게서도 사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신승(神僧)이신 혜공 화상(惠空和尙)에게서도 사사하였다.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 법사와 규기 화상에게 유식학을 배우려고 요동까지 갔지만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옥에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10년 후 45세 때에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다로 해서 입당하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는 도중 비를 만나 산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 겨우 토굴을 찾아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갈증이 나 토굴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떠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 무덤이었으며 물을 떠마시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 하룻밤을 더 지내게 되었는데 이에 귀신의 작란(作亂)에서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유심(唯心 : 모든 사물의 법칙은 오직 한마음에서 일어남)

 

知心生故種法生(지심생고종법생)

心滅故 不二(심멸고촉루불이)

마음이 생기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무덤,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구나.

 

활연대오를 한 원효스님은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서 또는 거지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포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화엄경>을 주석하였다.

스님은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誰許沒柯斧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아작지천주)”라는 노래를 불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님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만 무열왕이 그 노래를 듣고 뜻을 알았다.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인재를 낳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알아차린 무열왕은 스님을 요석궁으로 들게 하였다.

이후 선사는 설총(薛聰)을 낳은 후 실계(失戒 : 스스로 계율을 파하였다 함)하였다 하여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 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광대들이 무농(無弄)하는 큰 박을 본 따 무애호(無碍瓠 : 나무를 깎아 만든 바가지)를 만들어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의 일생은 화쟁(和諍)의 교법(敎法)에 의하여 자리(自利)를 구하고 대중교화를 통하여 이타(利他)를 행함으로써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일관하였다.

 

스님은 인간의 청정한 마음이 현실에 훈습되어 불각심(不覺心)이 일어난 무명업상(無明業相)을 미오한 현실생활 속(俗)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데 전생을 바쳤다.

신문왕 6년(686)에 세수70세 법랍 60세로 입적하셨다.

 

■경주 해회선원 회주 현대불교신문

 

 

2. 원효성사와 무애행

 

민중 더불어 노래하고 춤추며

부처님 가르침 쉽게 접하도록

 

원효 스님(617~686)은 지금으로부터 1천3백여 년 전 이 땅에 한국불교사상과 철학사상의 새로운 장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불교를 처음으로 대중화·실천화한 고승이다. 간혹 스님의 위상은, 그러한 사실들보다는 스님의 기행이나 파계행각만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스님은 일정한 스승 없이, 일정한 주처 없이 공부하다가 45세 무렵 늦은 나이임에도 유학을 시도하였던 정열적인 구도자였다. 유학 도중에 해골바가지 옆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가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 깨달음이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는 유심(唯心)의 도리였다.

 

스님은 세계 최고, 최대의 저술가로서, <열반경종요>나 <십문화쟁론> 등의 저술들을 통해 모든 학계나 종파를 초월한 통불교(通佛敎)를 천명하여, 향후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게 하였다. 모든 경전을 회통하여 하나로(一乘) 종합시켜 독자적인 사상으로 창조하였는데, 이는 용수보살이 대승불교를 완성한 이래 중국의 각 종파불교를 종합 회통한 일대 불교혁명이었다. 그리하여 신라이후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 끼친 영향도 매우 커서 성사 혹은 보살로까지 숭앙되고 있다.

 

스님이 지은 <금강삼매경소>는 자존심 높은 중국인도 논(論)이라 높여 불렀고 그의 <대승기신론소>와 <별기>는 세계의 성인이라 칭송받고 있는 마명과 용수의 저술과 더불어 3대 저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은 이러한 저술을 통하여 모든 학술을 원융무애한 화쟁사상(和諍思想)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를 위해 보살행을 널리 폈다.

 

스님은 요석공주와 결혼하여 파계하고 자기를 ‘아랫것 중의 아래’라는 뜻의 복성거사(卜姓居士) 혹은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며 무아행을 폈다. 즉 항간에 나가 표주박에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글을 새겨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거지나 창기들을 비롯한 하층민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염불을 외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교화하였다. 이 때부터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모든 것에서 거리낌없는 사람이라야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날 수 있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님의 오도적 삶을 크게 확대하고 사상의 깊이를 심화시켰으며, 오로지 일심사상으로 돌아가 널리 중생을 이익 되게 하였던 것이다.

 

원효의 사상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①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②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③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애14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 동국대학

 

 

 

 

의상의 입당 구법

 

중국의 화엄종장이 극찬한 해동의 ‘마니보주’

 

귀족출신으로 19세에 출가

26세 때 원효와 입당 시도

 

깨달은 원효는 신라로 귀향

의상 “죽어도 가겠다” 다짐

 

 

▲범어사 소장 의상대사 진영.

 

 

의상(義相)은 진평왕 47년(625)에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났고, 성장하면서 구도적 천성이 역연했던 의상은 나이 19세에 왕경에 있는 황복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8년 연상인 원효와 만나 함께 구도의 세월을 보내지만, 그의 가계나 스승, 그리고 국내에서의 수행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 무렵 구도의 열정에 불타던 신라의 젊은 구도자들은 중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용감한 젊은이는 머나먼 천축을 향하기도 하였다. 의상은 도반 원효와 함께 서쪽 중국으로의 유학길에 올랐다. 이들은 입당 구법을 두 차례 시도했다. 1차의 입당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이 정탐자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돌아왔다고 했다. 의상의 나이 26세 때인 진덕여왕 4년(650)의 일이다. 이 무렵 한반도는 삼국이 서로 대결하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다.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에는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맥(濊貊)의 도적들이 횃불을 들고 야경(夜警)을 단단히 하여 구도(求道)의 도정(途程)으로 말하건대 움직이기만 하면 가시덤불이었다. 그러나 이미 산을 만들겠다는 뜻이 간절한지라 홀로 배수(背水)의 마음을 품어 어렵고 위험한 것을 꺼리지 않은 채 멀리 호랑(虎狼)의 나라로 건너갔다. 능히 상해(傷害)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어찌 양차(羊車)와 녹차(鹿車)에만 의지하겠는가? 곧장 바다에 떠서 높이 피안(彼岸)에 올랐던 것이다.


예맥은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이 글은 1차 구법의 어려움과 위험스러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길은 흔히 뱃길이 이용되었고, 고구려와 당의 국경지대인 요동을 통과하는 루트도 있었는데, 요동은 중국 대륙과 우리나라의 교통의 요지였다. 그리고 7세기 중엽의 요동은 고구려의 영토로 당의 침략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특히 의상이 입당을 시도했던 650년경의 요동은 당의 침략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었기에 변경의 수비군에게 정탐자로 오인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겨우 목숨을 건져 신라로 돌아왔던 두 젊은 구도자는 10년 세월이 지나도 구법의 꿈을 접지 못했다. 문무왕 원년(661), 의상과 원효는 또 다시 구법의 길에 올랐다. 동아시아가 전쟁으로 소란하고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무너졌던 그 풍진의 시절도 이들의 열정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상이 원효와 함께 2차로 시도했던 입당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배를 타기 위해서 항구로 가던 도중에 심한 폭우를 만나 고분에서 피했는데, 이때 오도(悟道)를 체험한 선배 원효는 입당을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홀로 남은 의상은 죽어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마침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빌려 타고 등주(登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등주의 해안에 도달한 의상은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의 관아에 유숙하도록 청했는데, 공양이 풍성했다.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의상의 용모가 뛰어남을 본 그 소녀는 아양을 떨면서 유혹했다. 그러나 의상의 마음은 돌과 같아서 바꿀 수가 없었다. 소녀는 갑자기 도심(道心)을 발해, 의상 앞에서 크나큰 원을 말했다.


“세세생생(世世生生)토록 화상(和尙)에게 귀의하여 대승을 익히고 배우며, 큰일을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단월(檀越)이 되어 필요한 생활 용품을 공급하겠습니다.”


의상은 장안(長安)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장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종남산(終南山) 이 있었는데, 의상은 이 산의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602~668)의 제자가 되었다. 661년이다.

의상이 지상사로 오던 그 전날 밤에 지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해동(海東)에서 난 하나의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으로 와서 덮었다. 그 위에 봉의 집이 있기에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있어서 광명이 멀리 비치고 있었다. 지엄은 꿈을 깬 뒤에 놀랍고도 이상하여 소제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지엄은 의상을 특별한 예로 맞아서 조용히 말했다.


“나의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
그리고 입실(入室)을 허락했다.


신라에서 자란 큰 나무의 가지와 잎이 중국을 덮었고, 그 나무 위에는 광명을 발하는 마니보주가 있었다는 꿈은 의상의 그릇과 인품과 학덕을 크고 빛나는 것으로 윤색하고 있다.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에게는 의상뿐만 아니라 혜효(慧曉), 박진(薄塵), 회제(懷齊), 도성(道成), 혜초(慧招), 번현지(樊玄智), 법장(法藏) 등 여러 제자가 있었다. 지엄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의상을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화엄을 가르쳤다. 당시 지엄은 이미 61세의 고령이었고 의상은 38세였다.

 

지엄 문하에서 7년간 수학
210자로 불후의 걸작 완성

 

당의 신라 침공 알리려 귀국
선묘낭자 용 되어 의상 보호


의상이 지엄 문하에서 화엄을 수업하기 7년 세월,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에게 말했다.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총명약 10여 제를 주는 꿈을 꾸었고, 청의동자(靑衣童子)를 만나서 비결(秘訣)을 세 차례나 전해 받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이를 들은 지엄이 말했다.

“세 번이나 신주(神呪)를 받았으니, 멀리서 찾아와 부지런히 수행한 응보가 나타났구나.”

이에 터득한 이치를 저술하도록 명하였다. 의상은 ‘대승장(大乘章)’ 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다. 지엄이 말했다.

“뜻은 아름답지만, 문사가 오히려 옹색하다.”

이에 물러나서 번거롭지 않게 하고 두루 통하게 한 다음 ‘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 이름 했다. 지엄은 의상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원을 맺고 이를 태우면서 말하였다.

“말이 성지(聖旨)에 맞는다면, 원컨대 타지마소서.”

타고 남은 210자를 의상으로 하여금 주워 거두게 하여 간절히 서원하면서 다시금 맹렬한 불길 속에 던져 넣었으나 끝내 타지 않았다.


지엄이 찬탄하고, 그것을 엮어서 게송을 짓게 하였다.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닫고서 7언 30구를 이루었으니, 이것이 법성게(法性偈)다.

껍데기는 버리고 불태워, 끝내 불에도 타지 않는 영롱한 사리와도 같은 210자로 지은 법성게는 불후의 문장임에 분명하다. 의상은 이 시를 54각의 도인(圖印)에 합쳐서 이를 법계도(法界圖)라고 하였다. 668년 7월15일의 일이었다. 이 해 9월에는 고구려가 망했고, 10월 29일에는 스승 지엄이 돌아갔다.

의상이 지상사에 있던 660년대의 종남산에는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조(祖)로써 유명한 도선(道宣, 596~667)이 정업사(淨業寺)에 살고 있었다. 의상에 비해서 29세나 연상이었던 도선은 의상이 종남산에 이르렀던 661년에 이미 60대 중반이었다. 도선이 의상을 초청해서 공양을 대접했는데, 이때 의상이 천신(天神)의 옹호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 도선은 그 도가 자기보다 나은 것에 탄복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669년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도 갈등이 시작되었다. 신라에서는 66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듬해 1월 당 고종은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었다.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흠순 등이 몰래 의상에게 귀국하여 조정에 이 소식을 전해주기를 권했다. 이에 의상은 670년에 서둘러 귀국했다.


의상은 귀국길에도 문등(文登)의 옛 신도 집을 방문했다. 수차의 공양과 보시에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선묘는 집에 없었다. 의상은 곧 상선(商船)을 불러 천천히 닻줄을 풀었다.

뒤늦게 소식을 안 선묘는 의상을 위하여 마련했던 법복과 모든 집기를 모아 상자에 담아서 해안으로 달려갔을 때 의상이 탄 배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했다.

“나의 본래 참된 마음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원하건대, 이 옷상자가 앞의 배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상자를 물결에 던졌다. 질풍이 이것을 순식간에 불어 가는데 마치 기러기 털과도 같았고, 멀리서 바라보니 그 상자가 배에 들어갔다. 그녀는 다시 서원했다.

“내 몸이 변해서 큰 용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그래서 저 배가 무사히 신라 땅에 닿아 스님이 법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옵니다.”


그리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원력(願力)은 굽히기 어렵고 지성은 신을 감동시켜 그녀는 과연 용의 형상으로 변했다. 선묘화룡(善妙化龍)은 혹은 뛰고 혹은 그 배 밑에서 꿈틀거리면서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해서 저쪽 신라의 해안에 편안히 도달할 수 있었다.


이 설화를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허구적인 요소가 많기에. 선묘설화는 의상에게 사랑을 느낀 선묘가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도심을 발한다는 내용과 두 번이나 몸을 바꾸면서 의상의 화엄전교를 돕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설화에는 세속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한 차원 높은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되고 있다.

한 젊은 구도자 앞에 나타난 아름다운 아가씨가 털어 놓는 사랑의 고백, 그것은 그 구도자에게 닥친 가장 큰 시련이며 함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의상의 구도심은 여기에 꺾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는 아가씨 선묘를 구도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歸命)하여 대승을 배워 익히며, 대사(大事)를 성취하겠습니다.”

선묘의 이 서원에는 속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이 보이고, 의상의 의연한 태도에는 구도자의 진정한 모습이 엿보인다.
 

 

 

 

김상현 동국대 사학과 교수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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