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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불에 덴, 최강 위나라…불로 오를 치다 三國志經營-7.성공하면 벤치마킹, 실패하면 단순모방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 영원한 1등은 없다. 1등은 늘 쫓긴다. 학창시절 시험 성적표에서부터, 기업 간 생존경쟁까지…. 가장 높은 자리를 지키기 위한 1등과 이를 밀어내려는 2,3등의 노력은 매번 처절하다. 역사 속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강자와 도전자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왔다. 삼국시대 위나라는 최강자였다. 유비의 죽음 후 그 유명한 출사표를 유선에게 올린 제갈공명은 수차례 북벌을 감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번번이 실패했다. 건흥 12년(234년) 다섯번째 북벌에 도전하며 공명은 오나라 손권에게 참전을 요청했고 손권은 과감하게 위나라에 전쟁을 선포한다. 앞과 뒤에서 동시 공격을 받게 된 최강자 위나라는 어떤 전투를 펼쳤을까. 적벽대전의 쓰라린 패배..소호구 기습으로 되갚아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 “내가 한 일 대부분은 베끼기”
애플 등 세계적 기업들도 모방전략 성공사례 많아
위나라는 앞서 적벽대전의 참패를 잊지 않고 있었다. 당시 위나라는 오나라의 특기인 화공에 당하며 속수무책으로 불바다에 휩싸였다. 위나라는 오나라를 상대로 다시 화공에 당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특기를 모방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포커스리더學] 유비의 칼은 겸손이요, 방패는 신뢰였다 三國志經營-8.관우·장비·조운 이끈 감성리더십 가난한 시골 청년에서 촉한의 1대 황제에 오르기까지. 유비의 리더십은 오늘날 각광받는 '감성 리더십'의 대표적 예로 꼽힌다. 객관적으로 유비는 동시대 조조보다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입신의 기초를 갖고 있기는커녕 오늘날로 치자면 돈도 학벌도 평균이하인 시골 협객에 불과했다. 문무에 있어서도 조조를 비롯한 당대 영웅들에 비할 바 못됐다. 그런 그가 영웅으로, 리더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정의 약속한 '도원결의' 평생 지켜 -인재발탁 위해서라면 버선발 마중
-신뢰하면 전권위임으로 충성 유도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유비에 대해 "넓은 견식과 강한 의지, 풍부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고 확신이 서는 인물에게는 자신을 낮추기를 서슴지 않았다. 고조의 품격을 지니고 있고 영웅의 그릇이었다"고 평가했다. 후흑학(厚黑學)에서 이종오는 "유비의 특징은 참으로 드문 낯가죽의 두꺼움에 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다"면서도 난세에 큰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 중 하나를 유비의 이 같은 '후(厚:낯가죽이 두꺼움)'로 정의했다. 유비는 맨주먹으로 관우, 장비, 조운(조자룡) 등과 같은 용장과 제갈량(제갈공명)이라는 최고의 책사를 얻었다. 무(武)에 능하지 않았던 그의 부족함을 채워준 이가 관우와 장비였고 당대 최고의 지략가로 꼽힌 공명의 활약은 두말할 바 없다. 수많은 영웅들이 그에게 애정과 경의를 표했다. 이는 유비가 '권모'보다 '정의'를 표했던 이였기 때문이다. 유비의 '정의'는 곧 인간적 매력의 원천이었다. ◆원대한 비전과 한결같은 결의=유비가 낙양에서 학문을 닦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무렵 한조(漢朝)는 각지에서 황건적 토벌 의용군을 모집했다. 이 때 뜻을 같이 한 세 젊은이가 복숭아 아래서 "국가와 만민 구제를 위해 전력을 하고자 한다"며 의형제의 연을 맺는데 바로 이것이 유비, 관우, 장비가 맺은 '도원결의(桃園結義)'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초심을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비는 전란과 매관매직, 부패로 시끄러운 난세에서도 꿈을 품고 그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유비는 한 왕조의 부흥과 함께 태평성대를 꿈꿨다. 그가 민중의 마음을 알고 위로한 덕장으로 평가되는 이유도 젊은 날 맹세를 저버리지 않고 한결같이 소중히 했던 모습 때문이다. 난세 가운데서도 빼어난 인재와 지원군을 수하에 거느릴 수 있었던 까닭도 이로 풀이된다. 일례로 지역상인들은 그가 의용군으로 나선다하자 군자금과 병참을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장사꾼처럼 셈이 빠른 이들은 없다. 당시 기록은 짧으나 그가 쌓아온 인간적 매력과 신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인재를 구하고 신뢰했다=유비는 인재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이였다. 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간 삼고초려(三顧草廬)는 대표적 일화다. 조조처럼 타고난 지략이 뛰어나지 않았던 유비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하게 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인재를 구하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유비는 자신의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또 전권을 위임했다. 참모들은 그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충심을 다했다. 관우와 장비는 대표적인 유비의 사람이다. 건안 5년(200년) 유비가 조조에게 패했을 때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귀순을 종용 받았다. 그러나 관우는 조조의 적인 원소의 부하 안량을 베어 조조에 보답한 다음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삼국지에는 장비가 홀로 조조의 대군을 쫓아내는 장면이 나온다. 건안 13년(208년) 그 유명한 장판교 전투다. 유비 군이 후퇴하자 조조는 직접 경비병을 이끌고 추격해 담양의 장판이라는 곳까지 따라붙었다. 이때 장비는 장판교 중앙에 서서 조조군을 향해 "나는 연인(연나라사람) 익덕 장비다. 나와 맞서 싸울 자가 있다면 나와라"고 호통을 쳤고 이에 조조의 군대는 동요하며 진격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유비의 군대가 매복해있을 것이라는 조조의 의심이 있었으나 앞서 관우가 한 말도 영향을 줬을 것으로 풀이된다. 천하의 맹장이라 불린 관우는 조조에게 몸을 의탁했을 당시 "내 아우 장비의 용맹에 비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함께 가는 리더십, 부하가 아닌 동반자=같은 시기의 이야기다. 유비 군이 신야성의 주민과 함께 철퇴하는 과정에서 지지부진한 가운데 조조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공명은 조자룡과 장비를 남기고 나머지 군대를 떠나보낸다. 전투 중 조자룡은 우물 옆에서 유비의 부인인 미부인과 아들 아두를 발견한다. 부상을 당한 미부인은 아두를 조자룡에게 맡긴 후 우물에 뛰어들었다. 조자룡은 미부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아두를 유비에게 바치지만, 유비는 외동아들을 애틋해하기는커녕 '못난 자식 때문에 나의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며 아두를 내동댕이쳤다. 자신의 가족보다 부하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었던 셈이다. 유비는 자신의 장수들을 승리를 위한 도구로 대하지 않고 동반자로 바라봤다. 바로 앞에서 이 말을 듣는 그의 부하들이 어찌 그에게 충성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수많은 용장이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것은 단지 부귀영화때문이 아니다. 전부를 걸어도 아깝지 않은 주군에 대한 믿음이다.
오나라 손권이 세 방향에서 군을 이끌고 전투에 나갔을 때 위나라의 황제 조예는 공명과 대치중인 사마의에게 수비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했다. 빗장을 단단히 걸어 닫고 있으면 제 아무리 수가 뛰어난 공명이라 하더라도 쉽게 성문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비전열을 가다듬는 동시 조예는 곳곳에 오나라의 군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병사를 파견했다. 또 조예와 만총은 직접 군사를 끌고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위나라의 군대는 소호 동쪽 연안에 위치한 오나라의 선박을 발견한다.
이후 위나라는 적군의 특기인 화공 즉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는 방법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오나라 전군은 혼란에 빠졌고 군선, 무기, 군량은 물론 사기까지 모두 잃었다. 오나라는 결국 전 병력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한차례 기습으로 전쟁의 판국은 크게 달라진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무찌르고 오나라에 승리를 가져다준 화공. 소호구 기습에서는 반대로 뼈아픈 패배를 가져다줬다. 오나라의 철수소식을 들은 공명은 좌절했고 북벌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생을 마감케 된다.
소호구의 기습에서는 최강자와 도전자의 전략이 어떠해야한지를 살필 수 있다. 최강자인 위나라는 도전자의 특기인 화공을 모방해 오나라를 무너뜨렸다.
기업 생태계 또한 마찬가지다. 도전자 기업들은 1인자가 갖고 있지 않은 차별화된 상품을 제공하며 시장을 공략한다. 이때 1인자가 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전략 중 하나는 이와 비슷한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모방전략'을 통해 다시 시장점유율을 찾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혁신은 찬사를 받고 모방은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기업 생태계에서는 모방 또한 중요한 전략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략적 모방은 단순한 모방과는 다르게 인식돼야 한다.
맥도날드, 월마트, 애플 등 미국기업에서부터 한국의 삼성전자, 이마트까지 모방전략을 통해 최강자에 오른 기업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은 자서전을 통해 "내가 한 일 대부분은 남이 한 일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백화점과 슈퍼마켓을 결합한 하이퍼마켓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브라질 업체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 스마트폰 시장을 둘러싸고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애플과 삼성전자 또한 전략적 모방이라는 측면에서 서로서로 강점을 가져와 적용하고 있다. 대다수 라이벌 기업에서도 이 같은 전략적 모방의 예가 드러난다.
특히 삼국지 속 소호구 기습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최강자인 위나라가 오나라를 상대로 총 1만명의 부대를 화공에 투입했다는 점이다. 화공에 투입하는 화살의 양이 클수록 효과는 더욱 크다. 자금력, 광고, 프로모션 등 대다수 부문에서 1등 기업은 2등 기업보다 우세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모방전략 사용 시 역량을 집중할수록 1등 기업은 전면대결에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또 전투가 장기화될수록 더 유리해진다. 자금력, 광고 등이 달리는 2등 기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대기업이 한 업종에서 후발자 즉 도전자의 위치에 있을 때도 이 같은 모방전략은 종종 발견된다. 후발자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다. 좀 더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고 더 나은 제품으로 승부수를 걸고 마케팅을 활발히 펼치는 것. 대기업이 도전자일 때는 이 모든 것을 풀가동시킨 정면공격이 유리하다. 보유자원이 월등하고 장기전 및 소모전에 승산이 있을 때는 최강자를 대상으로 포위공격을 펼치면 되는 셈이다.
통상 모방전략은 2등 기업들만의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1등 기업에 대한 벤치마킹이 대표적이다. 2등 기업이 1등 기업을 따라갈 때는 1등 기업의 강점을 모방해 자사만의 스타일로 발전시키곤 한다.
칼로리 제로콜라 시장을 둘러싼 코카콜라와 펩시의 사례를 기억해보자. 코카콜라가 다이어트콜라를 출시한 이후 펩시는 일본 펩시코사와 협력해 다이어트콜라보다 맛이 좋은 칼로리 제로콜라 펩시넥스를 선보였다. 맛으로 승부수를 둔 펩시넥스의 인기로 그해 일본 시장 내에서 탄산시장 1위는 코카콜라였지만, 제로칼로리 시장에서만은 펩시가 코카콜라를 제치게 된다. 이후 코카콜라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펩시가 먼저 시작한 모방전략에 코카콜라도 모방전략으로 맞대응한다. 코카콜라는 다시 모방전략을 통해 한단계 맛이 개선된 코카콜라 제로를 출시한다.
기업환경은 날마다 빠르게 변화된다. 이 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발전을 이뤄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자사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상대의 차별화전략을 모방해 한단계 더 발전시켜라. 경쟁은 곧 발전을 이뤄낼 것이다.
또 1등 기업은 경쟁에 뒤처지지 않는 것과 함께 시장 선도의 역할도 잊지 말아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가는 것 역시 1등 기업의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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