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스킬/기타 낙서장

[스크랩] 채미정(采薇亭,2009.11.13.금)

대한유성 2010. 11. 4. 22:27

淸風臺와 叩馬巖의 奇觀을 곁에 두고,

어찌 嘯詠歌舞의 風流가 없을 수 있으랴?

 

마산에서 함안을 경유하여 진주로 가는 1004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자리잡은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있다.

 

이 서산서원은,

단종의 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6명의 충신중 한분인 정절공 어계 조려(1420~1489,세종2년~성종20년)선생께서  은둔 소요하시던 이곳 서산(지금의 백이산)아래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에, 1703년(계미년 ,숙종29년)  영남의 선비들이 뜻을모아 생육신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경상도 유생 곽억령 등이 서원의 건립 재가를 상소하여,다음해 1704년(갑신년,숙종30년)에 예조판서 민진후의 진달로 윤허가 내려졌으며,

임금이 제문(지제교 이언경 지음)과 봉안문(병조좌랑 곽수구 지음)을 지어 예조좌랑 도영하를 보내 생육신의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 하였다.

 

생육신의 향사를,

매년 음력 삼월 중정일(中丁日)에는 미천제(薇薦祭)를, 중양절인 음력 9월 9일에는 국천제(菊薦祭)를 봉향한다.

 

1713년(계사년,숙종39년) 경상도 유생 손경장 등의 사액(賜額) 상소에 의하여 동년 예조판서 김우향의  진달로 윤허가 내려져 서산서원(西山書院)이라는 액호(額號:나라에서 하사한 현재의 현판)가 내려져 사액서원(賜額書院=公認西院)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도,

임금이 제문(지제교 정유점 지음)을 지어 예조좌랑 홍도달을 보내 생육신의 영령을 위로하였으며,이맹전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은 성담수 등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야 한다고 임금께 상소하여 윤허를 얻어 여섯분의 제향을 올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1871년(신미년) 고종황제 8년 음력 3월 18일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액서원중 47개만 남기고 훼철됨에 따라 서산서원도 훼철되어 채미정(采薇亭)에서 생육신의 향사를 봉향하고 있던중 1980년 정부 보조와 유림 및 후손들의 성금으로 대지 3243평 위에 착공하여 1984년 10월 3일 113년 만에 서원을 복원하여 준공식을 갖고 생육신의 위패를 봉안하고 국천제를 봉향하고 있다.

 

이 서산서원의 동쪽. 지금의 1004번 지방도 건너편에,

청풍대(淸風臺)와 고마암(叩馬巖)의 기관(奇觀)을 곁에 두고 어찌 소영가무(嘯詠歌舞)의 풍류(風流)가 없을 수 있으랴?하여

1735년 서산서원의 강당 동편 담장밖에 정자를 세워 채미정(采薇亭)이라 불렀다.

현판의 채미(采薇:캘채.고비 미)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섬기는 것을 수치로 여겨 수양산에 숨어서 고비를 채취하여 먹다가 아사(餓死)한데서 유래한 바 충절을 지키신 어계 조려 선생을 이에 비견하여 붙여진 이름이리라...

채미정 맞은편 안산 뒤로 보이는 산이 백이산인데 왼쪽이 백이봉이고 오른쪽이 숙제봉이다.

 

함안에서는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이른바 ‘남고북저(南高北低)’의 땅인 탓이다.

남쪽에는 여항산이, 서쪽에는 방어산이, 동쪽에는 청룡산이 물길을 가로막아 낮은 목을 찾아 물이 북쪽으로 흐른다.

그래서일까.

남강댐이 건설되기 전만 해도 홍수 때면 하천이 범람해 함안 땅은 물바다가 돼버렸다.

이렇듯 거꾸로 흐르는 물길에서 옛 사람들은 ‘반역의 기운’을 감지했고, 함안 사람들은 이런 굴레를 벗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함안 북쪽에는 낮은 지형에도 모두 산이란 이름을 붙여 죽산, 대산으로 이름을 붙였고, 우뚝 솟은 산줄기임에도 ‘낮아서 배가 넘어간다’는 뜻의 여항산(艅航山)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남쪽의 높은 땅에는 반대로 병곡, 비사곡 등 곡(谷)이란 이름을 붙였다.

높은 지세는 낮은 이름, 낮은 지세는 높은 이름으로 다스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름만 바꾼다고 땅의 기운이 달라질까.

함안은 ‘반역의 땅’은 아니었지만, 유독 대쪽같은 심성의 선비들이 많았다.

이들은 역성혁명과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미련없이 벼슬자리를 던지고 칩거했다.

 

요동정벌에 나섰다가 이성계에 맞서 위화도 회군에 반대해 벼슬을 버린 조순.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 땅 함안으로 돌아와 자신의 거처를 고려동이라 이름하고 평생을 담장 밖에도 나가지 않았던 이오.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가 등극하자 과거도 보지 않고 두문불출했던 조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다가 무오사화때 부관참시를 당한 이인형.

병자호란에 비분강개하다 죽은 박진영.

이들이 모두 함안 사람이었다.

뒤쪽으로는 도로가, 앞으로는 철길이 나긴 했지만 흙담으로 둘러치고 작은 연못까지 거느리고 있는 채미정에 들면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진다.

정자에 오르면 백이산과 숙제봉이 나란히 눈앞으로 다가선다. 원래 이름은 쌍안산이었다는데, 단종 복위 후 숙종이 글을 내려 백이산이라 이름하자 나란한 봉우리에 숙제봉이란 이름이 따라 붙었다고 전해진다.

두말할 것 없이 은나라가 망한 뒤 수양산에 들어 고사리만 캐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와 숙제에서 따온 이름이다.

 ▲멀리서 바라본 서산서원의 전경.

▲채미정에서 바라본 태실방향의 풍경이다.

경전선 전철화 공사가 한창이다.

논 가운데의 하얀 물체는 건포 사일러지,볏짚을 숙성시켜 소 사료로 사용된다.

▲태실고개에서 바라본 경전선의 철로.

 ▲경전선 철로의 태실터널 입구.

 ▲선로의 곡선이 아름답다.

▲채미정 전경이다.

중앙의 은행나무는 수령 약 500년의 보호수(保護樹)다.

우측의 이팝나무 역시 수령 약 300년을 자랑하는 보호수다.

은행나무는 노쇠해 그 잎마저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노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 채미정의 건립 년내가 1735년 이니, 채미정이 건립되기 전 약 200년 전부터 이 은행나무는 이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고마암과 청풍대가 채미정이 건립되기 전, 당시에도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이었음을 말해준다.

어계 조려 선생이 1420년 이곳 원북에서 태어나 1489년에 졸 하셨으니, 이 채미정은 어계 선생이 태어난 후 약 300여 년 후에 조성된 정자다.

 

 

 

▲우측의 정자는 문풍루(聞風樓).

그 아래 비석에는 청풍대(淸風帶)라 쓰여있다.

 

 

 

 

 

 "백세청풍(百世淸風)".

생육신 조려의 생가가 있는 군북면 원북리 일대에서 가장 자주 마주치는 글이 바로 ‘백세청풍’이다.

조려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던 ‘고바위’의 절벽에도, 영월에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지내고 고향 땅으로 내려온 뒤 은거했다는 정자 채미정 현판에도 ‘백세청풍’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세(百世)란 말그대로 100세대를 뜻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치니 100세대란 3000년이다.

청풍(淸風)에서 청(淸)은 ‘매섭도록 높고 맑음’을, 풍(風)은 바람이 아닌 ‘군자의 덕과 절개’를 일컫는 말이다.

함께 풀어보자면 ‘백세청풍’이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매운 선비의 절개’를 말하고자 함이겠다

 ▲채미정 지붕위로 원북마을이 보인다.

 

 ▲수령 약 500년의 채미정 은행나무.

 

 

 ▲채미정 지붕에는 여름철 무성했을 잡풀의 잔해와 낙엽이 기왓장의 골골에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고마암 문풍루에서 바라본 채미정의 풍경.

 

 ▲채미정 지붕에 수북히 쌓인  낙엽.

 

▲▼고마암에서 내려다 본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선생 열녀증정부인 전의 이씨 쌍절각"

앞을 지나는 도로가 마산~진주간을 연결하는 1004번 지방도.

 

 

 

 ▲▼고마암에서 바라본 서산서원.

 

 ▲문풍루.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선생 열녀증정부인 전의 이씨 쌍절각"

 ▲고려 전서공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각.

 

 ▲▼뒤쪽에서 바라본 채미정.

 

▲앞쪽이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 선생 열녀증정부인 전의이씨 쌍절각"이고,

뒤쪽이 "고려 전서공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각":이다.

 

 ▲채미정의 후면.

 

 

 

 

 ▲채미정은 마산 진주를 잇는 1004번 지방도와 경전선 선로 사이의 채 100m가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채미정앞 철로에서 바라본 태실방향의 모습, 우측이 원북역이다.

 

 

 ▲좌측 야산이 문풍루가 있는 고마암.

 

 

 

 

 

경북 구미에도 채미정이란 정자가 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는

시조로 고려왕조가 쓰러진 안타까움을 노래했던 야은은 세상사에 등을 돌리고 금오산 기슭에 은거, 여생을 보냈다.

야은이 그토록 거부했던 조선왕조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50년쯤 지난 영조 때에 이르러 그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는 정자를 하나 세웠다. 바로 금오산 입구에 있는 채미정이다.

채미(採薇)는 ‘고사리를 캔다’는 뜻으로 중국 주나라 때 수양산에 은거해 고사리를 캐먹으며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켰던 ‘백이·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선산의 사림들은 야은이 고려가 망한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 금오산에 은거하며 살았던 곳에 충절을 기리는 정자를 세운 것이다.

야은은 금오산의 도선굴과 대혈사 등지에서 학문에 매진했으며 조선조의 수많은 학자와 시인묵객들이 야은의 충절과 고매한 학문을 찾아 금오산으로 찾아오게 한 선지자인 것이다.

 

 

 

 

 

 

 

출처 : 진공묘유
글쓴이 : 진공묘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