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원림(園林)이다.
조선 중종때의 선비인 소쇄옹(瀟灑翁) 양산보(1503~1557)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그 정확한 조영시기는 1520년대 후반과 153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가 스승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올바른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들이 왕의무능과 주변의 무고에 의해 꺾이고 결국 죽게되는 것을 보고,세상에 나가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은거를 위한 정자이다.
전체적인 면적은 1400여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물,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그 안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으며,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있고,북쪽의 산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담장밑을 통과하여 소쇄원 중앙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수목은 대나무와 매화.동백.오동.배롱나무.측백.치자.살구.황매화.산수유 등이 있으며,초본류는 창포와 맥문동.꽃무릇 .국화 등이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우물과 두개의 연못이 있으며,계곡을 이용한 석축과 담장이 조화로운 곳이다.
▲입구 주차장에 있는 소쇄원 안내글.
▲소쇄원 입구 길가에 가지가 휠 정도로 주렁주렁 열린 모과.
▲매표소를 통과하여 소쇄원 들어가는 입구의 죽림길.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인 만큼 그 입구가 참으로 정겹다.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밖으로 바라본 매표소입니다.
▲소쇄원의 상세 안내판.
▲소쇄원 남쪽전방은 이렇게 대밭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길다랗게 막혀있는 대밭사이를 양분하는 관통로를 내어 그 출입구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원래의 출입구 양쪽에서 대밭이 점점더 출입구를 잠식 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요....
▲후손이 기거하는 집이 있는곳에 샛노란 은행잎이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식영정(息影亭)에서 가사문학관을 거쳐 여기까지 오는 길가에 유독 노오란 은행나무가 그 맹위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소쇄원 연못에 비친 소쇄원의 가을입니다.
▲▼오곡문(五曲門),1548년 하서 김인후가 쓴 소쇄원 48영에 나오는, 담장밑을 흐르는 물을 노래한 바로 그 부분입니다.
이쪽 사면의 곡류가 저 담장밑을 뚫고 들어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며 오곡류가 됩니다.
▲오곡문 위쪽에서 바라본 후손들의 살림집입니다.
▲초가지붕으로 지어진 대봉대가 내려다 보입니다.저 대봉대는 1985년경에 다시 지어졌답니다.
▲▼제월당의 뒷모습입니다.
제월당은 정자라기 보다는 정사(精舍)의 성격을 띄는 건물로 주인이 거처하며 조용히 독서하는 곳이었다.
당호인 제월(霽月)은 ‘비 갠 뒤 하늘의 상쾌한 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쇄원도」에 나타난 제월당이나 광풍각이 소쇄원 48영이나 『유서석록』에는 나타나지 않아 흥미롭다.
물론 광풍각이 소쇄원 48영이나 유서석록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제월당은 『유서석록』이 제작된 당시인 1574년에는 아직 건립되지 않은 것이 아니냐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고목이 된 석류나무.
▲제월당의 측면입니다.
▲우측이 광풍각입니다.
양산보가 계곡 가까이 세운 정자를 광풍각이라 하고 방과 대청마루가 붙은 집을 제월당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견이 춘릉(春陵)의 주무숙(1017~1073)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갠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라고 한 데서 따온 이름이다.
고경명의 『유서석록』에서 계류 가에 있는 문방을 ‘마치 화방(畵舫,채색치장을 한 유람선)과 같다’라고 했던 것은 「무이도가」의 세 번째 노래에서 가학선(架壑船,절벽에 걸친 배)에 비유하며 그렇게 묘사한 것은 아닐까 추정된다.
즉 ‘가학선’은 상상컨대 옛날 큰 홍수로 배가 높은 곳에서 떠내려 와서 물이 빠지자 땅에 닿았으며, 세월이 흘러 썩어서 허물어졌는데 마침 산곡에 이것이 있는 까닭으로 해서 ‘상전해수’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소쇄원48영」에서 광풍각을 소재로 한 것으로 제 2영 ‘침계문방(枕溪文房’)은 머리맡에서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비의 방이라는 뜻인데, 시귀에 의하면 ‘창은 밝고 첨대는 맑으니 그림과 글시가 수석(水石)에 비치네, 뒤엉키는 착잡한 이념, 솔개와 물고기인 양 떠돈다.’라 하여 동창이 밝아진 계곡 주변 문방에서 느끼는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1574년에 쓰여진 『유서석록』에는 광풍각이라는 명칭은 쓰여지지 않고 ‘소재(小齋’)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1614년에 양천운이 쓴「소쇄원계당중수상량문」에는 계당(溪堂)을 ‘침계문방’ 혹은 ‘광풍각’이라고 같이 쓰고 있어 광풍각이 바로 ‘침계문방’ 임을 알 수 있다.
제월당이 주인을 위한 집이라면 광풍각은 객을 위한 사랑방이라 할 수 있다.
이 상량문에 의하면 광풍각은 1597년 불에 타버리고 1614년 4월에 중수하였다.
또한 ‘계당’은 광풍각의 별칭으로 또 다른 시기에는 침계헌, 침계방, 수함(水檻), 소함(小檻) 등으로 부르는 별칭이 있다.
▲광풍각(光風閣)입니다.
▲▼석류나무 곁에두고 광풍제월(光風齊月)을 벗삼아 청빈한 무욕의 삶을 이상으로 그렸을 법한 분위기인데...
현실과 이상은 너무도 큰 괴리로 다가오고.
애초의 집주인이 조광조의 제라라 하니,
스승과 제자의 치세관이 광풍제월같이 예리한 이상주의 였으니...
현실정치에서 받아들여 질 수가 없었으리라.
▲앞쪽이 광풍각이고 뒤쪽이 제월당입니다.
▲광풍각앞의 연못에 비치는 저 차갑고 투명한 맑은 기운이 광풍제월의 기본정신이겠지요...
이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현실정치의 갑갑함으로,실의에 가득찬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할수 있었던 일이라곤 별로 없었던듯 합니다.
전국 곳곳에 산재한 당(堂).루(樓).정(亭).대(臺).정사(精舍).재(齋).헌(軒)등이 그들이 할수 있었던 최소한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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