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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식영정(息影亭)의 만추(2009.11.07.토)

대한유성 2010. 11. 4. 22:26

식영정(息影亭)은,

1972년 1월 29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환벽당, 송강정과 함께 정송강유적이라고 불린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임억령이 지었는데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 바로 옆에는 김성원이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고 이름 붙인 또 다른 정자를 지었는데, 없어졌다가 최근 복원되었다.

서하당유고》 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 조대(), 서석대()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차도에서 바라본 식영정 전경.

 ▲계단으로 오르면 광주호의 상단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식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부용당(芙蓉堂).

본디 연못이었는데 1972년 새로이 정자를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이곳 호남지방의 정자는 거의다 정자에 방을 두었다.

영남지방의 정자들 대부분이 휑한 마루바닥으로 단순하기 그지 없는데 비해, 이곳의 정자들은 오밀조밀 그 구조가 정감이 가는게 풍류를 즐기기엔 더없는 멋이 우러 나오는 듯하다.

 

지금은 불타 없어진 경남 함양 안의면의 농월정(弄月亭)을 처음 보는순간 그 정자 내부의 목재칸막이에 놀라워했던 기억이 있는데...

▲서하당(棲霞堂).

이곳에 식영정을 지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에게 바친 서하당 김성원은 식영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자신의 호를 따서 서하당이라는 정자를 하나 더 짓는다.

 

"노을이 사는 집"이라는 뜻인데,최근에 복원되었다 한다.

그 이름한번 풍류가 넘친다.

▲좌측이 부용당이고 우측은 서하당이다.

중간에 은행나무가 섰는데,온통바닥을 노랑으로 물들였다.

▲서하당을 측면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그 앞쪽의 쪽문은 송강정철의 (송강집)목판보존을 위해 지어진 장서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서하당 마루에 걸터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어느 젊은 커플...

이들이 옛 선비들의 그 고매한 서정과 풍류를 어찌 다 알겠는가.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에도 옛 선인들의 그 멋스러운 사랑의 춤사위가 베어들었으면 좋으련만...

▲부용당의 굴뚝이다.

 

우리가 이곳에 가던날,관리인인 듯한 젊은남자가 말하기를,

"저 굴뚝이 낮은것은 방이 서서히 데워지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한다.

굴뚝이 높으면 더운공기가 빨리 위로 올라가면서, 아궁이의 화력이 구들장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기에 결과적으로 방이 빨리 데워진단다.

 

은근히 데워져서 천천히 식어가는 은근과 끈기의 지혜라고 하니...

그도 그럴법하다.

 

 

 

 

 ▲부용당의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곳 식영정의 아름다움은 인근의 소쇄원,환벽당과 더불어 "한 마을의 세 명승"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그 빼어난 미를 자랑고 있다.

송강정철의 가사가 결국은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것이니,이 빼어난 조화의 아름다움에서 그 창작의 영감을 얻었지 않았겠는가.

 

 

▲측면에서 바라본 부용당의 모습이다.

주위의 추색과 어울려 정말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자리한 식영정의 모습이다.

 ▲식영정에 앉아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

 ▲식영정의 편액.

 

▲식영정에서 내려다본 부용당과 서하당.

저절로 시심이 샘솟는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

 

성산별곡은,

1560년(명종 15) 송강정철이 25세 때 창평 지곡리 성산(:지금의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처외재당숙()인 김성원()을 경모하여 그곳의 풍물을 4계절에 따라 읊고, 서하당()의 주인 김성원의 풍류도 함께 노래한 것이다.

 

모두 84절 169구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 ① 서사(), ② 춘경(), ③ 하경(夏景), ④ 추경(), ⑤ 동경(), ⑥ 결사(結詞)로 나뉜다.

보편성이 모자란다는 점도 있으나, 작자의 개성과 얼이 풍부하게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작품집 《송강가사(松江歌辭)》에 실려 전하는 가사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엇던 디날 손이 성산(星山)의 머물며서, 서하당(棲霞堂) 식영정(息影亭) 주인아 내말 듯소, 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

 

 

▲정면에서 바라본 부용당의 모습이다.

갈수기라 그런지 연못은 바싹 말라있다.

▲식영정의 돌계단을 내려오면서...

좌측에 "송강정철 가사의 터"라고 적힌 비가 있다.

 ▲송강정철의 문학활동의 주요무대인 이곳 식영정은 뒤로는 성산이 받쳐주고,앞으로는 광주호가 그 물머리에 있다.

▲정말 멋진 풍광이다.

개인적으론 이곳 식영정이 인근의 소쇄원보다 더 끌린다.

건너편의 환벽당은 정보가 없어 미처 둘러보지 못했지만...

 

 ▼식영정을 강력 추천한다.

근처에 갈일이 있으면 꼭 들릴것을...

들려서 이 아름다운 인공과 자연의 극상의 조화를 확인하기를...

 

 

내장산 단풍을 즐기고 난뒤의 노랑색에 대한 식상함이 머리속에 남아 있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식영정에서의 그 끌림은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길이 가고 자꾸만 끌리듯.

식영정의 아름다움이 뇌리에 깊숙히,아주 깊숙히 새겨진다.

 

출처 : 진공묘유
글쓴이 : 진공묘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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