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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11-신실함, 삶의 굳건한 토대 (로마서3:3-4)

대한유성 2018. 9. 28. 06:28


오늘 살펴볼 성령의 열매는 충성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령의 열매가 그렇듯이 오늘 살펴볼 충성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충성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충성’ 하면 제일 먼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 바쳐 충성하는 군인을 떠올립니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킨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고, 조선시대 때 나라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을 떠올립니다. 국어사전에서도 “국가나 임금, 윗사람 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충성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합니다. ‘충성’의 대상이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라는 것만 다르지 충성에 대한 이해는 비슷합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섬기는 것이 충성이듯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것을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외적을 무찌르는 것이 자기 나라에 대한 충성이듯 타종교를 무찌르고 세상을 무찌르는 것을 하나님나라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이 신하된 자의 충성이듯 하나님의 호위무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 된 자의 충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목사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면서 타종교를 배척하고 세상을 배척하는데 앞장섭니다. 자기가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나라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앞장서서 동성애와 싸우고, 이슬람과 싸우고, 유대교와 싸우고, 불교와 싸우고, 공산주의와 싸우고, 자유주의와 싸우고, 단군신화와 싸우고, 종교 간의 화해와 싸우고 인문학과도 싸웁니다.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헌신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충성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충성을 원한 적도 없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또 그런 충성은 하나님의 성품에도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배척하고 싸우고 정복하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하나님은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충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충성’은 헬라어로 ‘피스티스’입니다.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실함을 뜻합니다. 헬라어 ‘피스티스’는 대부분 ‘믿음’으로 번역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막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말한 ‘믿음’이 바로 ‘피스티스’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가서 전도할 때 하나님이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행14:27) 여기서 말한 ‘믿음’도 ‘피스티스’입니다. 계시록에서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계13:10)고 한 부분에서도 ‘믿음’이 ‘피스티스’입니다. 이외에도 ‘피스티스’를 ‘믿음’으로 번역한 사례는 굉장히 많습니다.


또 ‘피스티스’를 ‘신실함’으로 번역한 곳도 많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참되다’는 뜻인데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 때 “내가 주안에서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고전4:17)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동료 그리스도인을 추천할 때에도 꼭 ‘신실한 사람’이라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엡6:21, 골1:7, 4:9).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했습니다(엡1:1).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했는데 그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했습니다(계21:5, 22:6).

‘미쁘다’로 번역한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자들의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롬3:3), 하나님은 미쁘시니라(고후1:18),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살전5:24),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딤후2:13),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1:9),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히10:23)에서 보듯이 ‘미쁘다’로 번역된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충성’으로 번역한 곳도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했습니다(마25:23).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탁하기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권면했습니다(딤후2:2). 고린도교회에는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고전4:2).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했고(계2:13,3:14), 서머나 교회에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고했습니다(계2:10). 이외에도 ‘충성’으로 번역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으로 번역한 것은 그리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실함’이나 ‘미쁘심’으로 번역하는 것이 ‘피스티스’ 본래의 뜻에 훨씬 부합한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충성과 신실함은 이미지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충성은 수직적인데 신실함은 수평적입니다. 충성은 일방적인데 신실함은 쌍방적입니다. 충성은 위계적인데 신실함은 관계적입니다. 충성은 권위적인데 신실함은 인격적입니다. 충성에는 충성해야 하는 대상이 있고 그래서 편향성이 있는데 신실함에는 그런 대상이나 편향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처럼 충성과 신실함은 많이 다릅니다. 아주 미미하게 겹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를 번역할 때 ‘충성’보다는 ‘신실함’으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신실함’으로 번역했어야 ‘피스티스’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실함’으로 번역하지 않고 ‘충성’으로 번역했습니다. 교회에서도 ‘신실함’에 대해서는 거의 설교하지 않고 ‘충성’에 대해서만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이 신실한 사람으로 자라기보다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사납고 전투적이고 거칠고 무례하고 편협한 고집쟁이들이 됐습니다. 믿음이 좋을수록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 영적 전투에 나서는 사람이 됐습니다. 사실은 믿음이 좋을수록 자기의 무지와 죄성을 깨닫고 겸손해야 하는데, 하나님처럼 온 세상을 품어야 하는데, 정반대로 자기만 의로운 줄 알고 교만하고 속이 좁고 무지하고 툭하면 정죄하고 싸우는 사람이 됐습니다. ‘피스티스’를 ‘신실함’으로 번역했으면 이런 그리스도인이 적게 나왔을 텐데 ‘충성’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이 나온 겁니다. 단어 하나가 이렇게 중요해요.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내용과 색깔이 달라집니다.


성령의 열매 ‘피스티스’는 ‘충성’이 아니라 ‘신실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실함으로 바뀌어야 하나님의 성품에도 부합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맺은 언약에도 신실하시고, 노아와 맺은 언약,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다윗과 맺은 언약, 독생자 예수와 맺은 언약에도 신실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에도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태양에게도 신실하시고, 지구에게도 신실하시고,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에게도 신실하시고,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에게도 신실하시고, 우리 각 사람에게도 신실하십니다. 사실 지구가 변함없이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고,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고, 바닷물이 경계를 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고, 사람의 심장이 쉼 없이 박동하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고, 온 생명이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입니다. 한 걸음만 더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신실하게 우주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신뢰하고 세상을 살아갑니까? 지구를 신뢰하고 허공에 떠 있는 지구 위에서 살아갑니까? 사람을 신뢰하고 인생을 살아갑니까? 그런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사람은 대부분,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또 날마다 의식하며 살지는 않더라도 무의식 가운데 창조주를 신뢰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자를 신뢰하기에 봄이면 씨를 뿌리는 것이고, 내일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아 시대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물로 온 세상을 멸하셨습니다. 그 후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명들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땅을 파멸시키는 홍수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창9:11)라고 언약의 말씀을 하시고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지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무지개가 구름 사이로 드러나면, 나는 그것을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하셨습니다(창9:16). 또 “땅이 있는 한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8:22).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현실입니다. 지금 온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언약과 맹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언약과 맹세를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온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가 일정한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하는 것이고, 태양이나 달과의 거리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질서와 조화가 있는 코스모스(cosmos)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상만 보고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만 사실은 하나님이 신실하게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자연 법칙이 가능한 것이고 과학적인 연구가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지 않는다면 세상은 뒤죽박죽일 겁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불안정할 겁니다. 하루도 맘 편하게 살지 못할 겁니다. 과학적인 연구도 불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연구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세상의 굳건한 토대요 삶의 굳건한 토대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통해 당신의 신실하심을 표상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신실하게 붙잡고 계시니 불안에 떨지 말고 편안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며 살라고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통해서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각도로 당신이 신실하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언약을 신실하게 지킨다(신7:9), 나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삼상15:29), 나는 인자함이 영원하고 성실(신실)함이 대대에 이른다(시100:5), 인자와 진실(신실)이 많다(출34:6), 나의 말은 영원히 살아있다, 사람은 다 거짓되나 나는 참되다고 말씀합니다(롬3:4).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너희와 온 세상에 신실하니 너희도 나와 온 세상에 신실하라고 말씀합니다(히10:23). 나에게만 아니라 내가 창조한 모든 것들에게도 신실하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들이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신실하게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실하기가 쉽습니까?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여곡절이 많거든요. 삶이 지나치게 힘들 수도 있고, 뜻하지 않은 고난이 닥칠 수도 있고, 가정에 우환이 밀려올 수도 있고, 돌이키기 어려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깊은 상처를 받고 우울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고, 지진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고, 악한 권력에게 짓밟힘을 당할 수도 있고, 세상이 너무 부패해 살아갈 의욕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이 과연 나를 신실하게 지켜주시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과연 세상을 신실하게 붙들고 계시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정말입니다.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믿음으로 뚫고 가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지금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급속하게 변합니다. 나라도 변하고, 사회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도덕도 변하고, 자연도 변하고, 사람의 겉모습도 변하고, 사람의 속마음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친구도 변하고, 이웃도 변하고, 노래도 변하고, 패션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하늘도 변하고, 땅도 변하고, 실로 모든 것이 변합니다. 쉼 없이 변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변합니다.

또 우리는 많은 물건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립니다. 컵도 일회용, 숟가락도 일회용, 휴지도 일회용, 걸레도 일회용, 밥도 일회용, 데이트도 일회용, 섹스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립니다. 아르바이트도 일회용이 많고, 일용직 노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굉장히 많습니다. 회사 직원이라고 해도 계약직이 많아서 잠깐 쓰고 버립니다. 요즘 문화가 그렇고 사람들의 의식이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필요할 때 쓰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립니다. 친구도 버리고, 애인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아내도 버리고, 심지어 부모도 버리고, 자식도 버립니다.

거기다가 불신이 하늘을 찌릅니다. 날마다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사건들(속칭 어금니 아빠 딸 친구 살해 사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사건들(가수 김광석씨 죽음과 그의 딸의 죽음), 거짓과 조작으로 얼룩진 사건(세월호 참사 첫 보고 시간 조작, 거짓 증언)들을 접하면서 불신이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서로를 믿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는데 우리 사회는 모든 믿음이 깨졌습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회, 믿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됐습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서로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봐야 하는 총체적 불신사회가 됐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슬프고 절망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이런 시대의 현실을 아파하면서도 이런 시대의 현실에 적응하고 길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인은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필요할 때 쓰고 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불신이 가득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에게 신실하라고 말씀하면 속으로 비웃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현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해버리고 안 듣습니다. 믿으면 망하니까, 믿었다가는 큰 코 다치니까 여간해서 안 믿습니다. 또 옆에 있는 사람이 자꾸 바뀌니까, 지금은 옆에 있어도 조만간 떠날 게 분명하니까 굳이 신실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신실해야 할 필요를 못 느낄 뿐만 아니라 신실함 자체를 싫어하고 힘들어합니다. 신실함 같은 건 세상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내팽개쳐버립니다. 묶이는 것도 싫어하고 약속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약속하면 지켜야 되고 묶이면 자기 맘대로 못 사니까, 그냥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것이 제일 편하니까 굳이 묶이려 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기피하는 것도 결혼하면 여러 가지로 묶이기 때문입니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 낳는 것을 기피하는 것도 자식에게 묶이는 게 싫고, 양육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는 게 부담되니까 그러는 겁니다. 요즘 성도들이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작은 교회에 가면 어쩔 수 없이 관계에 묶이니까, 맘 편하게 예배만 드리고 쏙 빠져나오면 좋겠는데 그게 안 되니까, 점심도 돌아가면서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니까, 이런 게 부담스러워서 작은 교회를 기피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이 모든 걸 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천 년 전에 예고했어요. “인자가 올 때에(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말씀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고 말했습니다(딤후3:1-5). 예, 지금 우리 사회가 꼭 이렇습니다. 믿음을 찾아보기가 어렵고, 믿음직함(신실함)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정의와 정직이 허물어졌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신실하게 살기란 정말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북돋아 주시고 붙잡아주십니다. 온 세상이 비록 빠르게 변화하고, 필요할 때 쓰고 버리면 그만인 일회성 문화가 만연하고, 불신이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그런 세상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신실해야 하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신실하신 분인 것처럼 우리도 신실해야 하니까(히10:23)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성령은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 수많은 사건들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없다’고 소리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은 둘째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신실하고, 하는 일에서 신실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시고, 신실함이 인격의 핵심 요소이자 관계의 핵심 요소이니까 그 신실함을 세상에 드러내도록 이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은 좌우지간 신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함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말했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어’가 아니라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무지개와 같아야 합니다. 무지개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표상이듯 그리스도인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표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변덕쟁이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습니다. 오직 신실함으로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른 무엇보다도 신실하시기 바랍니다. 신실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신실한 사람만이 성령의 사람입니다. 신실함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신실함을 잃지 마십시오.

 

출처 : 섬김과 나눔 그리고 쉼
글쓴이 : 새벽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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