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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역사의 정리노트<13> 근.현대 메이지유신

대한유성 2013. 1. 20. 05:02


 

 

제 4 부 근.현대

보신 전쟁의 와중에 출범한 메이지 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하기 위해 에도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여러 가지 제도를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메이지 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헌법의 제정과 조약개정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헌법을 제정하고 국회를 갖는 입헌국가가 되는 것이 조건이었고, 조약개정 교섭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민중과 정치가는 정당을 만들고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여 일본은 1889년에 아시아 최초의 입헌국가가 되었다.

또 국민은 메이지시대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이라는 두 번에 걸친 대외전쟁을 경험하였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삼을 발판을 만들었으며 메이지 말기에는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메이지 시대가 끝나고 다이쇼시대가 되자 본격적인 정당정치가 시작되고 대중도 정치에 참여하는 시대가 된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중국진출을 가능하게 하였지만, 대전 후에는 세계 각국이 협조외교를 행하는 국제 협조의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쇼와 시대가 되자 만주사변을 계기로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고, 정치에서는 정당을 대신하여 군부가 대두하여 중국의 동북부에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행위는 구미 세계에 인정받지 못하였고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패전국이 된 일본은 1951년까지 연합국측의 점령상태에 들어가 헌법을 비롯하여 전쟁 전과는 확연히 다른 민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후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하여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갔다.

제 1장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1867 10. 14 大政奉還(타이세이호오칸) : 幕府의 15대 將軍(쇼오군) 도꾸가와 요시노부

(德川慶喜)는 土佐藩(토사번 :시코쿠의 高知지방)의 板本龍馬(사카모토료오마 : 勝海舟에게서 배움)와 後藤象次郞(고또오 쇼오지로)는 요시노부에게 大政奉還 (타이세이호오칸)을 권고.

이에 따라 요시노부는 권력은 양보하되 쇼군인 도쿠가와 가계를 유지하는 조건 으로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 하였으나 토막파인 사이고다카모리 등의 반발이 심 하였음.

1867. 12.9 왕정복고 쿠데타 : 大政奉還에 대한 불만으로 討幕派인 사쓰마반과 쬬오슈우반 은 자신들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오오꾸보와 와 이와꾸라의 지도아래 쿠데타 결행. 요시노부(德川慶喜)를 배제한 신정부수립. 왕정복고의 선언. 섭관폐지(이와꾸라), 쇼오군 폐지(討幕派)

1869 보신(戊辰)전쟁(1868.1~1869.5)

신정부군(西鄕隆盛, 사쯔마, 쬬오슈우군)과 요시노부군(勝海舟 카쯔카이슈우)의 전쟁.

사이고다카모리와 카쯔카이슈우의 담판이 있었으나 에도의 파괴를 염려한 요시노부군 의 양보로 신정부군 승리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 도꾸가와 요시노부에 반대한 동부정벌군 참모(1868)

카쯔카이슈우(勝海舟) : 도꾸가와 요시노부의 참모. 온건파. 유신정부에 대해 복종을 주장.

明治維新 : 사쓰마와 쬬오슈우의 幕府타도파에 의해 세워진 신정부. 주도권 세력은 오오꾸 보 토시미찌(사쓰마), 키도 다카요시(쬬오슈우) 등의 막부타도파 출신.

이때 메이지천황은 16세 소년이었음.

明治維新의 三傑 : 사쓰마반의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토시미쯔(大久保利通),

죠슈우반의 키도다카요시(木 戶孝允)

유신관료 : 급진파-伊藤博文, 大隈重信(오오꾸마시게노부), 井上響(이노우에 카노루)-키도파

점진파 -大久保利通(오오꾸보 토시미쯔)-오오쿠보파

1869 도쿄 천도

1869 중앙정부-2관 6성제 신기관, 태정관, 대장성, 민부성, 병부성, 외부성, 궁내성, 형부성

版籍奉還- 토지와 인민의 반환. 에도시대의 지배체제를 바꾸기 위해 천황에게 각 번의 토지 인 영지(領地, 版) 및 인민을 의미하는 영민(領民, 籍)을 반환하는 것.

1870 神佛 분리정책 실시

1871. 7. 14 廢藩置縣의 명령이 키도파의 구상으로 내려짐. 위로부터의 쿠데타라고도 함.

長州藩의 水戶孝允, 蕯摩藩의 西鄕隆盛, 大久保利道의 결단으로 단행

참고

國縣對照表

옛날의 國名에서의 변화된 현재의 縣名

東北地方

靑森/岩手/宮城/福島縣 <=== 陸奧(무쯔, 1869년에는 陸奧, 陸前, 磐城, 岩代),

秋田/山形縣 <=== 出羽(데와, 1869년에는 羽後, 羽前)

關東北地方

茨城(이바라기)縣<=== 常陸(히타치), 下總(시모우사)일부,

千葉縣 <===下總일부, 上總(카쓰사), 安房(아와), o厲木(토치기)縣 <=== 下野(시모쯔케)

群馬縣 <===上野(고우쓰케), 東京都, 埼玉(사이다마)縣 <=== 武藏(무사시)

神奈川縣 <=== 武藏일부, 相模(사가미)

中部地方

新渴縣 <=== 越後(에치고), 佐渡(사도), 長野縣 <=== 信濃(시나노)

山梨縣 <=== 甲斐(가이), 靜岡縣 <=== 伊豆(이스), 駿河(쓰루가), 遠江(토오토우미)

愛知縣 <=== 三河(미카와), 尾張(오와리), 岐阜縣 <=== 美濃(미노), 飛단(히다)

富山縣 <=== 越中(엣쥬), 石川縣 <=== 能等, 加賀

福井縣 <=== 越前(에치젠), 若狹(와카사)

近畿地方

京都 <=== 山城(야마시로), 丹後(단고), 丹波(단바)일부

兵庫縣 <=== 丹波(단바)일부, 但馬(다지마), 潘磨(하리마), 淡路(아와지), 습津(셋쯔)

大阪府 <=== o撮津(셋쯔)일부, 和泉(이즈미), 河內(카와치), 奈良縣 <=== 大和(야마토)

和歌山縣<=== 紀伊, 三重縣<=== 伊勢, 志摩(시마), 伊賀(이가), 滋賀縣<=== 近江(오우미)

中國地方

岡山縣 <===備前(비젠), 美作(미마시카), 備中(빗쥬), 廣島縣 <===備後(빙고), 安藝(아키)

山口縣 <===周防(쓰오우), 長門(나가도),

島根縣<===隱岐(오키), 出雲(이즈모), 石見(이와미), 鳥取縣<===伯耆(호우키), 因幡(이나바)

四國地方

德島縣 <=== 阿波(아와), 香川(카가와)縣 <=== 讚岐(사누키)

愛媛(에히메)縣 <=== 伊o預(이요), 高知縣 <===土佐(토사)

九洲地方

福岡縣 <=== 筑前(치쿠젠), 筑後(치쿠고), 豊前일부,

大分(오이타)縣 <=== 豊前(부젠)일부, 豊後(붕고)

宮崎縣 <=== 日向(휴유가), 鹿兒島(가고시마)縣 <=== 大隅(오오스미), 蕯摩(사쓰마)

熊本縣 <=== 肥後, 佐賀縣 <=== 肥前일부, 長崎縣 <=== 壹岐, 對馬(쓰시마)

北海島는 蝦夷라고 불리웠다.

징병명령(병역의무), 地租개정(조세개혁), 학제시행-부국강병의 개혁

秩祿(찌쯔로쿠)處分

士族/華族에게 유신정부에서 지급하는 봉록인 家祿(주군이 가신에게 주는 봉록), 賞典祿(왕정복고와 보신전쟁의 공로자에게 주는 봉록)으로 廢藩置縣과 징병제에 따라 士族/華族의 독점적 직분이 없어지고 재정압박에 의해 1876년에 金祿공채를 발행하고 秩祿을 폐지한 것.

명치유신 후의 정치

중앙집권화---版籍奉還 -> 廢藩置縣

봉건체제 해체---사민평등과 새로운 신분제, 천민해방령

징병령, 질록처분->사족들의 불만고조

정부의 藩閥化 : 蕯長土肥 출신자의 우위

1871.11 岩倉사절단의 미국 및 유럽 방문

岩倉具視(이와쿠라도모미), 大久保利通(도시미쯔), 木戶孝允(키토타카요시), 伊藤博文

목적, 유신이후의 1. 우호관계유지 2. 조약개정, 3. 구미의 현황시찰

결과, 일본의 현재 상태로는 조약개정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구미각국의 정부, 사회, 문화와 접촉하여 산업발전의 중요성, 독자성, 전통의 중시, 국제관계의 현실을 체험하고 왔다. 이후 일본의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신이후 새 정부는 조선과의 국교지속을 요구 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했다.

井上馨(이노우에카오루) : 1872 대장성의 중심 인물(키도파)로 타이완 정벌론을 반대하여 좌절시킨 인물.

1872.4 승려의 肉食妻帶를 허용

1872 소학교를 의무교육으로 하는 학제 발표

1873. 1. 1(太陰曆, 메이지 5년 12월 3일)을 明治6年(1873.1.1)1.1로 하면서 太陽曆을 실시 했다.

1873 대원군 실각, 친일 민비정권

1873 征韓論에 의한 조선의 사절 파견문제로 유신정부 분열. 사이고는 강경파로 파견주장. 오오구보 정권 성립

정한론자인 西鄕隆盛(사이고다카모리)가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구미시찰에서 귀국한 오오구보와 키도, 이또오히로부미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 때문에 사이고는 하 야하여 고향에 돌아갔다.(征韓論 政變)

1874 조선에 대한 사절파견(정한론에 근본을 둔) 연기의 여파로 류우꾸우 조난민 살해사건 의 명목으로 타이완 침공. 청나라와 교섭 후 철군

1874. 9 강화도 사건 (雲揚號 운요오호사건) : 민비와의 외교교섭에 대해 조선측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파견.

1875.2.13(명치8년) 평민에게도 성을 갖도록 하는 법 공표->메이지노히(名字 日)

1875년 8월 : 수로측량의 이유로 강화도 근처에 침략. 포격전. 12월 구로다 불평등 조약을

강요.

일본은 조선에 군사행동을 하기 전에 일본에 있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각국의 공 사와 협조를 끝낸 상태였음.

1876 2.26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일본의 일방적인 불평등 조약

일본측 ; 쿠로다키요다카(黑田淸隆), 이노우에카오루(井上馨)

1. 조선은 부산 외에 두개의 항구(인천, 원산)를 개항할 것.

2. 개항지에서의 일본상인의 무역허용과 조계설치, 가옥건축 등의 편의를 제공할 것.

3. 개항지에서의 일본인의 범죄는 일본 영사가 재판권을 갖는 취외법권을 인정할 것.

4. 양국무역에는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것.- 관세면제특권

5. 일본화폐의 유입특권을 인정할 것.

1877 薩摩(카고시마 지역)의 西鄕隆盛의 반란-세이난(西南)전쟁. 사이고의 자결로 종전.

사이고는 명치정부가 자기의 조선침략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고향에 갔다가 봉건체 제를 그리워하는 사쓰마의 무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

이 때 같은 사쓰마반의 친구인 오오구보 토시미쯔는 신정부군(토벌군)의 대표로 전투 에 나섰다.

막부말기 이래의 동란의 시대는 서남전쟁으로 종식 됨.

이후 반정부운동은 언론에 호소하는 자유민권운동으로 옮아갔다.

일본의 전통적 종교체계는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神佛 절충체계

신도국교화 정책->불교배격운동->실패->신도가 불교에서 분리.

문명개화정책 계몽사상가 : 福澤諭吉(후꾸자와 유끼찌), 林有禮(모리아리노리),

西周(니시아마네)

대학의 설립

1875 同志社, 1877 토오쿄오제국대학 1879 쿄오또제국대학, 1882 早稻田, 1890 慶應義塾 (후꾸자와 유끼찌)

 

다음은 제2장 입헌국가를 향하여

 

             


출처 : 紫軒流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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