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폴레옹과 사과 ♡
프랑스 소년 사관학교 앞에 있는 사과가게에는 휴식 시간마다 사과를 사먹는 학생들로 늘 붐볐다. 그러나 그 많은 학생들과는 달리 돈이 없어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는 학생 하나가 있었다.
"학생, 이리와요. 사과 하나 줄 테니 와서 먹어요. "
가게의 여주인은 가난한 그 학생의 사정을 알고 만날때마다 불러서 이렇게 사과 하나씩을 주었다.
그 뒤 30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사과가게 여주인은 그 사이에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사과를 팔고 있었다.
어느 날 장교 한 사람이 그 사과가게를 찾아왔다.
"할머니, 사과 한개만 주세요."
장교는 사과를 맛있게 먹으면서 말했다.
"할머니, 이 사과 맛이 참 좋습니다. "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그 장교에게 앉으라고 의자를 권하였다.
"군인 양반, 자랑 같지만 지금의 황제이신 나폴레옹 황제께서도 소년사관학교 시절에 우리 가게에서 가끔 사과를 사서 그렇게 맛있게 드셨지요. 벌써 30년이란 지난 이야기지만……."
"내가 듣기로는 그 때 그 학생은 가난해서 늘 할머니께서 사과를 그냥 주셔서 얻어먹었다고 하던데요. "
이 말을 들은 할머니는 펄쩍 뛰면서
"아니오, 그건 군인 양반이 잘못들은 거예요. 그 때 그 학생은 받듯이 돈을 꼭 꼭 내고 사먹었지요. 한 번도 그냥 얻어먹은 일은 절대로 없었어요."
할머니는 나폴레옹 황제가 소년 시절에 겪은 어려웠던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싫은 듯 이렇게 극구 부인하였다.
그러자 장교는 다시 물었다.
"할머니는 지금도 황제의 소년시절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
할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저으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난했던 그 학생에게 동정을 베풀던 옛날의 추억을 더듬는 듯 했다.
그런데 이때 장교는 갑자기 먹든 사과를 의자에 놓고 일어나 할머니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 제가 바로 나폴레옹 황제입니다. "
"예? 당신이 나폴레옹 황제라고요?"
"예, 제가 바로 30년 전에 돈이 없어 사과를 사먹지 못할 때 할머니께서 가끔 저에게 사과를 주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입니다. 그 때의 사과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그 때 그 사과를 먹으면서 언젠가는 할머니의 은혜를 꼭 갚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두 손을 집힌 채 어찌할 줄을 모르는 할머니 눈에선 어느 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폴레옹 황제는 금돈이 가득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할머니 손에 쥐어 주면서 말했다.
"할머니, 이것은 저의 얼굴이 새겨진 금돈입니다. 이 돈을 쓰실 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할머니."
(김한종님이 보내주신 글)
나폴레옹 1세는 지중해의 코르시카 섬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순수한 코르시카인으로서, P. di 파올리(Paoli: 1726-1807)를 우상처럼 여겨, 프랑스를 조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분한 나날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오직 코르시카에 관한 생각밖에 없었으나, 92년 파올리의 좁은 민족 독립 사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해 반혁명군과 영국 함대가 점령한 툴롱항의 공방전에서 지휘관으로 눈부신 공을 세우고 일약 육군 소장이 되었다. 96년에 조세핀과 결혼하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어 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고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기 위하여 라인 강 왼쪽 연안을 장악하였다.
이 무렵부터 나폴레옹 몰락 때까지의 프랑스와 유럽 여러 나라의 전쟁을 '나폴레옹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차츰 침략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그는 행정 조직과 재정의 개혁, 종교 정책, 나폴레옹 법전편찬, 교육 제도의 재정비 등에 의하여 혁명의 후의 사회를 안정시켰고, 또 승전으로 이를 잘 지켰으므로 그의 정권은 소위 보나파르티즘의 형태를 갖추어 신흥 지주, 상공업 부르주아, 소농민의 지지를 받았다.
1802년 종신 통령에 임명되고, 1804년에 황제가 되어 제 1제정을 시작하였다. 그의 제정은 겉으로는 입헌제를 취했으나, 실제로는 국민의 정치 활동과 언론, 출판의 자유를 억누르는 독재 정치였다.
1805년, 프랑스는 트라팔가르해전에서 패하여 영국만은 정복하지 못하였으므로, 대영 정책으로서 그는 1806-07년에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그러나 여기에 복종하지 않은 포르투갈에 출병하였다가 패전하였고,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는 5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1813년, 정복당한 여러 나라가 해방 전쟁을 일으켜 이들과 싸웠으나, 프랑스군은 그 해 10월 라이프치히에서 패전하였다.
1814년에는 파리가 함락되었으며, 그는 엘바 섬에서 유형 당하였으나, 이듬해 파리에 돌아와 다시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 뒤 전제 제정을 자유주의화 하려던 꿈도 이루지 못한 때 같은 해 6월 워털루에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함으로써 백일 천하가 되었으며, 다시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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