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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주영 회장이 소 떼 501마리를 보낸 이유

대한유성 2006. 3. 21. 05:50
 

무모해서 강력했던 기업가,

거인 정주영의 세 가지 에피소드

 

 

하루 밥 세 끼를 해결하기도 어려웠던 지독한 빈농의 아들, 네 번의 가출과 세 번의 끌려옴을 반복하며 가난을 탈출해보려 안간힘을 쓰던 청년, 대한민국 1세대 기업가 중 유일무이한 자수성가 경영인, ‘밀어붙이기 식의 계산 없는 스타일’이라는 평가절하를 들어왔지만 ‘내게 시련은 있으되 실패는 없다’고 일갈하며 특유의 직관과 행동력으로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확장한 거인……

그는 바로, 올해 3월 21일로 추모 5주기를 맞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에 대한 많은 경영 사적과 뒷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긴 했지만, 여기서 잠깐 일반인들이 평소 알지 못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새삼 정주영 경영철학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에피소드 하나

 정주영을 지독한 실천주의자로 만든 계기는 무엇?

 


 

번째 가출을 감행한 열여덟 살의 정주영이 무작정 인천 부둣가로 찾아와 힘겨운 하역 노가다를 뛰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피곤한 하역 작업만큼이나 정주영을 괴롭히던 일이 있었으니,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빈대였다. 그곳의 노동자 합숙소는 온통 빈대천지였는데, 몸이 솜처럼 피곤한데도 밤이면 빈대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주영은 어느 날 꾀를 냈다. 이불을 깔고 바닥에서 자면 빈대에 뜯기기 좋기 때문에, 모양새가 좀 웃기긴 하지만 밥상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잔 것이다. 예상대로 역시 빈대가 물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빈대는 밥상 다리를 타고 기어 올라와 예의 정주영 살점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미물이지만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다.

정주영은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네 그릇에 하나씩 담가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 다리를 타려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익사하도록 하려는 묘안이었다. 역시 빈대는 밥상 다리를 타고 오르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빠져 죽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마리뿐…….

빈대들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냈다. 사람의 피를 빨기 위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누워있는 사람을 목표로 천장에서 정확히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정주영은 번개같이 깨달았다.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제 뜻을 이루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정주영이 빈대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정주영의 이러한 빈대로부터의 교훈은 그 후 그의 사업에서 난관이 있을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보여주고 수천만 불의 조선소 융자를 얻어냈다든지, 한겨울 눈이 덮인 골프장에서 빨간 칠을 한 골프공으로 골프를 쳤다든지, 겨울에 잔디를 구할 수 없자 보리를 떠다 심어 공사를 마쳤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에피소드 둘

그를 '단순함과 무모함'을 무기로 성공한 기업가라고 하는데?

 

 

조선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한 정주영은,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야 하는 사업이므로 영국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로 결심한다. 막상 런던에 도착한 정주영은 영국 버클레이 은행에 곧바로 가지 않고, 대신 같이 동행했던 직원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봐, 영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교가 어디야?”

“제가 알기에는 옥스퍼드 대학입니다만…….”

“옥스퍼드 대학! 그렇지, 그리로 가자.”

직원은 왜 정주영이 은행으로 곧장 가서 차관문제를 협의하지 않고 옥스퍼드 대학으로 가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옥스퍼드 대학 교정에 도착한 정주영은 아무 말 없이 캠퍼스의 잔디밭을 10여 분 걸었다. 그리고 나더니 “이제 됐다. 가자” 하고는 대학 캠퍼스를 떠나 그 길로 버클레이 은행장을 찾아갔다.

정주영은 버클레이 은행장에게 차관교섭 차, 즉 돈을 빌려달라고 간청했다. 은행장은 난데없이 찾아온 한국의 기업가가 차관을 해달라고 하자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정주영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스스로 경제학 박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은행장이 물었다.

“어느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으셨습니까?”

“아, 내가 방금 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버클레이 은행장의 눈이 똥그래졌다. 옆에 있던 현대 직원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은 방금 전에 옥스퍼드 대학 교정에서 자기와 함께 10분 정도 잔디밭을 걸었을 뿐인데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계신 건가.

“사장님. 언제 박사학위 받으셨어요?”

어이가 없었던 직원은 통역하기 전에 정주영의 저의를 알고 싶어 귓속말로 물었다.

“임마. 아까 받았다고 그래!”

직원은 하는 수 없이 정주영이 시키는 대로 통역했다. 그러자 버클레이 은행장이 어떤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느냐고 묻자, 정주영은 잠시의 뜸도 두지 않고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아, 그거요? 내가 조선소 건립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더니, 단 두 시간 만에 박사학위를 줍디다.”

이후의 순서는 너무나도 유명한 일화인,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어 대한민국 조선사업의 역사를 과감히 설명했고, 그는 결국 차관도입에 성공한다. 때로는 뜬금없고, 어찌 보면 무모하기까지 한 그의 사업 열정이 그대로 보이는 일화이다.

 

에피소드 셋

북한 교류의 출발, 왜 하필 '소 떼'를 몰고 갔나?

 

 

어느 날 정주영은 사장단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얘기했다.

“나, 소 떼 몰고서 평양에 가려고 한다.”

사장단들은 모두 의아한 눈길로 정주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장단들은 왜 정주영이 하필 소 떼를 몰고 북한에 가려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세 번째 가출을 했을 때, 한동안 밥이라도 굶지 않으려면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아버지가 누이를 시집보내기 위해 소를 판 돈을 장롱 속에 넣어둔 것을 알고, 그 돈을 몰래 훔쳐서 집을 나왔던 것이다. 정주영의 소 한 마리 값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 두고두고 아버지에 대한 불효로 남아있었다. 정주영이 자기 고향인 이북 땅에 소 떼를 몰고 방북을 하려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효를 오백 배, 천 배 갚고 싶어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소를 몇 마리나 갖고 갈까? 한 500마리 할까? 아냐, 500마리가 뭐야! 이왕 하려면 501마리로 해야지.”

결국 최종결론은 501마리였다. 밑에 사장단들이 물었다.

“500이면 500이지 왜 501마리입니까?”

그러자 정주영은 대답했다.

“한 마리를 더 보탠 것은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더욱 이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야. 여운을 주는 게 멋지지 않겠어?”

그는 1998년 10월 27일, 서산농장에서 키운 5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었다.

 

* 위의 내용은 <정주영 경영정신> (홍하상 지음, 바다출판사)에서 일부 발췌하였음

출처 : 단순해서 아름답다! 무모해서 강력하다!
글쓴이 : bad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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