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6 군사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좌)와 박태준(우).
둘은 쿠데타 동지였으며 이후 박정희가 피살될 떄까지 신뢰 관계를
유지한다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을 최단기간 내에 중진 공업국으로 급부상 시킨 주역들. 세계 공업화 역사상 유래 없는 초고속 공업화에 성공하는데
밑거름이 된 것은 박정희와 박태준이 건립한 포항 제철이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육사 선후배 사이. 박태준은 육사 시절 탄도학을 가르치던 박정희를 만나 인연을 맺음.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
당시 박태준은 박정희로부터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가족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둘은 끈끈한 보스-참모 관계였음. 쿠데타 성공 후
박태준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심복"이 돼 국가 경제 건설에 나선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공업단지를 시찰한 후 공업화의 근간이 될 제철소를 구상, 이 프로젝트를 박태준에게 맡긴다. 철은
공업화를 위한 초석이었다. 농기계를 만들려 해도, 철길을 깔려 해도, 공장을 건설하려 해도, 철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자국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으면 한국은 헐벗고 굶주린 농업 후진국의 단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엔 제철소를 건립할만한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처음엔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로 구성된 국제 제철 차관단(KIST: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으나, 이후 "애매한 약속"으로만 일관, 끝내 차관
제공을 거부한다.
KIST는 처음부터 굴욕적인 협상을 강요했다. KIST는 다른 개발도상국에 먼저 세워진 제철소를
시찰해야 하고, 기술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 받아야 한다는 등 식민주의식 기술 이전을 주장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을 잔뜩 내걸고 돈을 빌려 줄 것처럼 얘기를 하다가 IBRD로부터 한국 제철소가 경제성이 없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받자 지원을 전면
철회했다. 그때까지 KIST의 약조만 믿고 포항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사원 주택단지까지 지었던 박태준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박정희가
박태준 앞에서 "이거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는 푸념을 던질 정도로 상황은 암담했다.
다급해진 박정희와 박태준.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이제 일본 뿐이었다. 박태준은 박정희가 김종필을 앞세워 끌어온 "대일 청구권" 자금,
즉 식민지 지배 보상비를 제철소 건립에 사용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기술을 얻기 위해 일본의 철강 회사 경영진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설득, 결국엔 기술 협력 약조까지 받아낸다.
박태준은 자본의 출처 때문에 제철 사업 성공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그는 제철소를 "(일제에 희생당한) 선조들 피의 대가"라며 무서운
집념으로 사업을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는 제철소 건립 개시 당시 직원 모두를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우리 조상의 형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공장 건립을 위한 시멘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동원 가능한 레미콘 차량을 모두 끌어 모았고, 추석 휴가를 모두 반납했으며, 직원들과 함께
24만개의 볼트를 일일이 점검하고 다니기도 했다. 실수를 하거나 정신 상태가 풀어진 직원들에게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직원들에게 "민족 반역자"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박태준은 머리 속은 "선조들의 피"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득했다.
이런 박태준에게 박정희는 든든한 지원을 해 주었다. 포항 제철은 초기부터 정치계로부터 온갖 인사 청탁과 납품 로비에 시달렸다. 이런 애로
사항을 접한 박정희는 직접 "종이 마패"를 만들어 박태준의 사업에 일체의 정치 사회적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권 위임 약조를 해 주었다.
박정희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공사 현장을 방문해 직원들을 독려했다.
박정희의 절대적 지지 아래 박태준 특유의 치밀한 "군대식" 경영은 효과를 발휘했다. 제철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어졌으면서도 부실이란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1969년 착공에 들어간 뒤 약 3년 반 만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에서 첫번째 쇳물이 터져 나왔고, 이후 포항
제철은 기적 같은 성장을 거듭한다.
포항제철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을 때.
바로 이 순간이 대한민국이 농업 후진국에서 중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이었다.
조업 시작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며(당시 정부와 해외 관계자들은 모두 3년 간은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1980년대 철강 생산량은 1200만 톤을 넘어선다. (1968년 IBRD가 한국 대신 제철소 융자를 주었던 브라질은 당시 겨우
철강 생산량이 400만 톤에 불과했다.)
이후 정권이 수 차례 바뀐 뒤에도 포항제철은 기적적인 성장을 거듭,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로 우뚝 선다. (1998년 기준 세계
조강생산량 1위) 포항제철의 성공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철강 생산량 5위, 조선 1위, 자동차 5위의 산업 대국으로 부상하기 위한 밑거름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