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피 말리는 반도체전쟁, 文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 이유
천광암 논설실장 입력 2021-05-10 03:00수정 2021-05-10 03:04
삼성, TSMC 상대 버거운 추격전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고 ‘안보의 칼’
공장 지어 가동에 6년… 美中은 2년
이대론 한국경제 찌르는 비수 될 수도
천광암 논설실장
인간의 머리카락은 1초에 약 3∼4나노미터씩 자란다고 한다. 현재 최첨단 반도체는 5나노 공정으로 제조한다. 머리카락이 1초 동안 자라는 길이 정도의 굵기를 가진 얇은 펜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위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다. 반도체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온 인텔조차도 5나노는 고사하고 7나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만이 이 극한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을 확보했다.
최근 대만 타이난시 외곽에서는 TSMC의 3나노 생산라인 내부 공사가 한창이다. 반도체는 기술력 싸움인 동시에 돈의 전쟁이다. 나노 숫자가 내려갈수록 들어가는 돈은 급격히 늘어난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축구장 22개 크기인 이 공장은 전 세계 건축물을 통틀어 세 번째로 비싸다. 모두 22조 원이 투자됐다. TSMC는 이 밖에도 천문학적인 투자 계획을 줄줄이 내놓고 있다. 올해부터 3년간 투자하기로 한 금액만 148조 원에 이른다.
TSMC가 이처럼 투자 계획을 공격적으로 쏟아내는 것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삼성의 추격을 확실히 뿌리치기 위해서다. 삼성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33조 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파운드리 분야 세계 1위에 올라서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삼성이 만년 2위의 자리를 박차고 부동의 1위인 TSMC를 상대로 본격적인 추격을 다짐한 순간이었다.
삼성은 명운을 건 승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첫째, 기술력. 삼성은 5나노는 물론 3나노 이하 미세공정에서 TSMC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적수다. “미국 중국은 우리 상대가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도 “삼성은 강력한 경쟁자”라고 평가한다. 둘째, 자금력은 파운드리만 놓고 보면, 삼성이 열세다. TSMC가 ‘3년간 148조 원 투자’ 카드를 꺼낸 것은 삼성의 ‘10년간 133조 원 투자’ 청사진에 대한 기죽이기이자 몸집 과시라고 봐야 한다. 셋째, 마케팅도 삼성이 불리하다. TSMC는 파운드리만 한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것이 모토다. 반면 삼성은 스마트폰에서는 애플과, 시스템반도체에서는 인텔과 경쟁하는 처지다. 이들의 경계심을 뚫고 이들로부터 물량을 따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용 고성능 반도체의 오랜 고객이었던 애플이 특허분쟁을 전후해 삼성과 결별하고 TSMC와 손을 잡은 것이 냉엄한 현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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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파상적인 물량전과 속도전을 벌이고 있는 TSMC에 맞서 투자와 기술 개발, 마케팅을 지휘해야 할 사령탑인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가 삼성으로선 뼈아픈 대목이다. 파운드리에 133조 원을 쏟아붓고도 패한다면 아무리 삼성이라고 해도 그 충격파를 감당하기 어렵다. 비단 삼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전자가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은 25%, 삼성 제품을 포함한 반도체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가깝다. 반도체 전쟁에서 삼성의 승패는 한국 경제의 흥망과 직결되는 문제다.
그런데도 지난 몇 년간 정부는 반도체 산업 전반에 걸쳐 무(無)전략으로 일관해 왔다. 흔한 연구개발 지원도 하지 않았고 심각한 인력난도 방치했다. 정부 문서에 ‘2017∼2018년 반도체 분야의 정부 신규 사업이 전무하다’는 표현이 들어 있을 정도다. 각종 규제입법으로 발목을 잡는 일도 많았다. 삼성의 미국 공장이나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사례를 보면 부지 계약에서 가동까지 2년이 안 걸린다. 반면 한국에서는 각종 규제와 ‘떼법’, 민원에 붙들려 6년을 넘기기 예사다. 삼성전자 평택공장은 송전선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5년이 걸렸다. 정부와 여당은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자동차 공장이 멈춰 서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웨이퍼를 들고나와 흔든 이후에야 “K반도체 벨트 전략을 만든다”, “반도체 특위를 만든다”며 뒤늦은 부산을 떨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이 격해지면서 반도체는 산업의 쌀인 동시에 안보의 칼이 됐다. 한일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이 한국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기 위해 골랐던 ‘비수’가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였다. 현재 전 세계적 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으려면 당정과 경제·외교안보·교육 관련 전 부처가 총력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문 대통령뿐이다. 1나노를 다투는 반도체 산업에서 1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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