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불확실의 시대, 신탁의 승부수는 ‘유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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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1.02.26 09:27 수정2021.02.26 10:08
신탁의 최대 강점은 단연 ‘유연함’이 아닐까. 불확실성의 시대, ‘팔색조 사회 안전망’으로 부상하고 있는 신탁의 현주소를 소개한다.
#1 서울에서 제조업을 하고 있는 57세 A씨는 요즘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안 나거나 자주 깜박해 할 일을 놓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건강이라면 늘 자신이 있었는데 이러다 갑자기 치매에 걸릴까 걱정”이라며 “적금과 건강보험, 사망보험 외에도 치매 관련 상품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2 미국의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헴슬리는 2007년 반려견 ‘트러블’에게 1200만 달러(약 132억 원)의 유산을 남겼다. 단, 유언장 작성 당시 헴슬리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며 트러블의 상속금은 200만 달러(약 22억 원)로 감액됐지만, 트러블은 2010년까지 매해 10만 달러(약 1억1000만 원)를 쓰며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다 세상을 떠났다.
고령화·저금리 시대 자산관리 수요가 확대되면서 신탁이 21세기 ‘종합자산관리의 구원투수’로 떠오르고 있다. 자산관리 외에도 상속·증여, 노후 관리 등 계약에 따라 무한대로 변신이 가능한 신탁은 100세 시대에 유용한 안전망으로 지목돼왔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가 진행된 일본은 이미 신탁에 의한 생전 노후 관리가 보편화돼 있다.
일본은 2000년부터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됐고, 2012년에는 후견제도지원신탁 상품들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가령, 치매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사기를 당하거나 금융 피해를 입는 상황을 막기 위해 ‘시큐리티형 신탁’, 이미 치매에 걸려 의사결정이 어려운 경우를 위한 ‘후견제도지원신탁’, 원활한 상속을 위한 ‘유언대용신탁’·‘자산승계신탁’·‘자사주승계신탁’ 등 종류도 다양하다. 2019년 3월 기준 일본 후견제도지원신탁의 수탁 건수는 2만1397건, 수탁 잔고는 6474억 엔으로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국내 금융권 역시 안전한 노후 관리를 위한 신탁 상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나은행은 2019년 12월 금융권 최초로 특허출원을 완료한 하나금융그룹 협업 상품 ‘하나 케어신탁’을 출시했다. ‘하나 케어신탁’은 고령화 시대 치매 등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자산관리가 힘들어질 때를 대비해 안전하게 금융자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특화된 대중형 유언대용신탁 상품이다. 건강할 때 지급 절차를 미리 지정했다가 치매 등으로 의사 판단 및 거동이 힘든 상황이 발생하면 사전에 정한 절차에 따라 병원비, 요양비, 간병비 등을 효율적으로 지급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신한은행도 2019년 11월 환자가 직접 병원비를 출금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지정한 대리인이 병원비를 출금할 수 있게 한 ‘신한 메디케어 출금 신탁’을 내놨다.
신한은행 측은 이 상품에 대해 대리인이 병원비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출금할 수 없고 가입자인 환자를 대신해 병원비를 결제하기 때문에 가입자는 안심하고 치료에 매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상품은 즉시 현금으로 출금이 가능한 고(高)유동성 자산으로 운용해 일반 입출금통장보다 수익률이 더 높기도 하다. KB국민은행은 치매를 대비하기 위해 성년후견제도에 대한 법률 상담을 제공하는 ‘치매안심상담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으며, 치매 발병 시 후견인에게 정기자금을 지급하는 ‘성년후견제도 지원신탁’을 판매하고 있다.
은행권 관계자는 “과거 신탁은 부자들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점점 치매 케어나 미성년 자녀들을 위한 후견신탁, 상조신탁 등 생활 금융으로서 역할이 크다”며 “동시에 최근 상조신탁에다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여행을 결합한 신탁도 고객들로부터 호응이 높다. 젊은 고객들에게도 적극 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펫신탁·사전증여신탁 등 상품화 노후신탁 외에도 신탁의 활용은 광범위하다. 신탁을 통해 현시대의 다양한 모습들이 투영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펫신탁(PET信託)이다.
농림축산식품부 통계에 따르면 2019년 국내 반려동물 양육가구는 591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6.4%에 달한다. 네 집 중 한 집은 반려동물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관련 시장 규모도 2015년 1조8000억 원에서 지난해 5조8000억 원으로 3배가량 늘어나는 등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아끼는 ‘펫팸(pet+family)족’이 늘면서 관련 산업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주인이 급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반려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펫트러스트(pet trust)’ 형태의 상속 시스템에 대한 요구도 높아지는 양상이다. 실제로 펫팸 문화가 뿌리 깊은 미국의 경우, 명예신탁의 형태로 사망한 주인을 대신해 신탁 회사가 남겨진 반려동물을 보호하고 있다. 명예신탁이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에게 이익을 주려는 의도로 설정된 것으로 비공익적 목적을 가진 신탁이다. 대표적인 예가 동물을 위한 명예신탁으로 이는 특정 애완동물의 보호 및 이익을 위한 신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남겨진 동물을 보호하는 명목상 명예신탁을 할 경우에도 이를 허용하는 실정법을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6년부터 반려동물을 위한 신탁 상품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주로 신탁 가입 고객이 죽거나 병환 등으로 반려동물을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될 때를 대비해 은행에 반려동물의 양육자금을 맡기는 상품이다. 은행은 새로운 부양자에게 반려동물 보호 및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지급한다. KB국민은행의 ‘KB 펫코노미 신탁’과 하나은행의 ‘PET사랑신탁’이 대표적이다. 국내 금융권 최초로 2016년 출시된 KB 펫코노미 신탁은 주인이 사망한 후 반려동물이 새 주인을 만났을 때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PET사랑신탁’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손님(위탁자)이 생전에 미리 하나은행(수탁자)과의 신탁계약을 통해 본인 유고 시 반려동물을 돌봐줄 귀속권리자(사후수익자)를 정한다.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을 남길 수 있는 가족배려신탁 상품 중 하나다. 무엇보다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은 남은 가족들 간 재산 다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영국 등 외국에서는 상속과 관련해 유언장을 대신해 신탁을 한 방편으로 널리 이용하고 있다. 신탁은 재산 보호라는 목적 외에 재산의 관리와 증식, 재산 승계 방법의 활용, 절세효과 등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또한 생전에 재산을 자손들에게 이전하면서 자손들이 함부로 재산을 처분하거나 유용하지 못하게 할 목적으로도 쓰인다. 신탁계약은 위탁자의 자유의사대로 그 계약 내용을 매우 유연하게 정할 수가 있고 계약 내용을 변경하거나 취소할 수 있다.
특히 신탁을 할 경우 도산격리(insolvency protection)가 가능한데, 이는 위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고 수탁자의 파산재단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국내 은행들은 자산관리, 생활, 상속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종합 솔루션 상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초고령사회의 진입, 저출산, 1인 가구 증가의 사회 변화에 맞춰 출시한 ‘KB내생애(愛)신탁’을 판매 중이다. 이 상품은 평소에는 투자를 통한 자산 운용이 가능하고, 건강 악화 시에는 의료비나 생활비를 안정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다. 사후에는 상속이나 기부 등 자산의 처리에 대한 설계까지 가능하다. 하나은행의 ‘사전증여신탁’도 손·자녀에 대한 합법적인 증여를 지원함과 동시에 절세와 투자수익을 돕는다. 이처럼 급변하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형식의 구애 없이 맞춤형 계약이 가능한 신탁 시장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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