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자산 승계의 묘수, 유언대용신탁이 뜬다
https://magazine.hankyung.com/money/article/202102261646cURL 복사
입력2021.02.26 09:40 수정2021.02.26 10:08
[한경 머니 기고= 김용택 법무법인(유) 화우 변호사] 신탁의 가장 큰 기능 중 하나는 유언대용신탁이다. 무엇보다 나날이 상속과 관련한 가족 분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신탁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신탁의 순기능을 거론할 때 우선순위로 언급되는 인물은 피뢰침을 발명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다. 미국 100달러의 주인공인 그는 생전에 유언으로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를 위해 2개의 공익신탁을 설정하고, 각각 1000달러를 넣기로 했다. 구체적인 신탁 내용은 이랬다. 우선 프랭클린 사후 100년 동안 각 신탁재산을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시민들에게 일정 이율로 빌려주는 대부 사업을 하고, 100년이 되는 시점에 각 신탁재산 중 10만 달러를 공공 사업에 사용하며, 남은 금액을 다시 100년 동안 축적한 뒤 각각 보스턴시와 필라델피아시에 귀속시킨다는 것이었다.
1790년 프랭클린이 사망한 후, 실제로 보스턴 신탁과 필라델피아 신탁은 프랭클린이 설정한 내용대로 운용됐다. 100년 후 각 신탁재산 중 일부가 과학박물관 등의 설립에 사용됐고, 200년 후인 1990년 무렵에는 필라델피아 신탁의 재산이 약 200만 달러가 돼 지역 내 고등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됐다. 보스턴 신탁의 경우 약 500만 달러로 보스턴시는 이 재산을 벤저민프랭클린공과대(Benjamin Franklin Institute of Technology)에 기부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민법상 사망을 계기로 한 전통적인 자산 승계 제도로는 상속과 유증(유언)이 대표적이고, 사인증여도 있다.
민법상 상속인과 상속분은 법으로 정해져 있고, 상속인들 간 승계 비율만 정하는 것이다. 피상속인 사후에 별도로 상속재산 분할 절차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남은 가족들 간 분쟁의 소지가 다분하다. 표면적으로는 유증이나 사인증여를 통해 법정상속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는 변경할 수 있으나, 이러한 제도들 역시 승계될 재산의 범위를 설정하고 이를 일시에 종국적으로 이전하는 것에 한정되므로, 여전히 경직성은 해소되지 않는다. 평생 일군 재산을 피상속인 사후에 어떻게 관리할지 계획하기 어렵고 그 이행 여부를 감독하기도 어려우며, 오히려 남은 가족들 사이에서 재산 분쟁만 키우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새로운 자산 승계 제도, 신탁의 활용은 신탁이란 위탁자가 재산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수탁자에게 재산 관리에 관한 일을 맡기고 그 이익을 수익자로 지정된 자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신탁제도가 자산 승계 수단으로 기능할 때 설계상의 유연성, 자산의 사후 설계·관리 기능, 상속인 중 제한능력자의 보호 기능, 신탁재산의 독립성으로 인한 강제집행 방지 기능 등이 있어 그 효용성이 매우 크다. 그러나 본래 신탁이 영미법계에서 출발해 우리에게 낯선 측면이 있고, 보통 신탁이 설정된 경우 법률관계가 복잡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신탁 업무를 처리해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그동안 부동산신탁이나 투자신탁 등 일부 상사신탁을 제외하고는 신탁이 자산 승계 수단으로서는 잘 활용되지 않았다. 이후 2011년 전면 개정된 ‘신탁법’에서 다른 선진국들의 입법례를 참고해 유언대용신탁, 수익자연속신탁 등 자산 승계를 위한 수단으로서 의미가 큰 제도들을 도입했다. 유언대용신탁은 위탁자가 사망 전에 미리 설정하는 신탁으로, 위탁자가 사망한 이후 수익자가 수익권을 취득하거나 신탁재산에 기한 급부를 받는 것이다. ‘유언대용’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유언이 아닌 신탁 행위를 통해 유언으로 재산을 처분하는 것과 유사한 법적 효과를 얻는 것이다. 유언이 아니므로 민법상 매우 엄격한 절차로 정해진 유언 방식을 갖출 필요가 없다.
심지어 수익자는 신탁을 설정할 당시 확정될 수 있으면 족하고, 반드시 특정돼 있을 필요가 없으며 현존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장래 태어날 자녀 등을 수익자로 하는 신탁도 설정할 수 있다. 이를 전제로 ‘신탁법’은 위탁자가 직접 수익자를 정하는 대신 수익자를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자를 정하는 것도 허용하고 있다. 설정 방식으로는 위탁자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만으로 위탁자 자신이 수탁자가 돼 신탁을 운용하기로 하는 신탁 선언도 있으나,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계약 체결 방식(신탁계약)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 계약자유원칙상 위탁자는 생전에 미리 수탁자와의 계약으로 신탁재산에 관한 사후 관리, 처분 계획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수익자로 지정된 자가 위탁자의 뜻에 반하는 배신 행위를 했을 때 수익권을 박탈하는 등 수익권 행사 등에 일정한 조건을 붙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갑은 빌딩을 소유하고 있고 배우자 을과 자녀 2명이 있다고 가정하자. 갑이 사망하면 배우자와 자녀들이 빌딩에 관한 지분을 상속받게 될 텐데 빌딩 임대료 배분을 둘러싼 분쟁 등으로 상속인들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자녀들 중 일부가 지분을 타인에게 매각해버리면 상속재산의 관리가 복잡해지는 문제가 있다.
또한 자녀들이 상속받은 재산을 단기간 내에 탕진하거나 고령의 모친 을에 대한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을 염려도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갑은 유언대용신탁을 설정해 신탁 회사가 빌딩을 상당한 기간 동안 보유하면서 전문적으로 관리하도록 하고, 수익자로 지정된 자녀들은 신탁재산으로부터 수익금(임대료 등)을 취득하도록 하되, 배우자 을의 사망 전까지는 자녀들이 수익금 중 일부를 모친을 부양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그 수익권을 박탈하도록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유언대용신탁의 특수한 모습으로 수익자연속신탁이 있다. 이는 수익자가 사망한 경우 그 수익자가 갖는 수익권이 소멸하고 타인이 새로 수익권을 취득하도록 하는 것으로, 여러 수익자들이 순차적으로 수익권을 취득하도록 할 수도 있다. 가령, 사업가 김 씨는 빌딩 A·B를 소유하고 있고, 배우자 이 씨 사이에서 두 아들 병, 정이 있다. 김 씨는 이미 장남 병에게 거액의 사업자금을 증여한 바 있어 사망 후에는 일단 장남을 제외하고, 빌딩 A는 배우자 이 씨에게, 빌딩 B는 차남 정에게 주되, 모두 일정 기간 처분하지 않고 그 수익금으로 생활하도록 하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김 씨는 유언대용신탁, 수익자연속신탁을 활용해 빌딩 A·B를 상당한 기간 동안 신탁 회사에 신탁해 전문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면서 빌딩 A는 이 씨를, 빌딩 B는 차남 정을 각 수익자로 지정해 각각 신탁재산으로부터 수익금을 지급받도록 하고, 추가로 빌딩 A에 대해서는 배우자 이 씨가 사망한 후 2차 수익자를 두 아들로 지정하는 신탁을 설정할 수 있다.
이처럼 유언대용신탁은 일회적·종국적인 자산 승계 수단인 상속과 유증을 대체할 수 있는 제도로서 상속 분쟁을 예방하고, 평생 일군 재산의 효율적인 관리 및 위탁자의 뜻에 따른 자산 승계를 가능하게 한다. 한편, ‘신탁법’상 신탁의 존속 기간에는 별다른 제한이 없는 상황이다. 이론적으로는 신탁 기간을 장기로 정해 사실상 무기한의 신탁도 설정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영미법상의 ‘영구구속금지의 원칙(Rule Against Perpetuities)’ 등을 고려해 유언대용신탁의 존속 기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2011년 ‘신탁법’ 개정 당시 유언대용신탁에 대해서도 일반 신탁과 마찬가지로 존속 기간의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입법이 이루어졌다. 프랭클린의 사례는 2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후의 재산 관리를 정한 일종의 유언대용신탁으로, 그 옛날 이처럼 고차원적인 신탁을 고안한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 외 세금 문제도 어느 정도 제도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동안 유언대용신탁에 대해 상속세와 증여세 중 어느 것을 과세해야 하는지 논란이 있었는데, 최근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2021년부터는 상속의 범위에 유언대용신탁과 수익자연속신탁이 추가돼 이에 대해서는 상속세를 과세하도록 명문화했다. 남은 문제, 유류분과의 충돌 가능성 유언대용신탁과 관련해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유류분과의 충돌 가능성이다. 위탁자가 유언대용신탁으로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에 관해 신탁을 설정해 신탁재산을 수탁자에게 이전한 후 위탁자 사망으로 신탁이익이 수익자에게 귀속되는 과정에서 민법상 위탁자의 법정상속인들에게 보장되고 있는 유류분이 침해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유류분이란 상속인을 위해 법이 인정한 최소한의 상속분으로, 피상속인(망인)의 배우자와 직계비속의 경우 각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의 비율을 유류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피상속인이 생전에 특정인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등으로 인해 다른 상속인의 유류분 권리가 침해된 경우, 그 다른 상속인은 증여받은 자를 상대로 최소한 자신의 유류분만큼은 반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 유류분 산정의 기초가 되는 재산액은 △피상속인의 사망 당시의 적극적 상속재산액에 △사망 전 1년 이내에 행한 증여액(당사자 쌍방이 유류분 권리자에 손해를 가할 것을 알고 증여를 한 때에는 사망하기 1년 전에 증여한 것도 포함)을 가산하고, △상속채무액을 차감해서 산정한다. 유류분과 관련해 근래 유언대용신탁에 맡긴 신탁재산은 유류분 반환의 대상이 아니라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있었다. A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었고 생전에 B은행과 유언대용신탁 계약을 체결하고 부동산 등을 신탁했다.
이 신탁의 수익자로 지정된 둘째 딸 C는 A가 사망하자 수탁자인 B은행으로부터 신탁재산을 이전받았다. 이에 A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던 아들 D의 상속인들은 D의 대습상속인의 자격으로 C를 상대로 유류분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D측의 청구를 기각했다. 그 이유는 우선, △A의 사망 당시 신탁재산의 소유권은 수탁자인 B은행에 이전돼 있었으므로 신탁재산은 A의 적극적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고, △신탁계약 체결에 따른 신탁재산의 이전은 상속 개시 시점보다 1년 전에 이뤄졌으며, 수탁자가 신탁계약으로 유류분 침해가 발생하리라는 점을 알았다고 볼 증거가 없어 신탁재산은 유류분 산정에 산입될 증여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례를 통해 사망하기 1년 전에 미리 유언대용신탁을 설정하고 재산을 이전할 경우 유류분반환청구를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러한 해석을 반대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향후 제도 운용의 변화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으나, 현재까지는 유언의 자유를 침해하는 측면이 있었던 유류분 제도를 피해 피상속인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상속’의 물꼬가 트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아직 그 활용도가 높지 않은 상황이지만 잘만 이용한다면 평생 모은 재산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후대에 승계하고 남은 가족 간 분쟁도 예방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다. 근래 여러 은행들과 일부 신탁 회사들이 유언대용신탁 관련 상품을 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에 따라 향후 유언대용신탁 제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수준이 높아지면, 상속이나 유증을 대체하는 효율적인 자산 승계 제도로서 그 활용도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영컨설팅'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1년 상속·증여 시 유의할 개정 세법은 (0) | 2021.02.27 |
---|---|
[big story]불확실의 시대, 신탁의 승부수는 ‘유연함’ (0) | 2021.02.27 |
[big story]노후 부동산 관리·처분, 신탁으로 끝낸다 (0) | 2021.02.27 |
6만개 中企, 기업당 최대 400만원 비대면 근무환경 구축 지원 (0) | 2021.02.15 |
[Q&A]'소상공인 버팀목자금' 첫날 1.4조 지급… 문자 못 받았다면? (0) | 2021.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