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스킬/기타 낙서장

[스크랩] 신경림 한국명시 100선 (41-70)

대한유성 2019. 1. 4. 11:33


41. 휴전선 / 박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 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42. 무우 / 박성룡

 

열 걸음 바깥은
물 묻은 풍경들……
열 걸음의 그 앞은
뿌우연히 피어오르는 무지개 가루뿐……
거리도, 나무들도, 창도, 벽도
잡으면 꺼질 듯한 물거품의 안팎들……
우비를 대신하는
파라솔의 홍수 저편
거긴 또 모든 것이 분해되어 허물어지는
포말의 가루…… 포말의 가루 ……


43. 저녁눈 /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44.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45. 내 노동으로 / 신동문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그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46. 문의 마을에 가서 /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47. 답십리 하나 / 민영

 

하나

땅거미 지면

거나해서 돌아온다.

양 어깨 축 늘어진

빨래가 되어.

새벽에 지고 나선

청석(靑石)의 소금 짐은

발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구나!

촬영소 고개 너머

십리(十里)의 불빛.

중랑천 둑방에는

낄룩새 운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아주까리 마을.

오리 치는 초막(草幕)에는

사당이 산다.

머리가 반백인 늙은 사당,

전축 소리만 들려 와도

어깨춤 춘다.

김세나 낙양성 십리허(洛陽城十里許)

에도 덩실거리고,

심청가 자진모리에도

고개 떨군다.

어디로 간들

숨통이 트이랴.

여뀌풀 흐드러진 하빈(河濱)

()를 돌린다.

저자의 왁자지껄

들 앞에서 멈추고,

거무튀튀한 쓰거운 물이

창자를 훑는다.

내 생애의 만 리의 구름,

짓씹는 어금니의 허전한 새벽.

예서 살으리

발굽 닳을 때까지!

 
48. 진달래 산천 / 신동엽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 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에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49.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50. 정신과 병동 / 마종기

 

비 오는 가을 오후에

정신과 병동은 서 있다

지금은 봄이지요

봄 다음엔 겨울이 오고

다음엔 도둑놈이 옵니다

몇 살이냐고요?

오백두 살입니다

내 색시는 스물 한 명이지요

고시를 공부하다 지쳐버린

튼튼한 이 청년은 서 있다

죽어가는 나무가 웃는다

글쎄!

바그너의 작풍이 문제라니 내가 웃고 말밖에 없죠

안 그렇습니까?

정신과 병동은 구석마다

원시의 이끼가 자란다

나르시스의 수면이

비에 젖어 반짝인다

이제 모두들 제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추상을 하다 추상을 하다

추상이 되어버린 미술 학도

온종일 백지만 보면서도

지겹지 않고, -가운 입은 삐에로는

비오는 것만 쓸쓸하다

이제 모두들 깨어났습니다


51. 여물어 벙그는 알밥처럼 / 정진규

 

고향엘 갔었어 알밤들은 여물어 벙글고 있었어

날카로운 가시들의 무수한 근위병들을 거느리고 노려보고 있었어

누가 건드리면 터져, 전량으로 그렇게 지키고 있었어

용기를 내어 툭, 건드려 보았어 진짜, 진짜, 와르르 쏟아졌어.

좋아라, 좋아라, 바구니에 주워 담다가 가득가득 주워 담다가

아무래도 나는 처참해질 수 밖에 없었어 알밤들 하나하나가

나를 가두어버렸어 나는 가짜야, 가짜야 돌아와 을지로쯤의

저녁 거리를 걸어가면서 가볍게 어깨를 치는 낙엽 한 장의 무게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있었어 다 알아버렸어 들켜버렸어 누가 지금 가장

시다운 시를 쓰고 있는지 누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다 알아버렸어

이 가을에 나는 분명해졌어 서정시건 애국시건 여물어 벙그는

알밤처럼 할 일이야 그렇게 지키는 일만이 중요해

이 가을에 나는 분명해졌어


52. 유랑악사 / 이근배

 

그날 마장천의 검은 물을 네가 흐르게 하고
떠다니는 노래를 불러다가 비가 되게 하고
 끊긴 기타는 남아서 지금도 울고 있다
네가 풍기던 생활의 비린내를 뒤집어쓰고
나는 걷없이 나이가 들어
 년을 돌이킬 수가 없구나.


 53. / 이성부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묶어

더 튼튼해진 백성들을 보아라.

죄도 없이 죄지어서 더욱 불타는

마음들을 보아라. 벼가 춤출 때,

벼는 소리없이 떠나간다.

벼는 가을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바람 한 점에도

제 몸의 노여움을 덮는다.

저의 가슴도 더운 줄을 안다.

벼가 떠나가며 바치는

이 넓디넓은 사랑,

쓰러지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드리는

이 피묻은 그리움,

이 넉넉한 힘


54. 긴 봄날 /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쳐다본다 긴 봄날엔...

 55. 오래된 골목 / 천양희

 

길동 뒷길을 몇번 돌았다

옛집 찾으려다 다다른 막다른 길

골목은 왜 막다르기만 한 것일까

골과 목이 콱 막히는 것 같아

엉거주춤 나는 길 안에 섰다

골을 넘어가고 싶은 목을 넘어가고 싶은 골목이

담장 너머 높은 집들을 올려다본다

올려다볼 것은 저게 아닌데

높은 것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낮은 지붕들이 중얼거린다

나는 잠시 골목 끝에 서서

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나무가 미래일까

오래된 몸이 막다른 골목 같아

오래된 나무 아래 오래 앉아본다

세상의 나무들 모두 無憂樹 같아

그 자리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아직 걱정 없이 산 적 없어

無憂 무우 하다 우우, 우울해진다

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

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적고 있다

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

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

너무 오래된 골목


56. 한국의 아이 / 황명걸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이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두 분은 가시면서
어미는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매질과 술주정을
벼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뼛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야
사채기만 가리지 않으면
성별을 알 수 없는 아이야
누더기옷의 아이야
계집아이는 어미를 닮지 말고
사내아이는 아비를 닮지 말고
못 사는 나라에 태어난 죄만으로
보다 더 뼛골이 부서지게 일을 해서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멀지 않아 네가 어른이 될 때에는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명심할 것은 아이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이야
혈단신의 아이야
너무 외롭다고 해서
숙부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외숙이라는 사람을 믿지 말고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가지고 노는 돌멩이로
미운 놈의 이마빡을 깔 줄 알고
정교한 조각을 쪼을 줄 알고
하나의 성을 쌓아 올리도록 하여라
맑은 눈빛의 아이야
빛나는 눈빛의 아이야
불타는 눈빛의 아이야

 

 
57. 노을 / 조태일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사람들은 누구나

해질녘이면 노을 한 폭 씩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서성거린다.

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

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

흔들거린다.

저 노을 좀 봐. 저 노을 좀 봐.

누가 서녘하늘에 불을 붙였나.

그래도 이승이 그리워

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냐.

이것 좀 봐. 이것 좀 봐.

내 가슴 서편 쪽에도

불이 붙었다.

 

58. 저녁 바다와 아침 바다 / 최하림

 

광산촌의 여인은 보고 있었다 물에 뜬 붉은 바다

날빛 새들이 날아오르고 물결에 별들이

씻겨져 제 모습으로 갈앉고

상수리나무가 한 그루 흔들리고 있었다

키 작은 사내는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일천 피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으나

가도가도 막막한 어둠뿐 모두 다 뜨내기와 갈보뿐

낡아빠진 궤도차가 달리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젓가락을 두들기며 노래

불렀으나, 신참내기 전도사도 노래불렀으나 가슴의

멍울은 풀리지 않고 싸움도 끝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슬픔만 달빛이 내리는

나무 그늘이라든가 산등에서 아주 낮게

흘러내리고 어떤 적의도 없이 흘러내리고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새들 무리가 무의미하게 날아오르고

물결에 흔들리는 여인의 얼굴 위로

상수리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59. 파랗게, 땅 전체를 / 정현종

1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

2

그림 속의 여자도 개구리도

꿈틀거리는

봄바람 속

내 노래의 물소리는 저

풀잎들 가까이 흘러가야지

 

60. 항토에 내리는 비 / 이가림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제나 버려져 있는 고향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61. 구미호 / 유안진

 

어렵사리 서럽사리 사노라 사랑하노라,

천년을 묵어도 아니 풀릴 원한으로,

꼬리가 아홉 달린 구미호가 되어,

꽃피는 서낭고개 타고 앉아 캉캉 웃었으면,

서리치는 밤하늘을 피칠하며 새웠으면.

 
62.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 노향림

 

바닷바람 속에는
치아가 누렇게 삭은 작은 꽃이
웃지 않는다.

얼굴가린 채
흔들린다.

지폐 몇 닢이
옛날 옛적처럼
묶였다.

목욕재계하고 술잔 올리듯
몇 구의
죽음이 엎드려있다.
후투티새가 오지않는 압해도였다.

 
63. 아버지의 빛 5 / 신달자

 

세월이 흐른 다음
그리움의 손끝이 펼쳐든
아버지의 일기장
온몸으로 쓴
유서의 간절한 핏자국을 본다.
한자 한자 생명을
헐어 쓴 병상일지
그 안에 폭우로 뒤척이는
강물 넘실거려
나는 미처 몇줄을 못 읽고
몸이 젖는다.

저기 저쪽이다!
생의 좌표로 힘차게
방향을 가리키는
어버지의 분명한 손끝
그 너머 일출보다
장엄한 빛이 터진다

아버지의 육필 몇줄에
술렁이던 어둠 쉽게 물러가고
어둡 눈이 밝아지는
광명한 유산이
내 앞에
아흔 아홉칸 큰 궁궐로 서 있었다

 

64. 풀잎 / 강은교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 않는 피()들 닦으며
,하루나 이틀
해 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65. 남자를 위하여 / 문정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오는

거대한 파도를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눈에 띌까 ,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찿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섭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66.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가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67.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는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위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68. / 이시영

 

밤은 먼 들의 바람을 몰고 와

십오층 빌딩의 옥상에 부려 놓는다.

거세게 부딪는 바람소리 들으면

나는 빈들로 나아가

한 마리 성난 사랑이 되고 싶다.

그러나 밤은 가슴에 더욱 큰 바람을 안고와

다시 한번 난간을 들이받고

피 흘리며 들판을 헤매다가

새벽녘 가장 강한 폭풍이 되어

빛나는 눈동자를 태어나게 한다.

 
69.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70. 산정묘지 1 / 조정권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출처 : 무자천서 (자연의 책)
글쓴이 : 바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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