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박세일 교수가 <창조적 세계화론>이라는 800 페이지 가까운 두툼한 책 한 권을 출판하여
그 출판기념회에 다녀왔습니다.
워낙 덕망이 있는 학자라 각계각층에서 많은 하객들이
모여 문자 그대로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비롯 스님, 목사, 교수, 정치인, 실업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상당한 수준의 학자이면서도 거침없이 현실에 참여하는
그 충성스러움에 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는 조국의 선진화와 통일을 강조합니다.
선진화 없이 통일 없고, 통일 없이 궁긍적인 선진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나도 그 주장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80 넘은 노인인 내가 추위를 무릅쓰고 자리에 나간 것은
그가 이 나라의 지식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그럴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한 마디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학자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고려조가 무너지는 것을 정몽주 혼자 막아내진 못했지만,
오라고 손짓하는 이성계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선죽교에서, 칼에 맞았건 몽둥이에 맞았건,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이 때문에 고려조가 정신적으로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성삼문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럴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노량진 언덕의 한 줌 흙이 되고 한 방울 이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육신의 그 의로운 항의와 고귀한 희생 때문에
조선조는 역사에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안중근은 이또 히로부미를 향해
“이럴 수는 없다”며 하얼빈 역두에서
그 품에 품고 갔던 브라우닝 자동 권총을 꺼내
이또를 향해 발사,
그가 발사한 3발이 모두 이또의 가슴에 박혀
그는 20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이 넘어가기 전에 이또는
“이거 누가 한 짓이야”라고 물었답니다.
그의 측근이 “한국 청년입니다”라고 알려주었더니,
이또는 “그렇겠지”하고 숨을 거두었답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지만
안중근 때문에 아주 빼앗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봉창·윤봉길이 일본의 침략자들을 향해
“이럴 수는 없다”며 사꾸라다문 밖에서,
또는 상해 홍구 공원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폭약이 든 점심그릇을 던졌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서 해방을 맞고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오늘 문제가 되는 세종시 원안을 여·야가 합의하여 통과시킬 때 국회의원 박세일은 “이럴 수는 없다”며, 당을 버리고 국회를 떠났습니다. 작은 일 같지만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세일을 사랑합니다.
지난 번 이른바 언론법 파동에 사표를 내고도, 사표가 수리되지 않았다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느새 되돌아가 뻔뻔스럽게, 세비를 받아먹고 살며 떵떵거리는 야당의 그 세 사람 국회의원들을 나는 경멸합니다.
김동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