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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00일간의 변화 - 세일즈왕 하석태

대한유성 2009. 6. 26. 11:10

 

 

 

 

 

 

 

스물 일곱 나이에 마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하석태 .

한동안 노동운동에만 매달려 그게 삶의 모든 것인양 살다가

보험세일즈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어디 마땅히 찾아가 볼 만한 아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막연하게 세일즈를 시작하려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지금이야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유능한 세일즈맨으로서 다른 세일즈맨들을 관리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너무나 비관적이었다.

계속 거절을 당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서

한강 둔치에 드러누워 운 적도 많다.

그랬던 하석태가 진짜 세일즈맨으로 거듭나게 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한번은 우연히 절에 갔다가 1천 배를 올리게 되었다.

하도 답답할 때라, 1천 배라도 하고나면 뭔가 풀릴까 싶어 하게 된것이다.

절을 마치자 쓰러질 듯 힘들었다.

그때 옆에서 같이 절을 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 할머니는 그 힘든 1천 배를 100일째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하석태는 문구점에 들러 전지 한 장을 사고는 칸을 100개 만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제 내 인생은 100칸밖에 없다.

100일동안 온 힘을 다해 보고도 안되면

영업은 내가 갈 길이 아니다 생각하고 그만두자

그리고 그 100일 동안 날마다 해야 할 행동강력을 적었다.

하루에 세 사람 면담, 전화 서른 통 넘게 걸기

한 건 넘게 계약하기

쉰 곳 넘게 방문하기

30분 넘게 책 읽기

 

그 전지를 자취방 벽에 붙이고 아침과 저녁으로 108배를 올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제 100일만 버티면 되었다.

하석태는 영업지역을, 그 힘들다는 압구정으로 잡아 무작정 고객들을 만났다.

그를 기다리는 고객은 한 명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100일 동안만 약속을 지키면 되므로.

하루 내내 돌아다니면 저녁에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고

발톱이 빠지고 발바닥이 부르터서 절뚝거리며 다녀야 했다.

계약을 한 건이라도 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각오로 움직였다.

전지에서 한 칸을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전쟁 같던 그 100일이 지났을 때, 그는 딴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일 열심히 하고 잘하는 사람으로 거듭나 잇었던 것이다.

그 뒤로 그는 보험 세일즈 세계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거의 없다.

100일의 기적인 셈이다.

 

 

양복 위에는 '꿈과 사랑을 주는 보험설계사'라는 명찰을 달고 다니기도 했고,

보험 체결이 안 되면 밥을 안 먹겠다고 마음먹어 ,

열흘 동안 빵과 라면만 먹기도 했다.

 

 

계약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다 그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일도 많았다.

고객 앞에서 신뢰를 보여주려고 혈서를 쓰기도 했다.

혈서를 보고 감동하는 사람도 있어고

무섭다고 도망가는 여자도 있었다.

 

 

 

영업 초기에 하석태는

보험 세일즈에 신들린 사람처럼 아무나 만나면 보험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이 이제 질린다며 그만두라고 해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부담을 느끼던 사람들이 점차

'대단하다'고 말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프로답다'고 치켜 세워 주었고

나중에는 '출세했다'고 인정까지 해주었다.

20년 전 그는 두 달동안 일한 대가로 15만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한 달에 1억을 받는다.

 

 

2007년에는 '하석태 세일즈 스쿨'을 만들었다.

세일즈맨을 대상으로 한 세일즈 강의를 하는 곳이다.

거기서 그는

'세일즈는 이해가 아니라 실천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강의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을 사람은 강의를 아예 듣지 말라는 것이다.

오래전 그가 맨손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대 가진 무기 또한

'실천' 하나 뿐이었다.

'실천력'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기에 오늘날

최고 세일즈맨으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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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History)

 

나는 '오동통 술타령'의 배경이지 싶은 마산시 오동동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내이긴 하지만 소위 말해 '방석집'이 몰려 있는 유흥가의 한 골목에 있던 집.

그런 우리 집에는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세 들어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낮에는 포장마차를 하고

밤에는 아가씨들의 옷을 빨아주는 일로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

 

내가 어릴 때 보고 자란 어머니의 모습은 포장마차를 하다 노점상 단속반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거나 손이 갈라져 피가나면서도

아가씨들이 던져놓고 간 엄청난 양의 빨랫감을 빨고 있는

삶에 지친 모습이 전부였다.

 

빨래를 잘 못 했거나 속옷이 없어졌다며 신경질을 내는 여자들 앞에서

쩔쩔매는 어머님의 모습은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슬픔이 뒤덮인 분노가  가슴을 마구 두들겨댔고

그 분노의 대상은 결국 아버지로 좁혀졌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고 

 쌀 뒤주에 쌀이 떨어져도 걱정을 안 하시는 분이었다.

사춘기 시절 나의 꿈은 아버지처럼 살지 않는 것이었다.

 

 

고 2 때부터 극단적인 반항기를 보냈던

나는 아예 친구 자취방을 전전하며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온갖 고생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는 게 싫었고 ,

그럼에도 한량같이 지내는 아버지는 더욱 보기 싫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밖으로만 돌면서 나는 매일 싸움질,술,담배에 찌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행패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매를 들었다.

나는 때리려는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지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때리려 합니까?

아버지 노릇이나 똑바로 하면서 때리소!"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을 고개 숙이고 계시다 돌아섰다.

말을 뱉은 순간 후회가 밀려왔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우리는 말문을 닫았고 서로 눈길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군대에 있을 때 경기도 운천에 있는 제 1기갑여단에서 무전병으로 복무했다.

경상도 사투리가 심해 처음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대대의 유능한 무전병이 되었고,

병장을 달면 대대장의 지프차를 타고 멋지게 무전병의 역할을 할 후보로 지목되었다.

 

대대장의 무전병이 되기 위해서는 비밀 취급 2급 인가증이 있어야 해서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하는 말.

"미안하다. 취사병으로 보직을 옮겨야 되겠다"

 

기가 찬 일이었다.

그 당시 취사병은 군대의 감옥인 영창을 갔다 온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 등

무기를 쥐어주면 사고를 칠 것 같은 소위 얘기하는 '골통'들에게 주어지는 보직이었다.

 

"왜 제가 그리로 가야합니까 ? 이유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지금은 이야기할 수 없다. 제대할 때가 되면 말해주겠다."

 

 

 

 가야 하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엇다.

취사병으로 10개월 동안 밥을 하면서, 김치를 담그면서, 생선 대가리를 칼로 내리치면서

'왜 내가 이곳으로 왔을까'를 생각하며 보냈다.

 

제대 신고를 마치자 마자 중대장을 찾아갔다.

"10개월을 기다렸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네 아버지 때문이다. 반공법 위반 전력이 있는 것 같다.

상부의 결정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

 

"나는 사회에 나가면 경찰이 되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것도 안됩니까?"

"불가능 할 것 같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순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또 다시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맥이 풀렸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자꾸 벌어지는 걸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물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를 하고 나서 어머니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해군 장교 2기생으로, 고향에선 대우받던 엘리트였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한창 나라가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극도의 혼란기에 빠져 있을 때 아버지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계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승선 허가를 내준 전투함의 병사 중 하나가 그만

배를 타고 월북을 해버렸고 , 아버지는 그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었다.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할머니는 독이 있는 약초를 구해,

면회 간 고모를 통해 전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먹고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자 집에 가서 죽으라고 사형 선고 직전 병가 처리가 내려졌고

그 덕분에 아버지는 석방되었다.

그 후 다행히 몸은 회복되었지만 줄곧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기관에서 조사를 나올 때면 항상 머리맡에 약봉지를 두고

자리에 누워서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이후로도 아버지는 사회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내막을 알고 나자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원망이 더 컸다.

"나는 어떻게 되지?"

내 미래는 없을 줄 알았다.

 

 

정말 원망도 많이 했고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중년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많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오래 살아봐야 안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에너지를

성공을 위한 독기로 변환시켰고

그 결과 지금 이순간 당당히 아버지를 좋아하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하고싶었던 말이 있다.

이 말을 할 수 있는 순간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신 사실이 정말 다행스럽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기회는 위기 안에 있다.

위기를 기회로 성공시키는 것은 기적이며, 이것을 한 번 체험해본 사람에게

성공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일사이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능력이 얼마나 극대화 될 수 있는지 잘 모른다.

그것은 능력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실천으로 밀어붙이는 경험을 해보지 않기 때문이다.

성공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모든 것을 걸어라!

성공하고 나면 힘들었던 과거도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반딧불이도 썩은 짚더미에서 태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

출처 : 주인된 삶을 살자
글쓴이 : 바다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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