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이고 군 대회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지는 나는 그때 군 대회에 나가서도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놓고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단풍이 한창이지만 봄에 나무에서 꽃이 피지?"
"예."
"너희 집에는 어떤 꽃나무가 있니?"
"매화나무도 있고, 살구나무도 있고, 배나무도 있어요."
"그래. 그러면 매화나무를 예로 들어보자.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예."
"그러면 그 나무에서 핀 꽃 중 어떤 꽃에서 열매가 맺을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물으셨다.
"매화나무는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한 가지에서만 일찍 꽃이 핀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선생님이 보기에 그 나무 중에서 제일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이번 군 대회에 나가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오니까 속이 상하지?"
"예."
"그래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
차마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얼굴도 바라볼 수가 없어 나는 그저 가만히 땅만 내려다보았다.
"나는 네가 그렇게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 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재주를 크게 보일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 네가 이 다음에 꼭 좋은 글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되고 싶다면, 그때 남들보다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도 지금 많은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이 다음에 네가 꼭 큰 작가가 되어 선생님도 네가 쓴 책을 읽게 될 거라고 믿는다. 너는 일찍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이 아니라 남보다 조금 늦게, 그렇지만 큰 열매를 맺을 꽃이라고 믿는다.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클수록 점점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거든."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당시 '삼중당'에서 나온 <<한국문학대계>> 열두 권짜리 두꺼운 책들을 다 읽어냈던 것이다. 어른들이 읽는 <<삼국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내 작가생활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 내 삶을 바꾼 칭찬 한 마디(21세기북스) 중 소설가 <이순원>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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