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王朝의 四色 黨派
우리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색당파싸움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사색 당쟁이 몬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선조때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짐비록에서 보여주듯이..... 사색당파라 하면 보통 동, 서, 남, 북인을 일컫는 말인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 뒤에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을 사색당파라 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 이유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 이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 이유를 모두 설명드리겠습니다. 붕당이 분할되는 과정은 전후 관계가 파악되어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로 설명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글로 풀어 쓰는 데 더 비중을 둘 수 밖에 없었네요.
1. 士林 → 東人과 西人의 분할
|
동인 | 서인 |
출신 배경 |
김효원 지지세력 (신진사림) | 심의겸 지지세력 (기성사림) |
정치 개혁 |
척신정치 개혁에 적극적 | 척신정치 개혁에 소극적 |
학문 계승 |
이황, 조식, 서경덕 | 이이, 성혼 |
척신정치 청산에 대한 방법이 발단이 되었고, 이조전랑 직에 대한 문제가 직접적 원인입니다. 사림파는 네 번의 사화를 견디며 선조 즉위 이후 정계 주도권을 차지합니다. 척신정치(명종 원년에 윤원형과 윤임 외척간의 권력 다툼을 통해 윤원형의 왕실 외척이 주도한 정치 형태, 윤임 세력이 축출되는 과정에서 사림파들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합니다)를 청산함에 있어 사림파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게 되는데요, 여기서 척신정치 청산에 소극적인 심의겸 중심의 기성 사림 서인과 척신정치 청산에 적극적인 김효원 중심의 신진 사림 동인으로 갈립니다. 하지만 동인과 서인이 확연하게 갈리게 된 직접적 이유는 이조전랑 직을 놓고 대립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조전랑직은 직위는 비교적 낮았으나 권한이 매우 강했으며(특히 자신의 후임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은 한 당파가 이조전랑직을 독점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기반이었습니다) 재상으로 승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치는 직책이었습니다.
*吏曹正郞-正五品
조선시대 이조(吏曹)에 둔 정오품(正五品) 관직으로 정원은 2원이다. 위로 이조판서(吏曹判書: 正二品), 이조참판(吏曹參判: 從二品), 이조참의(吏曹參議: 正三品 堂上) 각 1원이 있고, 아래로 이조좌랑(吏曹佐郞: 正六品) 2원이 있다. 정랑의 관장 하에 문선사(文選司), 정색(政色), 제향색(祭享色), 고공색(考工色), 고훈사(考勳司), 노직색(老職色), 공명색(空名色) 등의 분장(分掌)이 있었습니다.
정랑은 육조의 실무를 관장하여 청요직(淸要職)으로 간주되었으며, 특히 이조·병조의 정랑은 좌랑과 함께 인사행정을 담당하여 전랑(銓郞)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삼사(三司) 관직의 임명동의권인 통청권(通淸權)과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재량권이 있어 권한이 막강했으며, 이로 인해 붕당의 폐단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2. 東人 → 北人과 南人의 분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발생한 정여립 모반사건이 발단이 되었고, 왕세자 책봉문제가 직접적 원인이 됩니다. 정여립은 원래 이이와 성혼의 지지를 받아 정계에 진출한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나 이이와 성혼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는 서인의 당파정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동인으로 갈아탄 다음 정계에서 은퇴하여 낙향합니다. 그리고 향촌에서 대동계라는 조직을 조직하여 무술을 연마하고 자신의 사상을 강론하는 활동을 전개하여 전국적인 세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조정에게는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알려져 토벌군을 파견하고 정여립은 도망치다 잡혀서 옥사합니다(기축옥사). 정여립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죠. 선조는 역모나 모반에 매우 예민했고 왕권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했던 왕이었습니다. 선조는 서인을 내세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이라면 무차별적으로 처형했으며 서인은 지금이 기회다 싶어 정적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정국 주도권을 다시 가져옵니다. 당시 서인의 영수는 정철(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으로 유명한 문인이기도 하죠)이었는데, 정철이 서인의 영수이던 때에 왕세자 책봉 문제가 발생합니다. 서인은 광해군을, 동인은 신성군을 지지합니다. 선조는 광해군의 능력을 시기하여 신성군을 우대하였고, 그 때문에 광해군을 지지하던 서인의 우두머리인 정철은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에 대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갈리게 되면서 동인이 갈립니다. 이후 북인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태어난 유일한 정실인 영창대군과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광해군 사이에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으로 나뉩니다.
3. 西人 → 老論과 少論의 분할
노론 | 소론 | |
중심인물 | 송시열 중심의 노장파 | 윤증 중심의 소장파 |
학통 | 이이 계승 | 성혼 계승 |
성격 | 대의명분(숭명배청), 민생 안정 중시 |
실리추구(청 인정), 적극적 북방 개척 주장 |
주장 | 보수적 | 진취적 |
특징 | 성리학 절대시 → 주자 중심 성리학 강조 |
성리학에 대한 탄력적 이해 → 양명학, 노장사상에 개방적 |
숙종의 환국 정치가 발단이 되었고 허적의 유악 사건과 역모 사건이 직접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붕당 정치를 역이용하여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던 왕입니다. 숙종 이전의 붕당 정치가 견제와 균형이 유지되었다면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숙종이 임의로 정국을 급격하게 전환시켰고, 붕당 정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로 흐릅니다. 이를 환국이라 하며, 숙중 치세 중 세 번의 환국이 일어났습니다. 숙종 즉위 당시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당시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사적인 집안 잔치에 궁중의 물품을 가져다 쓴 유악 사건이 발생하여 주요 관직이 모두 서인으로 교체되었고, 뒤이어 서인들이 허적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하여 허적, 윤휴 등이 처형되고 남인들을 정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정국은 남인에서 급격하게 서인으로 주도권이 넘어오게 되었고 이게 바로 경신환국(1차 환국)입니다. 1차 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처리 문제와 국정 운영을 둘러싸고 서인은 송시열 중심의 강경파인 노론과 윤증 중심의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리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四色은 네 가지의 색깔이라는 뜻인데, 이것이 전하여 조선 시대에 있었던 네 개의 붕당(朋黨)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 처음에는 동인(東人) 서인(西人) 남인(南人) 북인(北人)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나,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뉘어진 뒤에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4대 당파를 가리키는 말로 습니다. 붕당은 선조(宣祖) 8년(1575)에 동 서로 나뉘어졌는데, 이 가운데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지고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양분되었음. 그런데 서인을 중심으로 해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면서 광해군(光海君) 때의 집권세력이었던 대북은 거의 전멸하였고. 따라서 조선 후기의 붕당에서 사색이라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조 효종 연간에 서인에서 파생된 노론과 소론, 그리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남인과 소북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역사의 고질병이 오늘날에도 도지는 것 같어 안타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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