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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18주문제, 만주 봉천성, 요녕성, 길림성

대한유성 2018. 11. 13. 07:03

제18주문제, 만주 봉천성, 요녕성, 길림성

한국사는 "요동요서와 한4군", "만주탄생시기"만 알면 해결된다. 요동요서와 한4군은 이미 저서로 나왔으니 뒤로 미루고 한반도 북쪽의 신만주가 언제 탄생했는지?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존재할 수 있는지? 를 검토해 보겠다.


1). 봉천성

1. 봉천부(奉天府))(중국지리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
“청나라 때 설치했고 성경장군을 두었는데 치소는 승덕현이다. 즉 지금의 봉천 심양현 치소이다.(淸置. 隸盛京將軍. 治承德縣. 卽今奉天瀋陽縣治.)”
※(해설)
지명변경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하나씩 설명하기는 어렵다. 전체를 개요적으로 판단하면 실수가 적다. 독자들은 그런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
“지금의 봉천 심양현 치소이다.“
광녕현 조에서 청나라는 광녕현을 다시 설치했는데 봉천 금주부 소속이다. 중화민국은 북진현으로 고쳤다.“고 하여 청나라 때 이미 봉천성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청해성 과 감숙성 동부를 봉천성으로 했다.

“지금”이란 1911년∼1927년까지의 중화민국 시대인데 역사조작시기이다. 중화민국 초에는 원래위치인 감숙성, 초기는 1차이동인 감숙성 및 산서성, 중기는 2차이동인 산서∼요서지역, 말기는 3차이동인데 신만주로 보면 대략 맞다. 4차이동도 있다. 그러므로 봉천심양현은 이동과정에 따라 초, 초기, 중기, 후기, 말기의 5개 기간으로 나누어 보아야 하는데 이동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또 이동시기를 청나라 때로 소급 조작한 것으로도 추정된다.
청태조 10년에 고구려 경주인 감숙성 경양지역의 발해심주(瀋州)를 성경(盛京)으로 바꾼 후 6대 건륭초인 1776년에 다시 성경장군부를 건설했는데 치소가 승덕현이다. 후에 다시 심양으로 고쳤다. 그러므로 현재의 감숙성 경양(慶陽)을 고구려 때는 慶州, 발해 때는 심주(瀋州) 청나라 때는 승덕, 성경, 심양으로 불렀다는 뜻이다.
지금은 승덕은 하북성 북부로 이동하고, 심양은 신만주 요동반도로 이동해  있다. 중화민국 때 지명을 이동했는데 대체로 청나라 때로 소급하여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명, 청과 이씨조산의 경계는 압록강이므로 감숙성 경양은 이씨조선 땅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록이 존재할 수 없는데 조선을 한반도로 옮기고 중국대륙 전체를 명-청의 땅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에 발생한 조작기록들이다. 필자는 기록대로 일단 해설은 하지만 중국의 기록들은 90% 이상 조작된 가짜라는 것을 독자들은 이해하여야 한다.



2. 봉천성(奉天省)(중국지리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본문1)“북경동북 1500리에 있다. 동쪽경계는 길림. 동남은 압록강인데 조선과의 경계다. 남쪽 경계는 황해와 발해다. 서남계는 직예성이고 서쪽 경계는 열하성이다. 북쪽경계는 흑룡강이다. 동서거리는 약 1200리고 남북거리는 약 1300리다.

※(해설)
여기까지는 현재의 요녕성자리를 봉천성으로 설치한 설명인데 중화민국 후기인 1920년 전후의 기록을 첫머리에 놓고 강조한 것이므로 원래위치가 아니고 최종위치인 신만주를 설명한 것이다.


(본문2)옛날(순임금 때) 청주와 유주의 땅이다. 전국시대는 연나라 땅이다.
※(해설)
중국의 이동 조작된 상고사의 가짜기록이다.
요, 순, 하나라는 신강성 동북부 돈황지역이고, 전국시대 주나라는 청해성의 나라였으며 연나라는 청해성 동북부에 서황하(대요수)를 경계로 고조선과 접경하고 있었다.
순임금 때 청주는 산동성 북부, 유주는 하북성 북경 남쪽이다. 이 땅에다 봉천성을 설치했다는 것인데 조작기록이다. 4000년 전에는 하북성, 산동성은 호수, 습지, 늪지가 태반이고 대부분 홍수지였으니 사서에 나오는 대규모 국가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설치할 정도의 땅이 아니었다. 중국사는 해수가 물러간 다음에 광활한 동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의 역사를 중국동부로 전부 이동 조작했으므로 전국시대 하북성이 연나라 땅이었다고 한 것도 당연히 조작이다. 이렇게 진짜와 가짜를 알려면 10년이상 진실추적을 공부하면 노하우가 쌓여 가능하다. 이렇게 분별력이 생긴 후부터 비로소 진짜역사를 간추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므로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교수나 박사라도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지식으로는 진실역사에 대한 판정이 불가능하다. 알고 보니 모두 우리와는 상관없는 대륙사이므로 우리로서는 쓸데없는 미친 짓이다. 가짜역사 때문에 필자는 일생을 망쳤으니 너무나 억울하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단군에게 쫒기어 중앙아시아 돈황지역인 흉노 땅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하나라가 건국되었는데 은나라에 망했다가 주나라가 건국되었으므로 은나라, 주나라도 청해성의 나라다. 그러므로 연나라는 고조선의 서쪽인 청해성 동북부다.(그림참조)


(본문3)한나라 때 요동, 요서, 현토의 3군의 땅이다. 모용씨(전연), 풍씨가 있던 곳인데 후에 고구려 땅이 되었고 당나라 때는 발해 땅이었다. 오대(907-959)와 송나라(북송960-1126, 남송(1127-1279) 때는 거란이 차지하여 동경, 남경 땅이 되었다. 후에 여진과 몽고가 차지했고 명나라 초에는 요동도지휘사사에 속했다.
※(해설)
이 설명은 정확하다. 한나라 때의 요동군, 요서군, 현토군은 지금의 서황하 동서지역으로 감숙성과 청해성이 봉천성이었다는 증거이다. 요동요서 땅, 한4군 땅이다. “요동요서와 한4군”은 동북아 역사의 핵심이므로 이것만 확실하게 규명하면 역사로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다. (유우찬의 “요동요서와 한4군 ”참조)
명나라 요동도지휘사사 즉 요동군 총사령부는 감숙성 동부 즉 요동땅의 요양이다. 원나라 요양성의 치소이고 요, 금, 청나라의 동경이다. 현재의 신만주를 요동이라고 하는 것은 일제 때 조작된 것이니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4)청나라 천명7년(청태조 7년: 1622년) 요양에 동경을 건설했다. 10년(1626년) (동경을) 심양으로 옮겼다. 천총5년(2대 태종5년: 1632년) (심양을)높여서 성경이라고 했다. 순치14년(3대 세조14년: 1658년) 봉천부에 부윤울 설치했다. 건륭(6대 고종: 1736-1795년)초에 성경장군부를 건설했다. 광서(11대 덕종) 31년(1906년) 부윤을 다시 두고, 33년(1908년)에 장군을 다시 두고(만주 요동반도로 이동) 순무를 설치하였다. 성 이름을 봉천으로 바꾸고 동3성에 총독을 주둔시켰다.(중화민국 때)
※(해설)
감숙성 요양은 금나라, 요나라, 청나라의 동경이다. 그런데 고조선, 금나라, 발해, 요나라, 명나라, 청나라를 중국 동북으로 이동 조작했다. 고구려와 고려의 경주이고, 발해의 심주인 감숙성 경양을 청나라가 승덕,  성경, 심양으로 바꾸었는데 중화민국 때 하북성 동북에 승덕, 요동반도에 심양을 옮겨놓았다. 봉천성의 이동상황이 나타나는데 봉천을 1906년(광서31년)에 하북성북쪽, 1908년(33년)에 요동반도로 옮기면서 봉천부윤을 다시 두었다는 것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청나라 말에 신만주를 놓고 일본과 청나라가 각축을 벌였는데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신만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으로 파악된다.


(본문5)순치(1644-1661년)에서 강희간(1662-1722년)에 부와 현을 설치했다.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성, 부, 청, 주, 현을 증설했는데 수십개다. 또 나누어서 각도의 지휘소를  함께 설치했는데 광서33년(1908년)에 이르러 행성규모를 대비하여 지금 지휘소를 도 3개, 현 56개로 했으며 치소는 심양현이다.
※(해설) 청나라가 1600년대에 이미 만주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1600년대의 중반에 이미 부와 현을 설치했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른 후 즉 250년이나 지난 후인 광서 33년 즉 1908년에 성(省)규모를 설치하기 위해 미리 도3개, 현 56개를 설치했다는 뜻이다.
앞에서 이미 1908년에 봉천성을 설치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성을 설치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했다고 했으니 맞지 않는다.
※신만주에 대한 기록은 순치(1644년∼ ), 강희(1662년∼), 옹정(1723년∼), 건륭(1723년∼ ) 등 들죽 날죽한데 중국이 일찍부터 신만주에 연고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조작한 기록들로 추정된다.


(본문6)(이하는 다시 현재의 만주를 설명했으므로 해설을 생락한다.)
지세는 동쪽은 장백산맥에 닿고 서쪽은 의무려산과 접하고 남쪽은 마천령에 의지했다. 많은 산들이 요하를 끼고 많은 강들이 경사로 관통하는 사이에 있다. 압록강은 그 동남을 둘렀다. 대능하, 소능하가 그 서부를 관통한다. ---기후는 대륙성이고 겨울과 여름에는 하북성과 열하성을 비교할 수 있게 보인다. 농산물은 콩이 대종을 이루고 벼와 보리는 그 다음이다. 삼림과 약재가 자못 풍부하고 금과 철등의 광물 역시 많다. 본계와 무순의 광물제련은 최고로 유명하다.(在北京東北千五百里. 東界吉林. 東南以鴨綠江界朝鮮. 南界黃海渤海. 西南界直隸. 西界熱河. 北界黑龍江. 東西相距約千二百里. 南北相距約千三百里. 古靑幽二州地域. 戰國時燕地. 漢遼東遼西玄莵三郡地. 慕容氏馮氏所據. 後入高句麗. 唐入渤海. 五代及宋陷契丹. 爲東京,南京地. 後入女眞, 蒙古. 明初屬遼東都指揮使司. 淸天命七年建東京於遼陽. 十年遷瀋陽. 天聰五年尊爲盛京. 順治十四年置奉天府府尹. 乾隆初設盛京將軍. 光緖三十一年裁府尹. 三十三年裁將軍. 設巡撫. 改省名曰奉天. 並設東三省總督駐焉. 自順治. 康熙間. 卽已設立府縣. 闕後增城府廳州縣. 以數十計. 並分設各道領之. 迄光緖三十三年. 行省規模對備. 今領道三. 縣五十六. 治瀋陽縣. 地勢. 東據長白山脈. 西拱醫巫閭山. 南憑摩天嶺. 千山. 遼河挾諸水斜貫其間. 鴨綠江繞其東南. 大小淩河貫其西部. ---氣候大陸性. 寒暑視直隸較烈. 農産以豆爲大宗. 稻麥次之. 森林藥材頗富. 金鐵等鑛亦多. 本溪及撫順之煤鑛爲崔有名)“
(迄:이를흘. 拱:손잡을, 아귀맞출공. 繞:얽힐, 동일, 둘릴요. 憑:의지할빙. 稻:벼도. 頗:바르지못한, 편벽할, 자못 파. 煤:그을을 매)
※(해설)
慕容氏(349∼370)의 선비전연은 감숙성 북부 창려(연경, 명-청의 북경)를 도읍으로 하여 남쪽의 고구려 땅 700리를 빼앗아 신하국으로 만들고 환도산 남쪽 평양(최초의 조양, 평라)으로 천도하여 화룡궁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광개토왕이 수복했다. 그런데 하북성북부로 이동 조작했다.
요양은 감숙성에서만 4개소로 이동되었는데 제1은 원나라 요양성요양로인 해성북쪽 70리, 제2는 감숙성 국내성, 제3은 발해의 심주, 심양인 감숙성 경양인데 후에 흥경부 소속으로 고쳐서 감숙성 은천지역으로 이동했다. 다시 산서- 하북성 쪽으로 이동했는데 이곳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요동반도 심양남쪽 현재위치로 이동했다.


3. 봉천현(奉天縣): 참고사항
“당나라가 설치했다. 원나라 때는 성이었다. 지금 섬서성 건현의 치소다. 당나라 덕종(780∼)이 피난한 곳이다.(唐置. 元省. 卽今陝西乾縣治. 唐德宗避難於此)”
※(해설)
원래 봉천성은 구감숙성인 청해성 청해호 이동과 감숙성으로서 즉 요동요서 땅이고 한4군 땅이다. 동북아시아 역사중심지가 바로 요동요서와 한4군 땅이므로 이것만 규명하면 역사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유우찬의 “요동요서와 한4군”참조)
치소는 여러 곳에 옮겨 다녔지만 여기서는 최초의 봉천현을 언급한 것이다. 섬서성 함양 서북쪽인 지금의 건현(乾縣)이 최초의 봉천현이었다고 기록되었다. 한문 건(乾)자는 “하늘, 서북쪽”의 뜻이다. 그래서 봉천(奉天)의 뜻을 계승한 이름으로 보이며 섬서성 서안과 함양의 서북쪽에 봉천현을 둔 것도, 서북쪽인 감숙성에 봉천성을 둔 것도, 신만주 길림성 장춘이 엣 봉천인데 모두 서북쪽에 있다. 이것은 환인, 환웅, 황제, 단군의 건국지 즉 중국인들의 성소(聖所)가 모두 중국의 서북쪽이기 때문에 발생한 중국의 사상과 관습이지 한반도 원주민의 사상과 관습은 아니다. 이러한 사대주의 사상인 봉천사상 즉 개천절 사상이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는데 한국인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모른다. 한반도 원주민들의 사상은 정북사상(正北思想), 즉 한(┃)과 마(⊙)사상이다. 달리 말하면 북두칠성사상이라고도 한다.
 

★봉천과 심양의 이동:
승덕이 먼저이동하고 뒤를 따라 심양이 이동했다. 동북3성의 탄생경로를 설명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①발해 심주(瀋州)인 감숙성 경양을 승덕으로 고쳤는데 동경 또는 도성을 옮기기 위해 성경을 건설했다가 북경으로 천도한다.
②승덕을 다시 심양으로 고치고 성경을 폐지한다.
③먼저 승덕을 하북성 북부로 이동했다.
④봉천성을 산서성과 하북성의 북부로 이동하고 승덕을 치소로 삼았다.
⑤봉천성을 요동반도까지 확대한 후 치소인 승덕을 요동반도로 옮긴다.
⑥하북성 승덕자리에 심양을 이동한다.
⑦봉천성과 치소인 심양을 현재 요녕성자리로 이동하고 승덕은 다시 하북성으로 복귀시킨다.
⑧원래 감숙성에서 봉천성의 치소가 승덕이었다가 마지막에 심양이었기 때문에 봉천선 이동과 함께 승덕이 먼저 이동하고 뒤따라 심양이 이동하는 것이다. 
⑨신만주 전체를 봉천성으로 한다.
⑩1927년에 봉천성(신만주전체)을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분할하는데 당초에는 길림성을 백두산 북쪽에 설치했고, 요녕성 서쪽은 몽고 국경과 접했다.
⑪1928년 장개석의 국민정부에서 구만주의 원래 위치와 비숫하게 길림성을 백두산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다시 설치하면서 동북 3성을 재조정했는데 그것이 현재의 만주 3성이다.
이 설명을 하려면 100여개의 지명을 여러 번씩 보아야 하는데 한, 중, 일 3국에서 필자가 처음으로 추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털이 빠지고 골머리가 아픈 고통 속에서 추적했지만 근거부족으로 시원스럽지가 못하다. 처음 개척자는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가짜 속에서 진짜를 골라내고 진짜 속에서 가짜를 골라낸 후에 몇 번씩 바뀐 지명기록을 역추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은 신만주3성 설치시기가 중화민국말기인 1927년 즉 일제 때라는 것만 알면 된다.

                                                                    2018. 11. 12.

                                                                    한국상고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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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우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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