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공과 문왕의 고사
강태공(姜太公, BC 1212(?)~BC 1073)은 중국 상(商)나라 사람으로 본래 성은 강(姜)씨이고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이다. 그의 조상이 우(禹)임금의 치수 사업을 도운 공로가 있어 하(夏)시대에 여(呂), 지금의 하남성 남양 서쪽 땅에 봉해 졌으므로 여(呂)씨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상(呂尙)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왕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오래도록 기다리며 바라던[望] 사람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불렀다.
그는 젊어 시절에는 곤륜산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후 나이가 들도록 벼슬을 하지 않고 동해가에 숨어살면서 매일 위수(渭水)에 나가 낚시만 하였는데, 미끼가 없는 곧은 낚시 바늘을 수면으로부터 석자 가량 떨어진 허공에 드리운 채로 낚시를 하였는데 10년 동안을 이와 같이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가 문왕을 만나는 10년 동안을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하루에 하나씩 낚시대를 위수에 버렸으니 3천 600일을 이와 같이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離婁)」에는 “태공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서 동해가에 살다가 문왕이 떨쳐일어나자, 천하의 존경을 받는 원로로서 귀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문왕(文王)은 성이 희(姬)씨로 이름은 창(昌)이다. 생몰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 의하면, 그는 용의 얼굴에 범의 어깨를 하고 신장이 10척이었으며 가슴에 4개의 젖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백성들의 고통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주(周) 왕조 시조 후직의 13대손 고공단부는 덕을 쌓아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 있었는데 훈육 융적의 공격을 받아 기산으로 옮겨가 정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백성을 다스렸으며 오관유사를 설치한 후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주는 은나라 제후국의 하나였다. 고공단부의 손자 희창(姬昌)은 기산(岐山) 아래에 나라를 세우고 선행하고 바른 정치를 폈다. 그가 바로 주문왕이다.
당시 은(殷)나라의 28대째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이 제위에 올랐다. 주왕(紂王)은 수(受)라고도 하며 제신(帝辛)이라고도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이며 제을(帝乙)의 아들이다. 제을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여 중국역사상 유명한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33년간 재위하였다. 주왕은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맨손으로 맹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또 총명하고 재치가 있으며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그는 여러 차례 산동성의 동이(東夷)를 공격하여 많은 노예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그는 또 동남쪽에도 주의를 기울여 중원문화를 회하(淮河)․장강(長江) 유역으로 전파함으로써 통일 중국의 면모를 갖추는데도 어느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주왕은 본성(本性)이 황음무도하고 포악하였으므로 이후 달기(妲己)라는 요녀에게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詩經「大雅篇」에는 ‘고대 중국 하(夏), 은(殷), 주(周)의 3왕조 중 은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 온 달기(妲己)라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라고 전한다.
기주에 흉년이 들어 주왕에게 공물을 진상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주왕은 격분하여 군사를 이끌고 기주를 정벌하려고 하자 유소씨는 자신의 외손녀 달기를 보내어 주왕의 마음을 달래려고 하였다.
달기를 본 주왕은 한 눈에 반해, 얼마 안가서 자신의 정실부인을 폐하고 달기를 정실로 맞아들인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도읍의 남쪽에 길이 3리, 높이 1000척의 녹대(鹿台)와 적성루(摘星樓)를 지었다.
또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었다.
그 못 둘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남녀의 한 무리가 음란한 북리무악(北里舞樂)에 맞추어 광란의 춤을 추면 주왕의 가슴에 안긴 달기는 몰아(沒我)의 황홀경에서 음탕한 미소를 짓곤 했다. 또 때로는 낮에도 장막을 드리운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벌이는 광연(狂宴)이 주야장천(晝夜長川) 120일간이나 계속되기도 했는데 은나라 사람들은 이를 장야지음(長夜之飮)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주왕은 달기의 말에 따라 포락지형(炮烙之刑)이란 형벌을 만들어 제왕의 행동을 비방하는 자들을 불충자로 몰아 포락(炮烙)의 형을 가하였다. 포락지형이란 속이 빈 구리 기둥[銅柱]을 숯불로 달구어 걸쳐놓고 그 위에 기름을 바르고 기둥을 건너면 석방시키겠다는 조건을 내리고 죄인을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형벌이다. 죄인이 미끄러운 구리 기둥을 건너다가 숯불 속으로 떨어져 타 죽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모습을 달기와 주왕은 즐기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같이 상궤(常軌)를 벗어난 광태(狂態)를 보다 못해 간언을 하였던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세 왕족이 있었다.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이 그들이다.
주왕의 이복형 미자계(微子啓)가 여러 차례 그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자계는 하는 수 없이 도성을 떠나 숨고 말았다. 주왕의 삼촌 비간(比干)이 그에게 충고를 하자 그는 노하여 “당신은 성인인가 보오. 성인의 심장은 구멍이 일곱 개라던데 당신의 심장에 구멍이 몇 개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소!”라고 하면서 부하에게 명하여 비간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어 죽여 버렸다. 비간의 참살 소식을 들은 기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며 남의 종노릇을 하였는데 결국 주왕이 그마저 잡아서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 구후(九侯)는 달기의 계략에 빠져 묶인 채로 소금에 절여져 죽었으며 시체는 젓갈로 담겨져서 여러 제후들에게 보내어졌다. 참다못한 악후(鄂侯)는 주왕에게 그의 악행을 간하다가 잡혀나가서는 말려 죽었다. 서백 희창[후에 문왕]은 구후와 악후가 끔찍한 꼴로 자신의 앞에 놓여지니 분노하였다. 이에 북쪽을 다스리는 제후 ‘숭후 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달기에게 아부하여 희창이 구후의 젓갈을 받지 않았다는 소식을 주왕과 달기에게 고했다.
끌려나간 서백은 주왕에게 직간(直諫)하길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夏)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鑑不遠 在夏侯之世(은감불원 재하후지세)]”라고 하였다. 이 말은 “600여 년 전에 은왕조의 시조인 탕왕(湯王:주왕의 28대 선조)에게 주벌당한 하왕조의 걸왕(桀王:주왕과 대동 소이한 폭군음주)을 거울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뜻이다.
분노한 달기는 당장 희창을 죽이라고 하지만 대신들이 나서서 극구 반대하자 주왕은 희창의 세력이 크니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유리(羑里)에 유폐시켰다. 이때가 BC 1144년으로 희창은 3년간 유리에 갇혀 있으면서 팔괘(八卦)를 깊이 연구하여 384효(爻)를 짖고 주역(周易)을 만들었다.
후에 희창의 장자 백읍고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주 왕의 배알하러 갔다가 그의 준수한 모습에 달기가 반해 유혹하였지만 넘어오지 않자 달기는 그를 모함해 죽인다. 그리고 주왕(紂王)에게 간하여 백읍의 시신으로 만두를 만들어 희창에게 먹이라고 하였다. 주왕은 평소 희창이 점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두려워하던 터라 이를 시험해볼 요량으로 백읍(伯邑)의 시신으로 고기만두를 빚어 그 아버지 희창[文王]에게 보내어 먹이라 하였다.
한편 희창[文王]은 아침에 쾌를 뽑아 점을 쳐본 결과 그 아들이 죽고 그 시신이 삶겨서 자신에게 돌아 옮을 알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자기 아들의 골육(骨肉)으로 빚은 만두를 가져오나, 희창은 이를 짐짓 모른 체 하고 만두를 삼킨다. 여기서 아는 체 하다가는 자신이 다시는 여기서 나갈 수 없음을 알았기에 적지 않은 눈물을 삼켰지만 마음에 울분을 참으며 겉으로는 태연한 체 하였다.
주왕(紂王)은 희창[文王]이 아주 순수히 고기만두를 먹어치웠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희창을 대현철(大賢哲)이라고 하더니 자기 아들의 골육(骨肉)으로 빚은 만두조차도 모르고 먹는데 알기는 무엇을 안단 말인가’ 하고 경계심을 풀게 되었다. 얼마 후 희백의 신하들은 그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미녀와 명마, 진귀한 보석 등을 모아서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희창이 구금 중에도 전혀 원망의 빛이 없고, 또 별로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석방하고 다시 서백에 임명하였다.
석방되어 귀국하는 서백 희창[문왕]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여정에 올랐다.
기산으로 돌아온 희창은 주족(周族)을 강성하게 만들어 주왕을 멸하고 천하를 구할 결심하였다. 그에게는 많은 신하와 장수들이 있었지만,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인재가 없어 그러한 사람을 백방으로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선친이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영호진(令狐津)의 나루터에 있는데 선친의 뒤에는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 서있었다. 선친은 문왕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창아 너를 보필해줄 지혜로운 자가 주나라로 올 것이니라. 주나라는 그로인해 흥할 것이니라.”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이 위대한 현인이 자기의 나라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들은 듯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희창은 시종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사냥을 다니며 마음속으로 늘 현인(賢人)을 갈구하였다.
다음은 『 육도삼략(六韜三略) 』 「문사(文師)」편에 나오는 문왕이 강태공을 만나는 장면이다. 어느 날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가려 하였다. 이에 사관 편(編)이 거북점을 보더니 읖조렸다.
田于渭陽(전우위양) : 위수가에 사냥을 나가시면
將大得焉(장대득언) :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라네
非龍非彲(비룡비리) :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非虎非熊(비호비웅) :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지요
兆得公侯(조득공후) : 어진 현인을 만나게 될 조짐이니
天遺汝師(천유여사) : 이는 하늘이 내려 주신 훌륭한 스승이라네.
문왕이 묻기를 “점괘가 참으로 그러한가?”
사관 편이 대답하길 “저의 선조인 사관 주가 우임금을 위하여 점을 쳐서 명재상 고요를 얻었을 때의 점괘가 이와 견줄만 합니다” 하였다. 문왕은 사흘 동안 목욕재계한 다음 수렵용 수레와 말을 타고 위수의 북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문왕은 위수에서 띠풀을 깔고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그 노인은 괴이하게도 미끼가 없는 곧은 낚시를 수면 위에 석자가량 떨어진 허공에 드리운 채로 낚시를 하고 있었다. 현인으로 직감한 문왕이 다가가 정중히 인사하며 물었다.
“낚시를 즐기시는가 봅니다.”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소인은 자기의 일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하고[소인락득기사(小人樂得其事)],
군자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짐을 즐거워한다[군자락득기지(君子樂得其志)]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가 낚시를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문왕이 물었다. “이와 비슷하다는 말은 무슨 뜻 입니까?”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낚시에는 세가지 모책이 있습니다.”
후한녹봉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모책과 많은 상을 내려 병사들이 목숨을 바치게 하는 모책과 벼슬을 주어 신하들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는 모책입니다. 대저 낚시라는 것은 이것을 구하여 얻는 것인지라 그 담긴 뜻이 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가히 커다란 이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문왕이 “거기에 담긴 깊은 이치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뚜렷하면 작은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약간 굵고 미끼가 향기로우면 중치의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면 큰 물고기가 물게 마련입니다.
물고기는 미끼를 물고 낚시 줄에 낚이고, 인재는 봉록을 받아먹고 군주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미끼를 드리우면 물고기를 낚아서 쓸 수 있고, 봉록을 내걸면 훌륭한 인재를 얻어서 능력을 쓸 수 있는 것 입니다.”
문왕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면 천하가 돌아와 복종하겠습니까?”
태공망이 대답하였다.
天下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
(천하비일인지천하 내천하지천하야)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 만백성의 천하입니다.
同天下之利者則得天下 擅天下之利者則失天下
(동천하지이자칙득천하 천천하지이자칙실천하)
천하의 이익을 백성과 더불어 나누는 군주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자기 마음대로하려는 군주는 반듯이 천하를 잃게 됩니다.
天有時 地有財 能與人共之者仁也. 仁之所在 天下歸之
(천유시 지유재 능여인공지자인야. 인지소재 천하귀지)
하늘에는 때[춘하추동]가 있고, 땅에는 재물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능히 함께하여 베푸는 자를 어질다고 합니다. 어짊이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免人之死 解人之難 救人之患 濟人之急者 德也.
(면인지사 해인지난 구인지환 제인지급자 덕야).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살려주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풀어주고, 우환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위급한 지경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자를 덕(德)이 있다고 합니다.
德之所在 天下歸之(덕지소재 천하귀지)
덕이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同憂同樂 同好同惡者義也 義之所在 天下赴之
(동우동락 동호동오자의야 의지소재 천하부지)
백성들과 시름을 함께 나누고 즐거움을 함께하며,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함께 미워하는 것을 의(義)라고 합니다.
의가 있는 곳에 천하 사람들이 나아갑니다.
凡人惡死而樂生 好德而歸利 能生利者道也
(범인오사이낙생 호덕이귀리 능생리자도야)
모든 사람들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덕(德) 보는 것을 좋아하고 이익을 좇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능히 살려주고 이익을 주는 자는 도(道)가 있다고 합니다.
道之所在 天下歸之(도지소재 천하귀지)
도가 있는 곳에 천하는 돌아갑니다.”
문왕이 다시 절을 하고 이르기를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이 내리신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 하고 다시 말하길 “선친이신 태공(太公)께서 자주 나타나 ‘성인이 주나라로 올 것이다. 주나라는 그로 인하여 흥성케 될 것이다’라고 하며 기다리셨는데[望], 공께서 바로 그분이십니다” 하고는 그를 수레로 모셔서 칭하길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며 국사(國師)로 봉하였다.
이때가 주왕 15년(기원전 1140년)에 강태공의 72세에 문왕을 만났다. 그후 강태공은 다시 국상(國想)에 임명되어 정치와 군사를 통괄하였다.
강태공의 노력으로 주족(周族)은 안정 속에 발전을 거듭하여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견융(犬戎), 밀수(密須) 등의 부족을 공격한 다음, 상의 지지 세력인 려(黎:지금의 산서성 長治市 서남), 한(邗: 지금의 하남성 泌陽縣 서북), 숭(崇: 지금의 하남성 嵩縣 북쪽) 등을 멸망시키고, 숭에 도성인 풍읍(豊邑)을 세워 상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삼았다. 문왕(文王)은 만년에 이르러 이미 천하의 3분의 2를 장악하여, 그 영토가 서로는 지금의 섬서, 감숙 일대, 동북으로는 지금의 산서 여성(黎城), 동으로는 지금의 하남 필양(泌陽), 남으로는 장강(長江), 한수(漢水), 여수(女水) 유역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상의 도읍 조가(朝歌)에 바싹 다가감으로써 상을 멸망시킬 기초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을 멸망시킬 계획만 남겨놓고 문왕은 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아들 희발(姬發)에게 대임을 맡겼다. 그가 바로 무왕(武王)이다. 문왕은 서주(西周)의 건설에 기초를 확립하였으며, 50년간 주족(周族)의 장을 지낸 후 97세에 병으로 죽었다.
무왕(武王)은 주의 주력군이 동남에 있을 때를 노려 대군을 거느리고 주왕을 토벌하였다. 이때 주왕은 달기와 녹대(鹿台)에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다가 그 소식을 접하고 황급히 병사 70만을 편성하여 전선으로 달려가서 무왕의 군대를 맞이하였다. 양군은 목야(牧野:지금의 하남성 淇縣 남쪽)에서 마주쳤다. 무왕의 군대가 용감하게 돌격하자 주왕의 군대는 무기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주왕은 급히 조가성(朝歌城)으로 도망가서 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살을 결심하였다. 그는 또 죽은 후에 백성들이 자기의 시체를 꺼내 분풀이할 것을 두려워하여 궁중의 모든 패옥을 가지고 20미터 높이의 녹대로 가서 온몸에 패옥을 걸치고 녹대 아래에 마른풀을 쌓아 불을 지르게 하고 주왕은 불에 타 죽었다.
강태공은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폭군 주(紂)왕을 쳐서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상(商)나라는 무너지고 주(周)나라가 건립되었다.
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개국공신으로 산동성(山東省)에 봉군하고 나라 이름을 제(濟 : 지금의 산동지방)라 하였으며 강태공으로부터 20대 강공(康公)까지 왕위를 계승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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