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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커스리더學]역사속리더십 키워드①②?③?

대한유성 2012. 10. 16.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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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거북선에는 '이순신 레이더'가 달려있었다

 

역사속리더십 키워드①-한산대첩과 이순신

왜군 무기·전함 사전분석

조류 등 기상까지 연구

학익진 펼치며 대승 이끌어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망동하지 마라. 진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

 

1592년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던 옥포해전 당시 일본 함대를 발견한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에게 내린 지침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중의 명장이다. 23전23승.

이는 세계 해전사의 유일무이한 기록일 뿐 아니라 그중 여덟 번째 전투인 한산대첩은 살라미스해전(기원 전 480년), 칼레해전(1588년), 트라팔가해전(1805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로 꼽힌다. 과연 이순신의 백전백승 비결은 무엇일까.

자고로 '머리를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했다. 리더는 분명 머리를 수고롭게 해야 하는 자다. 이순신 역시 그랬다. 이순신은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에 충실했다. 전투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적군에 비밀 정보원을 보냈고 예측 불가능한 전투에는 휘말려들지 않았다. 늘 적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동향을 면밀히 분석해 전투에 임했다. 이미 전투 전 정보전쟁에서부터 이순신 측의 승리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조선의 수군과 일본의 수군은 군함, 무기 등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의 수군은 밑바닥이 평평한 U자형 평저선을 사용했다. 안정감이 있고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지만 속도는 느렸다. 소나무로 만들어진 군함 역시 바닷물이 닿으면 수축하는 특성상 쓰면 쓸수록 튼튼해진다는 게 장점이지만 군함 자체가 너무 무거웠다.

반면 일본은 정반대였다. 밑바닥이 뾰족한 V자형 첨저선을 사용했는데 첨저선은 속도가 빠른 대신 제자리 선회가 불가능하고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림이 많았다. 또 첨저선은 가벼운 삼나무로 만든 탓에 무거운 화포를 사용하지 못했다. 화포를 쏘면 오히려 배가 전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나무는 가볍고 약해 화포 변동을 견디지 못했다.

무기 또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군은 활과 창을 주로 사용했고 일본군은 조총과 칼을 썼다. 창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공간확보가 필요한 반면 배 안으로 침범해 가까운 거리에서 공격하면 칼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도선이 중요했다. 이 사실을 아는 이순신은 일본군이 칼을 쓸 수 없게끔 했다. 공간을 확보한 후 화포로 적을 제압한 것이다.

조선군의 화포는 성능이 뛰어나 조총을 제압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수군이 보유한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등에 맞설 만한 중화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의 첨저선은 대양의 거센 파도를 견디지 못했다. 여기에 이순신은 조류의 변화까지 세심하게 계산해 전략을 펼쳤다. 제자리선회가 불가능한 일본으로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끔 한 것이다.

1592년 7월, 임진왜란 전체의 형세를 뒤바꾸는 대해전이 벌어진다.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이순신은 일본군의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했다.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을 펼치며 맹공을 퍼부었고 결국 일본군은 배 59척, 3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달아났다.

이순신의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이어지는 거북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북선은 도선을 잘하는 일본군의 침입과 화포 공격을 견디기 위해 갑판이 철판으로 뒤덮였다. 선체는 단단한 참나무로 만들어졌고 앞부분의 돌기는 적선의 약한 측면을 공격할 수 있게끔 돼있다. 거북선은 기선제압을 위한 돌격선 즉 탱커의 역할을 담당했다.

소리없이 벌어지는 현대 비즈니스 경쟁에서도 '지피지기 백전불태 지천지지 승내가전(知彼知己 百戰不殆 知天知地 勝乃可全)'은 그대로 통한다. 손자는 이를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방법이라고 언급했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나를 알고, 환경까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보 흐름의 보안체계까지 명확히하자.

 

 

 

세종은 끝장토론 전문가였다

 

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2-세종

 

장영실.정인지 등 인재 두루 발탁

집현전, 37년간 100명 학사 배출

재임 동안 1800회 넘는 경연(經筵)

관료수준 높이고 참여의식도 키워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관원이 직무에 적당한 자라면 모든 일이 다 다스려질 것이다."

 

실록에 남겨진 세종의 이 같은 언급은 그의 인재경영 원칙을 그대로 드러낸다.

조선시대 세종은 인재를 발탁하고 활용하는 데 가히 천재적인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유달리 명재상과 뛰어난 학자, 신료들이 많이 배출됐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관노인 장영실이 종 3품의 벼슬에 오른 것 역시 이 같은 세종의 인재등용 원칙 덕분이다. 장영실은 세종에게 발탁돼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해시계, 물시계를 만들었고 조선시대 과학의 선구자로 우뚝 섰다. 무관 출신의 공학자 이천과 정인지, 정초, 김담 등도 세종이 발굴한 대표적 인재다.

세종 2년에 만든 집현전은 자신의 비전을 이룰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집현전은 이후 37년간 100여명의 학사를 배출하며 세종의 '싱크탱크'로서 인재양성, 정책자문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세종은 폭넓게 인재를 썼다. 허조는 법가, 황희는 유가, 맹사성은 도가 사상을 지닌 신하였다. 그는 "당대의 인재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사회에 기여하게끔 하라"고 말한다.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원이 있더라도 이를 알아보는 경영자의 눈과 지원이 없다면 능력은 결코 발휘될 수 없다. 시대는 다르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경영자의 눈, 인재를 키우는 경영자의 마인드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종은 용의주도하게 인재를 끌어 모으는 재능을 갖고 있었고, 또한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인재들을 하나하나 만나 확인하려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물론, 보상시스템에서도 한 시대를 앞서 나갔다.

세종의 국가경영을 뒷받침한 또 다른 사상은 바로 '위민', '애민'이다. 그는 1418년 즉위교서를 통해 "어짊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고 밝혔다. 이 같은 민본 사상은 단지 구호가 아닌 그의 국정 전체에 일관되게 보여진다. 그는 늘 왕으로서 '소명'을 갖고 백성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했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수많은 발명품은 백성을 어여삐 여기는 어진마음으로부터 출발했다. 세종은 어떤 사안에 대해 보고받을 때면 늘 '백성에게 유용한 일인가'를 묻곤 했다.

수많은 발명품 중 훈민정음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을 그대로 드러낸 창조물로 첫 손에 꼽힌다. '어린 백성이 알리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이를 글로 옮기지 못하니,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매일 사용하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창제문에는 백성을 아끼고 사랑했던 세종의 마음과 더불어 나누고자하는 소통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종은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리더이기도 했다. 스스로 엄청난 분량의 공부를 하고, 축적된 지식을 경연이라는 공동학습프로그램과 정례회의를 통해 확장시켜나갔다. 재위 32년간 경연 횟수만 1800회가 넘는다. 관료 및 학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다보니 전체 관료들의 지식수준은 저절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경연을 통한 국정운영은 신하들에게 있어 일종의 참여적 리더십으로 발휘됐다. 세종은 신하들과 상의해 의사결정을 했고, 이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는 신하들의 노력과 만족도를 높이는 동시, 성과를 향상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세종은 대다수와 의견을 달리하는 이의 말도 동등하게 수용하며 '집단적 사고'라는 오류가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 경연을 진행함에 있어서도 그 절차와 방법을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도록 지원했다.

구성원들이 늘 평등한 분위기에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은 세종이 관계지향적 리더십을 통해 조직원들의 성과를 최대한 끌어내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게끔 한다. 세종은 충분한 토론을 통해 얻은 결론은 전적으로 일임했다. 책임과 권한을 확실히 부여했고, 성공한 이에게는 보상을 함으로써 다른 신하들에게까지 경쟁동기를 부여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토벌에서 성공한 최윤덕에게 우의정 자리를 제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세종은 정보의 중요성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었다. 토벌과정에서 무력보다 정보의 우월성을 깨달은 그는 기만술과 정보통제를 적극 활용했다. 의도적으로 여진족에게 온천행차 정보를 흘린 후, 적이 방심한 사이 적은 군력으로 상대를 토벌하는 결과를 얻었다. 세종은 당시 명나라의 정보에 밝았던 조선 출신 환관들을 귀하게 대하며 명나라의 방대한 소식을 발 빠르게 접했다.

 

 

 

[포커스리더學]

유연한 카리스마 정조 "상소에 오자났소"

 

역사속리더십 키워드 3- 정조

 

성리할자 반발에도 북학 수용

열린마음으로 '탕평의 정치'

당파근절 왕도정치 실현위해

'조선 신도시' 화성건설계획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침전에 이 같이 적힌 편액을 달아놓았다. 이는 '탕평의 정치' 또는 '성왕의 정치'로 요약되는 정조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그대로 드러내는 문구다. 그는 이를 "아침저녁으로 눈여겨보면서 나의 영원한 교훈으로 삼고 있다"고 언급했다. 샛별이 북극성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처럼 국왕을 중심으로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고 국왕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바로 정조가 말하는 성왕의 정치다.
 
정조는 영조가 죽고 2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생부인 장헌세자가 당쟁의 희생이 된 것처럼, 정조 또한 세손일 때부터 붕당 간 대립구도 속에서 갖은 위험과 어려움을 견뎌냈다. 즉위 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정치, 열린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일종의 공포정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정을 장악했다.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은 물론 후에 그의 최측근인 점을 이용해 세도정치를 펼쳤던 홍국영도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의 백성관은 '군민론'으로 요약된다.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내가 이제 배를 타고 이 백성에게 왔으니 더욱 조심하겠다"고 말했다. 정조는 민의 소리를 듣는 것을 곧 국정의 출발점으로 여겼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이는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실제 정조는 백성과 임금 사이를 막는 사대부를 피해 직접 민의 소리를 듣고자 했다. 재위 3년째에는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를 철폐해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정조가 능행(陵行)할 때 가능했는데 정조실록과 일성록 등에 실린 상언·격쟁만도 5000건이 넘는다 한다.
 
백성을 중시한 정조의 리더십은 종종 세종과 비교대상이 된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했다는 점과 학식이 깊었다는 점 등도 대표적인 공통점이다. 정조 또한 세종과 마찬가지로 월 5회 이상 신하들과 경연을 펼쳤고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신하들에게 권위를 행사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만들어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등 젊은 학자들과 밤새 학문과 정책에 관한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초계문신제를 만들어 36세 이하 젊은 신하들 중 능력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4서3경을 읽히고 시험을 보게 했다. 단지 시험을 보게 하는 것 뿐 아니라 칭찬과 꾸지람도 아끼지 않았다. 때로는 직접 시험문제도 냈다. 또한 신하들이 상소문을 올리면, 한자나 올바른 표현 등에 대해 지적하며 다시 돌려주곤 했다.

경연에서도 박학다식함으로 신하들을 압도했다. 세종이 원로들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인사권으로 권위를 확보했다면, 정조는 확신 없이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만큼 원로들의 권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권위를 확보했다.
 
정조는 카리스마형 리더로 꼽힌다. 아버지인 태종이 정적들을 이미 다 제거했던 세종과 달리 정조는 붕당 간 대립구도가 격심한 시기에 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반대세력을 모두 없애기보다 일부 남겨두는 불완전한 승리 체제를 유지했다. 강경 일변도의 정책이 오히려 반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았던 셈이다. 홍상범은 죽이되 홍낙임은 처단하지 않았고 김귀주는 죽여도 배후인 정순왕후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반대파인 노론 벽파에 대한 강한 경고인 동시 정조와 그의 측근이 늘 경계태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게 한 효과가 있었다.
 
또한 정조는 열린 정치를 추구한 왕으로도 불린다. 당시는 성리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거세게 일어났던 시기다. 북학과 서학(천주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정조는 전통 성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문을 익히는 신하들을 마다치 않았다.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는 데 열린 자세를 보인 것이다. 박지원의 제자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북학파 인물들을 대거 기용했고 천주교 인재들도 받아들였다. 중인 신분도 다수 있었으나 정조는 능력에 따라 직책을 부여했다. 이 가운데 문물의 발전과 혁신의 결과물이 나오게 됐음은 물론이다.
 
개혁과 통합을 외쳤던 왕 정조. 그가 추진한 개혁은 화성 건설로 집약된다.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 그리고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쌓은 이 성은 과학적인 성으로도 평가된다. 정조는 이 곳을 자신이 추진했던 모든 개혁의 무대로 삼고자 했다. 축성기술을 도입해 성을 쌓고 이 일대를 자급자족 도시로 육성코자 했다. 국영농장인 둔전을 설치하고 선진농법을 적용하려 했다. 자유로운 상행위가 가능한 통공정책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으로 이 프로젝트는 미완에 그쳤다.
 
반면 정조가 즉위 초반 노론 벽파를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자신의 지지세력을 만들고자 한 점은 '통합의 리더십'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당시 노론 벽파는 70여년간 일당 전제를 통해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조는 점진적으로 세력의 균형을 이루도록 하지 않고 노론 벽파를 공개적으로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결국 노론 벽파의 단결을 돕는 역할을 했다.

개혁의 대표주자로 꼽히지만 개혁의 속도에 대한 완급 조절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시대가 요구하고 국익을 위한 결단이라 하더라도 타 세력과의 타협과 공감 형성을 거치지 못하면 결국 개혁은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개혁 이전 충분한 합의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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