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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남의 말 다 옳다던 老재상, 자식에게는 불같았다 파업 중인 자식뻘 대신 일일이 설득
균형과 상생·배려와 소통의 아이콘
세종실록 "편법 없이 정도를 따랐다"
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에 오래 있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지위가 높을수록 경쟁이 치열하고 작은 실수 하나에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란 매우 어렵다. 이로 인해 장안에는 '호랑이와 여진족이 공격하는데도 두 눈 깜빡하지 않던 호랑이 장군이 황희 한마디에 놀라 빌었다'는 말이 돌았다. [포커스리더學] 68세 신하, 17세 王에게 "이간하는 者 조심하소서" 학문을 가까이한 청빈·무욕의 리더십
뛰어난 인적 네트워크, 영남학파 형성
"성학(聖學)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고, 도덕과 학술로 인심을 바로 잡으십시오.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중요한 자리를 맡기고, 어진 이에게 맡겼으면 두 마음으로 하지 말고, 사특(私慝)함과 의심을 버리십시오." 지난 임금들의 뜻을 이어받아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아첨하는 말로 이간하는 자들을 막아 양궁(兩宮)이 친하게 지낼 것, 성학으로 다스림의 근본을 세울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 잡을 것,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모든 다스림에 있어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이황이 쓴 여러 소 중에서도 특히 이 무진육조소에는 리더가 조직을 경영함에 있어 갖춰야 할 리더십이 빠짐없이 담겨있다. [포커스리더學]말했다 "임금님 하명에 감정이 섞여 있네요" 역사속 리더십 키워드- 6. 율곡 이이 '만언봉사' 속 대쪽 충고 "나쁜 법은 백성을 힘들게 해...인재 뽑을 땐 출신 따지지 말라"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일에 있어서는 실공(實功)에 힘쓰는 것이 긴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다해도 치적(治績)이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만언은 일만자의 장문으로 구성된 상소, 봉사는 밀봉한 상소를 뜻한다. 이 안에는 평소 율곡의 철학 사상은 물론, 리더로서 임금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 대한 조언이 그대로 담겨있다. 신분에 따라 출세가 좌우되던 당시에 이 같은 주장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실제 율곡은 당시 사회의 천민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했다. 그는 심지어 죄를 지어 관청 소속의 종이 된 공천을 보고 '노예도 역시 인간이다'고 말했다. 그만큼 천민들을 동일한 인간으로 대하고 이들의 인간적인 고통에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황희는 무려 18년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영의정으로 일하며 세종시대를 태평성대로 이끄는 것을 도왔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전해진 수많은 일화는 그의 강직하고도 너그러운 성품, 유연함 속의 카리스마를 짐작케 한다. 오늘 날 그는 역사 속 부드러운 리더십의 대표주자로도 꼽힌다.
세종은 그를 "세상을 다스려 이끌만한 재주와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지니고 있다. 만가지 사무를 하기에 넉넉하고 덕망 또한 모든 이의 사표가 되기 족하다(惟卿經世之才 適用之學 謀猷足以綜萬務 德望足以師百寮)"고 평가했다. 문종실록에는 "재상이 된 지 24년 동안에 중앙과 지방에서 우러러 바라보면서 모두 말하기를, 어진 재상이라 했다"고 전한다.
태종 대에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 귀양을 갔던 황희를 다시 관직으로 불러들인 이는 세종이었다.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태종이 그를 중용할 것을 당부했고 세종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인재를 알아보고 반대파도 끌어안은 세종의 안목도 있었지만, 황희 리더십이 갖는 특별한 힘 또한 오늘날 리더들이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황희의 리더십은 균형과 상생, 배려와 소통의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그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특정 분야에 구체적인 업적으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전 분야에 걸쳐 모두를 포용하고 조율하는 균형감을 드러냈다. 난립하는 의견을 조정하는 능력 또한 탁월했다. 이는 황희 자신이 사건과 사물을 대함에 있어 거시적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회의 중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로 '황희의 뜻대로 하라'는 표현이었다고 전해진다.
소헌왕후 승하 후 세종이 왕실가족을 위한 불당을 지으려했을 때도 황희의 조정력이 드러났다. 불당 건립을 반대한 집현전 학자들이 동맹파업에 나서자 황희는 유학자들을 한명 한명 찾아가 설득했다. 여든 나이의 영의정이 직접 설득에 나서자 결국 젊은 유학자들은 뜻을 굽혔다.
또 황희는 위로는 군주, 아래로는 백성에까지 모두와 소통하는 이였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의 의견을 귀담아드는 경청을 실천한 셈이다. 익히 알려진 여종들의 말싸움 일화는 그의 넉넉함을 짐작케 한다. 두 여종이 서로 다투며 황희에게 하소연을 하자 그는 '네 말이 옳다'고 서로 편들어준다. 이를 들은 조카가 '둘 다 옳다고만 하니 숙부님의 분명치 못하심이 너무하다'하자 황희는 '네 말도 옳다'고 다시 답한다. 언뜻 그의 주관이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각자의 하소연을 들어주며 공평하게 위로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그의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황희가 늘 부드러운 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가족이나 부하의 잘못은 엄하게 꾸짖었다. 일찍이 출세한 아들이 집들이 잔치를 크게 하자 그는 "선비가 청렴해 비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부하의 잘못은 우회적으로 꾸짖는 카리스마도 갖췄다. 병조판서에 오른 김종서가 정승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삐딱하게 앉자 황희는 시종들을 향해 "병조판서께서 의자 다리 한쪽이 짧으신가보다. 한쪽을 손질해드려라"고 외쳤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김종서는 자신의 무례함을 빌고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평소 김종서를 향한 황희의 애정도 있었다. 황희가 일찌감치 김종서를 차세대 재상감으로 지목하고 젊은 시절부터 다듬으며 키우려 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황희는 후진들의 성장을 자신의 자리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 이후 즉 다음 세대의 리더를 양성하려하는 진정한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신숙주가 쓴 황희의 묘지명에는 '논의 중 가부결단을 내릴 때는 깊은 계곡 달리는 급한 여울 같았다'는 표현이 있다. 세종 역시 황희에게 "묘당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면 경은 곧 시귀(蓍龜, 귀신같이 앞을 내다보는 이)였고, 정사와 형벌을 논할 때면 권형(權衡, 저울대같은 사람)이었다(廟堂有疑 政刑有議)"고 말했다.
황희가 오랜 기간 한 자리에서 구설에 시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특히 두 아들을 비롯한 친인척들로 인해 잦은 구설에 올랐다. 지나친 관대함과 포용력이 때때로 제가(齊家)에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세종 9년에는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아전을 죽여 말썽이 일었으나 황희가 이를 적당히 무마하려하며 파직 당했다. 하지만 이후 세종이 한 나라의 재상이 작은 일까지 책임을 지고 탄핵된다면 안정적 국정운영이 어렵다며 그를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나 인물평가에 짜기로 소문난 실록 사관조차 황희에게는 찬사를 보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문종실록은 황희에 대해 "성품이 관후하고 신중해 재상으로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모습이 풍만해 특출했고 뛰어나게 총명했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국사에 정도를 따르고 편법을 쓰거나 타협하지 않았고 제도를 변경함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무진년(1568년) 17세의 젊은 군주(선조)가 즉위하자 늙은 신하는 7400여 글자 6조목으로 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린다. 이 때 상소를 올린 퇴계 이황의 나이가 이미 68세였으니, 그간 쌓아온 삶의 지혜와 리더십의 요건이 모두 이 안에 집약된 셈이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 여기겠다고 답했고, 상소의 내용을 도표로 그려 병풍을 만들고 다스림의 표본으로 삼았다.
무진육조소는 크게 6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먼저 퇴계는 이간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선조에게 "세(勢)를 갈라 많은 것을 다투고 작은 것을 비교하는 통에 은원(恩怨)이 손가락질 할 사이에 생기고, 이해(利害)가 등 뒤에서 결정된다"며 "보통사람에 있어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제왕의 가정에 있어서도 이런 폐단이 많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는 "인군(人君)의 다스림 여하"에 달려 있어 "진실로 능히 자치(自治)만 한다면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게 퇴계의 말이다. 그는 "옛 사람들의 실도(失道)한 것을 오늘의 명감(明鑑)으로 삼아 뜻을 굳게 잡고 도를 일월(日月)같이 밝혀 요기(妖氣)를 물리쳐 간여 못하게 한다면, 선비와 백성이 다 대도(大道)에 오를 뿐 아니라 전날의 간사한 무리들도 변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를 위해서는 리더부터 스스로 배움을 가까이 해야 한다는 게 퇴계의 가르침이다. 퇴계는 고사를 인용해 "배움은 뜻을 겸손하게 하고 시종(始終) 끊임없이 배움을 생각하면 덕이 모르는 사이에 닦아진다"고 전했다.
실제 그의 삶도 이와 같았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사한 그는 평생 부와 명예보다 학문을 가까이하며 청빈, 무욕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계는 70세 고향에서 세상을 뜰 때까지 조정에서 140여 직종에 임명됐으나 그중 79번을 고사했고, 또 46번은 마지못해 자리를 맡았다. 부임과 사퇴를 거듭하면서도 맡은 직책에 있어서는 완벽을 다했다.
퇴계는 선조에게도 인사행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리더의 성패는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일국(一國)의 체(體)는 한 사람의 몸과 같다. 사람의 몸에 머리가 위에 있어 아래를 통솔하고 복심(腹心)이 가운데서 이어받아 일하고, 이목(耳目)이 옆에서 호위해야 몸이 편안하다"며 군주가 곧 인주(人主), 대신(大臣)은 복심, 대간(臺諫)은 이목이라고 말했다. 그는 "머리만으로 홀로 될 이가 없다"며 "인군으로서 대신을 신임하지 않고 대간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사람이 그 복심을 끊고 이목을 스스로 막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이어 임금이 자기욕심을 채우는 자를 복심으로 삼지 말 것도 당부했다. 퇴계는 "잘 다스리는 조정(朝廷)일지라도 이러한 징조가 생기면 악(惡)에 영합(迎合)해 국권을 도적질 할 것을 꾀하려는 자가 있고, 세력 있는 자에 아첨해 자기의 사리를 탐하려는 자가 있다"며 "전날의 복심이 변해 오늘의 도적이 되고, 전날의 이목이 오늘의 눈가림이 되고, 멸망의 사태가 당도하게 된다"고 경계했다.
인사행정의 중요성은 퇴계가 올린 다른 상소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무진사직소'를 통해 인사행정의 실패를 바둑과 장기에 비유했다. "바둑과 장기는 한 수만 허투루 두면 전국(全局)을 패하게 된다. 하물며 임금이 즉위해 정사를 베푸는 마당에 사람을 잘못 뽑아 씀으로써 그 판이 지게 되는 것을 어찌 염려하지 않으십니까." 명종에게 올린 '무오사직소'에서는 맹자의 말을 인용해 "신하들이 입을 모아 추천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기용해서는 안 된다"고 인사검증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아울러 퇴계는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중요한 벼슬자리에 맡기는 것 뿐 아니라, 맡긴 이후에는 두 마음을 갖지 말고 믿음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오늘날 퇴계의 리더십 평가에서 주목받는 것 중 하나는 인적 네트워크다. 퇴계는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이 학식이 깊은 자들을 서로 사귀게 해 학문을 닦게끔 했다. 퇴계의 제자들이 또 다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며 그의 네트워크는 사후 영남학파라는 학파 형성의 기반이 된다.
수많은 선비들은 그의 깊은 학식뿐 아니라, 배려와 섬김에도 감명을 표했다. 다산 정약용은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선생의 덕은 높고 크다"고 언급했다. 퇴계는 선비를 존중했다.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자 했을 때는, 선비가 나아갈 길이 아니라며 찾아가지 않았고, 아들 뻘인 26세 연하의 고봉(高峰) 기대승과 서신을 통해 논쟁을 벌이면서도 예의를 갖췄다.
1558년 겨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는 막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으로부터 날카로운 질문을 받았다. 이후 퇴계는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논박을 듣고 잘못된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고쳐보았다."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학문하는 이를 존중했던 퇴계의 섬김 리더십이 도산서원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도록 한 셈이다.
1573년(선조6년) 선조는 흰 무지개가 해를 뚫는 이변을 직접 목격했다. 이는 보통 전쟁의 조짐으로 해석되곤 하는 일이다. 게다가 그해는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재이(災異)가 심했던 때다. 만인지상, 한 국가를 이끄는 리더는 이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선조는 조정의 신하부터 초야에 이르기까지 인재들에게 국난 극복을 위한 직언을 구했다. 1574년 우부승지로 재직하던 율곡 이이가 이 같은 구언교(求言敎)에 따라 올린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언봉사'다.
율곡은 평소 통치자가 솔선수범함으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자율성을 제고하는 왕도정치를 지향했다. 율곡의 만언봉사도 마찬가지로 리더로서의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 정치사회풍습 중 잘못된 부분 7가지를 꼽고 "때에 맞춰 변법(變法)하는 것이 영원불멸의 도"라는 정자의 말을 인용해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선조는 이 소를 보고 감동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실용을 강조한 율곡은 상소에서도 "실공이란 일을 하는데 성의가 있고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며 "자사는 '성실하지 못하면 사물이 성립될 수 없다'고 했고 맹자는 '성실이 감동시키지 못할 것은 없다'고 했다"고 전한다.
특히 상하(上下)의 신뢰, 관리들의 책임 소재와 책임감, 경연(經筵)의 운영, 인재 등용, 재해 대책, 백성의 복리 증진, 인심의 교화에 있어 실(實)이 없음을 지적하고, 수신(修身)의 요체로 분발ㆍ학문ㆍ공정, 어진 선비를 가까이 함, 안민(安民)의 요체로 개방적인 의견 수렴ㆍ공안(貢案)의 개혁ㆍ사치풍조 개혁ㆍ선상제도(選上制度)의 개선ㆍ군정(軍政) 개혁 등을 주장했다.
율곡은 "임금과 신하의 교제는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는 것과 같다. 밝은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만나 마음이 맞게 된 뒤에야 말이 시행되고 계책이 쓰여 여러 업적이 이뤄진다"고 군신 간 신뢰를 강조했다. 또한 "신하들이 새로운 정책을 건의해 시행하기는 커녕, 두려워하고 꺼리고만 있다"며 "대관은 위에서 유유자적하며 앞뒤 눈치보기에 힘쓰고 벼슬아치들은 자신이 관장할 일을 모르고 날을 보내고 달을 채우며 승진만 기다린다"고 본분을 다하지 않는 이들을 꼬집었다. 아울러 "지금 시신(侍臣)들은 학문이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해 입시를 꺼리는 자가 있는가하면 경연직을 기피하기도 한다"며 나라를 이끄는 리더들이 배움에 충실하지 않음에 우려를 표했다.
율곡은 모든 정치가 백성을 위한 애민으로 부터 시작해 끝나야 함도 강조했다. 율곡은 "법령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그 피해는 백성에게 돌아간다. 정책을 마련해 폐단을 잡는것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길"이라며 "임금과 신하들의 직책이 오로지 민생을 위하는 것임을 알았던 이가 몇이나 있냐"고 반문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며 "병이 위중한 지경이라해도 신의라면 이를 고칠 수 있고,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도 명철한 임금이라면 부흥시킬 수 있다. 나라를 떨쳐 일으킬 방법을 생각할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율곡은 선조에게 "낡은 견해를 씻어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고 큰 뜻을 펼쳐라"며 "사심과 방심을 극복하고 의관은 바로 하라. 높은 곳을 바라보고, 노여움과 기쁨은 신중히 하고, 명령은 부드럽게 하라"고 강조했다. 인재 선택에 있어서도 "한 세상의 인물을 철저히 선발하되 출신성분을 따지지 마라"며 "널리 묻고 정밀히 골라 합당한 이를 얻을 것"을 조언했다. 이는 현대 경영이 지향하는 능력주의, 차별 없는 고용과도 일맥상통한다. 수백년전 율곡이 먼저 꿰뚫어본 셈이다.
율곡은 만언봉사를 통해 선조에게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선조에게 "명철하심은 부족함이 없으나 지닌 덕은 넓지 못하고 선을 좋아하시나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며 "명을 내릴 때 말씀에 감정이 섞여있고 호불호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좋은 말을 올려도 이를 택하지 않으면 그 말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며 단점을 고칠 것을 당부했다.
(도움말:현대경제연구원)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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