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의 주요기능은 기본적으로는 향교와 동일하게 교육기능과 교화기능이 있었다.
먼저 교육기능에 대해서 살펴보면, 서원에 있어서의 교육의 목표는 성현을 본받고 관리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유생들은 다른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소학에서부터 시작하여 사서와 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를 마친 뒤 순차적으로 『가례(家禮)』, 『근사록(近思錄)』 등의 성리학서를 배우도록 하였다.
정치적 탄압으로 중앙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의 서원교육에서 특히 중요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학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뒤 훈구파의 몰락에 이어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과거준비를 위한 교육도 동시에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결국 서원에서의 유교교육은 일차적으로는 이른바 도학(道學)으로서의 유교공부였으며, 다음으로는 과거에 응시하는데 필요한 사장학적(詞章學的)인 내용도 교육의 대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의 특징으로 많은 유교관련서적의 구비를 들 수 있다.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면 국가에서 공적으로 인쇄한 서적을 배부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던 이외에도 향교에 비해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했던 서원에서는 독자적으로도 재정을 마련하여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각종의 유교관련 서적들을 구입 비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체적 연구를 통하여 나온 각종 저술들을 출판하였기 때문에 서원의 보유장서수는 대체적으로 향교에 비하여 우세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도서의 개별적 구입이 어려웠던 향촌사회에서 서원은 지방 유림들에게 풍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도서관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서원의 또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인 교화기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제사의 대상인물에 있어서는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차이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文廟)에 배향된 인물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과 십철(十哲), 그리고 우리 나라 18현 및 송대의 6현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상 대부분 문중에 의해 건립되었던 까닭에 자신의 문중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인물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물론 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황과 송시열(宋時烈), 이이 등의 인물을 배향한 서원이 가장 많았으나 배향인물의 선택 폭에 있어서는 국가에 의해 정해진 성균관과 향교에 비해 훨씬 넓었다. 초기에는 하나의 서원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 한 분을 선정하여 제사를 모셔왔으며, 그 이후에 또 다른 인물이 배출되면 제사 대상에 추가하곤 하였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며 서원의 질서가 문란해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 제사대상 인물에 대한 선정이 뚜렷한 기준도 없이 이루어지거나 심지어는 세력과시를 위한 목적으로 한 서원에서 수많은 인물을 동시에 제사지내는 등의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국립 교육기관과 마찬가지로 서원에서도 봄과 가을에 걸쳐 일년에 두 차례의 제사를 지냈다. 제사일은 성균관과 향교에서 봉행하는 석전(釋奠)에 비하여 그 격이 낮았던 관계로 그 날짜를 석전보다 뒤로 하였다. 즉, 석전이 상정일(上丁日)에 봉행되는 데 비하여 서원의 제사는 중정일(中丁日) 또는 하정일(下丁日)로 잡아 거행함으로써 그 격을 구분하였던 것이다.
제사 이외에 서원이 지니고 있었던 교화기능으로는 지방 풍속의 규찰(糾察)기능을 들 수 있다. 이같은 기능은 향교에도 있어왔지만 그 성격이나 내용으로 볼 때 서원의 규찰기능이 보다 실질적이고 강력한 형태로 나타났다.
서원에서는 그 지역의 여론을 이끌어 나갔음은 물론, 각 지방별로 설치된 향약을 기준으로 효자나 열녀 등을 표창하고 강상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자를 성토하는 등의 직접적인 교화활동을 하였다.
즉, 각 고을에 설치된 국가의 관부(官府)가 주로 형사(刑事)문제를 처리하였다면 서원에서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평가하고 처리해 나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후기에 들어서게 되면 경우에 따라 무고한 백성에 대한 탄압수단으로 악용되는 폐단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안동호 상류의 영지산 기슭에 자리잡은 도산서원. 안동댐이 완공되어 인근의 들판이 수몰되는 상황에서도 영지산 기슭의 도산서원은 수몰은 커녕, 안동댐을 굽어보는 천하명당의 배산임수 길지에 그 수세(水勢)가 한층더 강화되는 탁월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안동댐이 완공되기 약 400년 전의 일이다. ▲도산서원 들어가는 길
▲안동댐의 만수위에 대비하여 인위적으로 사적의 위치를 높혔다. ▲▼도산서원 전경
★★★★★ 조선시대 한 선비가 명망이 높았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을 찾아가 물었다. 선비가 다시 "××(남성의 성기)는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남명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들을 시켜 그를 내쫓았다. "○○는 걸어다닐 때 숨어 있는 것으로 보배처럼 귀하지만 살 수는 없는 것이고(步藏之者 而寶而不市者也), ××는 앉아있을 때 숨어 있는 것으로 사람을 찌르기는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坐藏之者 而刺而不兵者也)"는 답을 내놨다.
▲▼도산서원의 건립연대가1574년,퇴계 이황이 졸(卒) 한게 1570년. 그렇다면 퇴계생전에 도산서원이 이미 존재했거나, 후일을 위해 생전에 미리 현판을 써 두었다는 얘긴데...
▼陶山書院이라는 편액은 한석봉이 썼다네요.
▲고사목을 담쟁이 덩굴이 뒤덮고 있고 거기에 능소화가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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