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만을 걷다 이황이 출사하던 시대는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불과 12세의 동생 명종이 왕위에 올랐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대윤 소윤 간의 갈등과 정파 논쟁, 무고와 사화로 많은 신료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유명한 을사사화였다. 그 여파로 대윤이 몰락하고 5∼6년 이상에 걸쳐 복수와 형벌이 계속됐는데, 죽은 자가 1백여 명에 달했다. 사대부들은 어느 쪽에 줄을 대야 살아남을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백성의 안녕이나 국방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 때문에 양재역에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벽서가 나붙고 그를 계기로 옥사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어수선했다. 국내적으로는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1559년에서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탐관오리를 죽이는 등 횡행했고, 밖으로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오던 왜인이 1555년 배 60여 척으로 전라도에 침입해 영암·장흥·진도 등을 유린하는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발생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퇴계는 조정에 출사한 나머지 대부분을 향리에 머물며 자신을 닦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가 청렴하고 덕을 세우며 중도를 지키는 인물이었음은 명종이나 관료들은 물론 백성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명종이나 조정의 백관들이 그를 불러내자고 입을 모았으나 그는 병을 핑계 삼아 늙었고 재지(才智)가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다며 갖은 직분을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고야 말았다. 이황은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지키면서 남의 조롱이나 비웃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상한 뜻과 차분한 마음으로 정도만 걸었다. 그가 벼슬을 한 것도 늙은 어머니를 위해 과거를 본 것일뿐, 그것으로 이름을 날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욕의 삶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학문의 열정과 선비의 절도 퇴계는 아무런 욕심도 없었고 앞에서 잘난 체하는 일이나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세 들어 살 때 이웃집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 뻗쳐 있어 다 익은 알밤이 뜰에 떨어지곤 했는데 집안 아이들이 그걸 주워 먹을까봐 뜰에 나가 담 너머로 밤을 던져 넣었을 정도로 절제와 정도의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여느 사람에 비해 튀거나 유별을 떨지도 않았다.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해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그리고 도를 어느 정도 깨닫자 더욱 겸손해져서 배우려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며, 있는 체 아는 체를 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갈고 닦으니 그로부터 학문하는 분위기가 새로워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겸손해 특별한 저서를 쓰려 하지 않고, 학문을 강론하고 익힌 것을 가르치며 이단(異端)을 분별했는데, 논리가 정연하고 명백해 학자들이 믿고 따랐다. 그는 심한 소화불량과 안질 등으로 고생했는데, 그럼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을 만큼 열정적인 학구열을 보였으며, 청빈해서 군수직을 그만둘 때는 책 꾸러미 몇 개만 갖고 돌아갔다고 전할 정도였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이가 많아도 보통 때는 별다르게 내세우는 바가 없어 백성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을 정도로 평범하게 살았다. 그러나 물러섬과 나아감에는 원칙과 절도를 지켜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니 모두의 우러름을 받았다.
교육자·공직자로서의 올곧음 퇴계는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호조좌랑, 정언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이전에 그는 권력의 실세인 김안로가 만나고자 했으나 선비가 나갈 길이 아니라며 권력자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에 김안로는 앙심을 품고 그의 승진을 가로막아 시련을 맞기도 했다. 1542년에는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민심을 살폈다. 조정에 돌아와 그는 임금에게 백성의 구제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조언을 올리는가 하면 왜구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책을 제시해 외교문제를 원칙과 현실의 조화로 해결하려는 탁월한 외교적 역량을 발휘했다. 을사사화 때 권신에게 밉보여 관직이 삭탈됐으나 죄 없는 사람을 벌 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어나 곧 복직됐다. 48세, 49세 사이의 2년은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외직에 나가 있었는데 이때 단양군수로 부임해 다스리는 일이 맑고 간결했으며 아전이나 백성들을 모두 편안하게 해줬다. 형이 충청감사로 부임하자 그는 풍기군수로 전임됐다. 이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의 편액과 서적을 청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그는 천민이던 야공(대장장이)까지 가르쳐 시대를 뛰어넘는 교육자 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52세 때 다시 조정에 나와 홍문관 교리로 경연에서 임금을 모시고 강의했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다. 그후 명종이 21세가 되자 수렴청정하는 문정왕후에게 임금에게 정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교서를 올려 문정왕후를 놀라게 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충언이었다. 그는 명종 사후 선조에게 정치의 기본 원리와 당면과제인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선조를 위해 자신의 평생 학문의 진수를 집약한 성학십도를 올렸다. 이 두 가지는 퇴계의 사상과 정치철학을 한눈에 보여주는 진수다. 선조는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항상 음미할 수 있게 할 만큼 그를 신뢰했다. 그는 임금에게 “나라는 항상 위난에 방비함이 있어야 하고, 스스로 겸허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임금의 요청에 따라 이응경과 기대승을 천거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