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를 다시 생각함
'일'은 고통이었다. 격무에 시달린다며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한 것이 몇 년 전이다. 실제 힘든 일도 많다. 그런데 그런 일은 모두 '남'이 하고 있다. 소위 3D 업종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맡고 있고 식당 주방일 같은 허드렛일도 동포들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일은 정말 고통일까. 왜 그런 고통의 상징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온 나라가 난리일까.
2009년 봄, 우리의 화두는 '일'이다. 구조조정으로 일을 잃게 된 사람, 일터가 사라져 거리에 나앉게 된 가장, 일이 없어 졸업과 동시에 실업자가 된 대학생이 주변에 가득하다. 그들을 위해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며 신문과 방송이 나서면서 전국에 '일자리 수배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일을 고통으로 여기는 한 이 화두는 풀 방법이 없다. 정책 당국자는 물론 개인들도 이번 기회에 도대체 일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실업 문제의 해결책으로 일자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일자리와 취업은 같은 말이 아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모두가 실업자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매달 수천 만원대의 이자 소득으로 풍요롭게 살지만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우리가 걱정해야 할 실업자가 아니다. 반대로 일이 너무나 많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하는데 버는 돈은 최저 생계비를 밑도는 수준이라면 그는 안정적인 취업자라고 할 수 없다. 일할 능력은 있는데 생계가 막막한 67세 노인의 실업은 나이 때문에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만들지 않아도 되는가.
과거로 돌아가 보자. 500년 전쯤인 조선 중엽에 살던 한 농부는 취업자인가, 아닌가. 또 200년 뒤쯤, 즉 2200년대에는 지금의 일자리가 과연 그대로 있을까. 과거부터 현재까지 일자리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전업 주부의 경우는 미래에 어떤 대우를 받게 될까.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면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내려는 일자리라는 것이 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돈'이 생기는 자리만 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돼 있다. 공공 인턴이 된 대학생들이 할 일이 없어 놀고, 공무원들은 그들에게 시킬 일이 없어 귀찮아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자리가 화두가 되면서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백가쟁명 식으로 나라를 달구고 있다. 일자리를 줄이지 않으면 세무 조사를 면제해 준다고 하는 정부의 정책 지원도 있고 대졸 초임을 깎아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까지 쏟아지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생각해야 하는 정부나 언론, 그리고 큰 기업들로서는 당연히 가져야 할 관심이지만 여기에도 미묘한 문제가 있다. 잡 셰어링의 경우와 같이 자기 일자리를 나눠 줘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달가운 일이 절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일에 대한 개인들의 생각이나 철학을 정립하는 노력이 동시에 경주되지 않으면 일자리 창출 노력은 하나의 거대한 이벤트로 끝날지도 모른다.
현대인은 일을 자기와 동일시하면서 정체성을 찾는다. '명함'과 '자리'가 중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일자리는 행복을 찾는 과정으로서 이해돼야 한다. '일의 철학' 같은 큰 얘기가 나와야 할 시점이 됐다.
스포츠에서 배울 것들
리더십은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해야 잘 먹힌다. 예전에는 주로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예화의 중심이었고 20세기 들어서는 기업인들이 주인공이 돼 왔다. 요즘에는 스포츠 감독들이 리더십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운동경기를 예로 들면 누구라도 관심있어 하고 설명하기도 쉽다. 실제 그 주인공이 놀라운 성적을 올리는 것을 TV 등을 통해서라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리더십 비결에 대한 공감대도 금방 형성된다. 경쟁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도 스포츠의 덕목이다.
스포츠 리더십이 수용성이 높은 것은 그러나 유행을 타거나 쉬워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스포츠에서 필요한 지도력이 요즘 기업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제로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기업들이 당면한 문제는 바로 높아지는 이동성(mobility)이다. 평생직장이 회사로서나 개인으로서나 부담스러운 개념이 되면서 요즘 직장사회는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 됐다. 당연히 스포츠팀에서 배울 게 많아졌다. '지금 있는 곳에서도 열심히 하지만, 언제든 더 나은 곳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프로 스포츠팀 아닌가. 이동성을 인정하는 바탕에서 단기는 물론 중장기 성과를 모두 올려야 하는 것이 감독들의 미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리더십은 이제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 오히려 기업에서 더 자주 활용해야 할 분야라고 봐야 한다.
피터 드러커는 현대에 필요한 리더십을 얘기하면서 '전쟁터의 보초' 비유를 자주 들었다. 고립된 전장에서 한 부대가 밤을 보낼 때 이 부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불침번을 서는 보초다. 계급에 상관없이 시장과 고객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다. 그것이 스포츠팀에서는 바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이다.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보초처럼, 스스로 알아서 최선의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직원을 훈련해야 변화 빠른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은 축구대표선수들의 기초체력을 길렀고, 김경문 감독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심었고, 김인식 감독은 애국심을 강조했다. "국가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는 그의 비장한 출사표는 이번 WBC 야구팀을 이끈 화두였다. 그런 사명감의 바탕 위에 승리의 신명과 자신감이 더해지면서 놀라운 성적이 나오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 우리를 달래주는 역할을 스포츠가 해 왔다. 해답없는 경제 리더십, 악순환의 정치 리더십과 달리 스포츠 리더십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스포츠에서 진정으로 배울 점은 어쩌면 이런 흥분 아닐까. 지나친 흥분은 문제지만 집중력을 동반한 흥분은 상대의 기를 꺾는다. 우리 기업, 그리고 수많은 경제인들이 지금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흥분이라는 에너지다. 지금 용기를 내면 내가 1등 할 수도 있다고, 새로운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고 돈키호테처럼 흥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필부필녀들이 스스로 흥분해서 고민하고 투자하고 살아남을려고 각자 애쓸 때 경제가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쩌면 정부나 정치의 역할은 선수를 믿고 그들이 알아서 뛰게 만드는 감독이거나, 게임의 규칙을 지키는 심판이거나, 아니면 그냥 목놓아 이기라고 외치는 관중 정도에 그쳐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회사 망치는 구조조정
구조조정은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단어로 다가온다. 칼이 연상되고 누군가의 피를 부르는 것 같아서다. 실제 구조조정 과정에서 명예퇴직이나 감원, 해고 등이 수반되긴 하지만 구조조정이 꼭 인력 감축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글자 그대로 보면 회사나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업구조를 재정비하는 것이 구조조정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성장 동력에 인력과 자원을 집중하고 비교적 저성장 분야에는 반대로 투입을 줄여 발전 가능성을 높이는 데 방향을 맞추는 것이다.
구조조정이 감원을 포함한 축소지향 활동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경영 파탄으로 위기에 몰린 기업이 정부나 금융권으로부터 할 수 없이 구조조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는 부채탕감이나 이자유예 등을 이유로 축소지향의 구조조정 방향이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특수한' 구조조정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데 있다. 그 정도의 위기에 몰리지 않는 기업들까지 마치 구조조정이라면 당연히 사람을 줄이고 신규사업을 포기하고 연구개발(R&D) 자금을 삭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믿게 된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흐름 같아 보인다.
회사 사회에서 이런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관리나 재무 부서가 구조조정을 주도하는 탓이 가장 크다. 피터 드러커 박사의 통찰력을 빌려 말하면 이런 부서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선(善)한 활동'이라고 믿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가 있다. 부채비율을 줄이고,투자수익이 적은 부분에서 철수하고,신규채용을 억제하고,회사를 나가는 고액 연봉자도 말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의 수지개선에 모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조정은 곧 한계를 드러내게 돼 있다. 시장을 상대로 한 기업은 시장의 역동성보다 앞서가기는 어렵지만 한참 뒤져서는 안 된다. 자원배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오판을 생각해보자. 앞으로 2~3년은 수익을 못 내지만 4~5년 뒤에는 급격히 커질 가능성이 높은 비즈니스에 5억원의 신규 투자자금이 필요하고,서서히 죽어가지만 매년 이익을 내고 있는 부문에 통상 예산 100억원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결론은? 당연히 5억원의 신규투자자금이 중지된다. 또 하나 인력문제를 보자. 능력 있는 억대 연봉자를 내보낼 것인가,3000만원짜리 젊은 사원을 내보낼 것인가. 당연히 억대 연봉자를 밀어낸다. 나이도 많으니 명분도 좋다.
두 가지 조치의 공통점은 모두 현재에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는 선택을 기업들이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미래청사진을 짜는 거창한 활동이 돼야 한다. 이왕이면 잘될 것을 찾아 모험투자하는 것이 훨씬 나은 판단이다. 구조조정은 미래를 위한 활동이어야 하지,현재에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연초 많은 회사들이 구조조정 방향을 잡고 있지만 임금 삭감 등 벌써부터 현재에 살아남기 위한 활동 중심으로 흐르는 듯이 보인다. 그것이 전부면 나라에도 희망이 없다. 5년간 민간의 90조원 투자를 기대하고 만든 정부의 '신성장동력 추진 전략'도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더 기업이라면 나라의 미래도 책임져야 한다.
마시멜로라는 화두
불안감. 2009년 한국 사회를 누르고 있는 회색 덩어리는 바로 이것이다. 회사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번에 나갈 사람이 하필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까딱하다간 내가 파산할 수도 있다는 스트레스가 사회를 휘감고 있다.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하니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산란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별 영향을 못 느끼는 사람도 이런 분위기를 실감할 날이 머잖았음을 잘 알고 있다. 거리엔 취객이 줄었고 시장엔 상인들이 더 많다.
이 불안감을 월급쟁이들이 떨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야 외식 줄이고, 걸어다니고, 절약하는 방법뿐이다. 집값도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빚은 더 늘었으니 이런 방식으로 고통의 다리를 건널 수 있어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뼈빠지게 일한 결과가 이것뿐이라니. 절망감도 깊어간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고 있고 '할 수 없이' 선택하는 내핍이 사실은 우리의 성장 원천이었다. 지난주 방한했던 호아킴 데 포사다 박사가 전한 메시지도 그것이다. 한국에서만 350만부가 팔린 최고의 자기계발서 '마시멜로 이야기'의 저자인 그는 우리 부모들이 선택했던 내핍이 바로 한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개인들은 돈을 벌어 열심히 저축했고, 회사들도 다시 새로운 비즈니스에 투자했다.
마시멜로의 모티브는 스탠퍼드대학에서 열린 심리학 실험에서 나왔다. 4살짜리 아이에게 달콤한 마시멜로를 주고 15분만 참으면 하나 더 주겠다고 했을 때 600명 아이 가운데 400명이 참지못하고 먹어치웠다는 것이 마시멜로 실험의 골자였다. 15년 뒤 추적조사를 해봤더니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들이 모두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 뒷 얘기다. 다 먹어치우지 않고, 미래를 위해 지금의 유혹을 늦출 줄 아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가장 원초적인 비결이라는 것이 포사다 박사의 메시지였다.
이 단순하고도 평범한 얘기가 세계적인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오히려 그 평범함의 가치가 새롭게 빛을 발할 정도로 세상이 바뀐 것은 아닐까. 포사다 박사는 "이렇게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자기 규율을 갖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크게 성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시멜로라는 화두는 회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인터넷과 이를 통해 더욱 가속화되는 글로벌 환경에서 과거의 대기업들이 기회를 눈뜨고 놓치고 신생업체들이 기회를 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업들이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눈앞의 마시멜로를 다 먹어치운 것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선진국 문턱에서만 20여년, 우리는 미래를 위해 남겨둔 마시멜로가 하나도 없었던 건 아닐까.
'마시멜로 이야기'에 담긴 유명한 얘기.
"아프리카에선 매일 아침 가젤이 잠을 깬다. 가젤은 제일 빠른 사자보다 더 빨리 달려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매일 아침 사자도 잠이 깬다. 사자는 제일 느린 가젤보다 빨리 달려야 굶어죽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가젤이건 사자건 아침에 해가 뜨면 달려야 한다. "
잘 사는 사람이건 못 사는 사람이건 달려야 한다. 생존이 최고의 가치인 시대, 생존할 수 있어야 성공 가능성이 남는 시대를 우리는 산다.
리스타트하라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모두 틀릴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니그로폰테 미 MIT미디어랩 회장)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절감하지 못했을 뿐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다.
최근에 간 결혼식장이나 상가집을 생각해보라. 과거엔 친척이거나 회사 동료가 아니면 절친한 친구의 애경사만 챙겨도 됐다. 요즘은 e메일로 또 문자로 소식이 전해진다. 얼굴도 모르는 학교 동창, 군대 동기가 독촉 문자까지 보낸다.
기업에서 중시하는 고객들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라.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소비자들이 엄청나게 늘었다. 싸고 품질 좋은 것을 전혀 따지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졌는가. 10대들이 휴대폰을 바꾸는 것은 통화가 잘 안되거나 기계가 고장나서가 아니라 '더 새로운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소비자들이 훨씬 영악해진 측면도 있다. 상품안내서를 프린트해와 "더 싸게 주면 사겠다"는 이들에게 호객행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구매를 자극하는 것은 어쩌면 가격도 품질도 아닐지 모른다. 소비자들 스스로도 그 속도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도 무엇을 만들어내야 할지 알수가 없다.
쌀이 없어 먹던 맛없는 보리밥이 웰빙식품이 되고, 날씬한 것이 부자의 상징이 되고, 성형수술한 것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시대가 됐다. 너무 빨리 변해서 그 변화를 감지 못할 뿐 지금의 세상은 20년 전과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왜 20년 전과 비교했을까. 영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팀 버너스 리가 군사적 목적으로 쓰이던 인터넷을 대중화한 것이 바로 1990년이다. 인터넷은 기업과 소비자의 관계,소비자 끼리의 관계,그리고 심지어 국가와 국민의 관계까지 바꿔놓았다. 지난해 100일 넘게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과거에는 상상 못하던 방식으로 시위참가자들이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극명한 사례였다. 어떤 노련한 정부 당국자가 그 집회가 100일 넘게 갈 것으로 예상이나 했단 말인가.
특히 경제위기 상황이 펼쳐지면서 우리가 아는 상식들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집을 사는 것이 꿈이 아니라 모험이 됐다. 집을 사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안전한 투자가 된 자산가치하락의 시대는 우리에겐 첫 경험이다. 경제위기 시대에는 부자가 고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별장을 지으려던 부자는 자산가치하락이 즐거울 뿐이다. 가격이 떨어지는 시장에서 고생해서 직접 별장을 짓는 부자는 사라진다.
이렇게 모든 방면에서 고객이 달라지고 시장이 바뀌고 경쟁양상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바뀐 시장을 차지한 것은 대부분 새로운 진입자(new comer)였다. 왜 그랬을까? 참고할 과거가 없어서 그랬다. 과거가 없으니 아는 것도 없고,새로운 시장 속으로 들어가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회사 전 부분을 마치 컴퓨터를 다시 켜듯이 리스타트(restart)해야 한다. 그리곤 이제 시작하는 벤처처럼,계좌를 처음 개설한 초보 투자자처럼,정권을 막잡은 인수위원회처럼,갓 선임돼 자리에 앉은 신임 사장처럼 일하면 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을 때 기회가 올 것이다.
새로운 경쟁이 온다
혁신에도 단계가 있다. 가장 낮은 것이 생산혁신이다. 그 다음이 상품·서비스 혁신, 그리고 그 위에 전략혁신이 있다. 최고의 단계는 경영모델 그 자체를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경영혁신이다.
생산혁신과 상품·서비스 혁신은 IT(정보기술)의 발달로 그 비결이 금방 알려지고 쉽게 모방되기 때문에 경쟁우위 확보가 어렵다.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전략혁신도 독점적인 우위를 유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월마트도 사우스웨스트도 델컴퓨터도 비슷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후발주자들을 막을 방법이 적었다.
최고의 경영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는 게리 해멀은 "경영 모델 자체를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경영혁신이라야 궁극적인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과거의 경영원칙을 절대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경영모델은 어지간해선 모방되지 않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새로 낸 '경영의 미래'에서 20세기형 경영모델을 고집하는 회사는 모든 전제가 바뀐 21세기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보면 1960년대 이후 30여년간 인류사에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룬 우리 경제가 1990년대 이후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영모델 자체에 대해서는 별 반성없이 낮은 단계의 혁신에 매달린 데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촛불집회에서 보듯 정부가 법의 권위를 갖고 정한 일이 국민들의 마음을 잡지 못하면 실행하기 어렵게 된 것도 나라 경영 모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성과를 올린 거대기업도 국가차원의 금융위기가 오면 결국 정부와 은행 앞으로 끌려와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것 역시 경영 방식 그 자체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현대적 경영 모델이 만들어진 것은 20세기 들면서다. 헨리 포드 같은 이들이 고안해낸 관리와 통제 시스템이 100년 가까이 위력을 발휘해오고 있는 것이다. 상사가 명령을 내리고 부하는 이를 실행에 옮기고 하는 것이 골자다. 종업원들은 위에서 내려오는 목표를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 그 사이 파트너십 아웃소싱 인센티브 등 조직을 유연하게 하려는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위에서 아래로'라는 골자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IT벤처붐이 일면서 새로운 경영모델이 나타날 조짐이 보였고 기존의 기업과는 전혀 다른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의 모델을 적용하는 구글 같은 기업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2008년은 전 세계가 무력감에 빠진 한 해였다. 열심히 노력해도 세계적인 금융위기 앞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현실에서 경제시스템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도 들었던 시기였다.
올해는 새로운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원자재와 시장을 놓고 싸우는 구식 경쟁뿐만 아니라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새 모델을 만들어내려는 경영혁신 경쟁까지,전세계의 나라와 기업이 뛰어드는 대회전이 벌어질 게 분명해 보인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로, 근본적인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새해 첫날이 되시길!
대담하거나, 깐깐하거나
합리성을 중시하는 경영에도 인간적인 면이 있다. 최고경영자(CEO)의 스타일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 세월이 더해지면 사풍 혹은 기업 문화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전산화되면서 경영이 숫자만 대입하면 답이 나오는 자동 시스템처럼 보이지만,같은 조건에서도 성공하는 회사가 있고 망하는 기업이 분명히 있다. 경영 능력이 문제이기도 하지만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다. 성격이 급한 사장이 지휘하는 회사는 덤벙대다 실수하는 경우가 많고,까탈스러운 회장이 간섭을 많이 하는 대기업 그룹은 모든 면에서 칼바람이 분다.
이런 스타일 차이는 평소에는 티가 안 난다. 그러나 위기 시대에는 존망을 가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경제위기 시대를 건너기 위해선 어떤 스타일을 갖춰야 할까. 우선 큰 방향을 얘기하면 대담하거나 혹은 깐깐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방향을 택해야 한다. 큰 꿈을 갖고 도전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현금 확보를 목표로 최대한 몸을 낮춰야 한다는 얘기다. 어느 쪽도 확실치 않게 어정쩡하게 가다간 훗날도 도모하지 못하고 고생만 할 가능성이 높다.
대담한 방향은 큰 목표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위험보다는 기회를 더 높이 보고 도전적인 과제를 정해 달려드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남들이 사람을 줄일 때 더 많이 뽑고,국내로 돌아올 때 해외로 나가며,지금이 아니라 5년 뒤를 목표로 투자하는 회사들이 이쪽이다. 크게 성공할 가능성이 있지만 한번에 망하기도 한다.
깐깐한 스타일은 철저히 보수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을 뜻한다. 외환위기 이후 인수 · 합병 기회를 잡은 기업의 상당수는 그 이전에는 한푼 한푼을 철저히 따지며 현금을 많이 확보했던 회사들이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자세로 투자를 게을리하다간 큰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다.
이 두 방향 중 어떤 것이 나을까. 결국 회사 스타일에 따라 갈리겠지만 굳이 택하자면 대담해지는 것이 낫다.
"기가 약한 사람보다는 장비처럼 기가 센 사람을 가르치기가 쉽다. 기가 넘치면 잘라 줄 수 있지만 모자라면 도와줄 방법이 없다. "
율곡 선생의 이 말은 회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뭔가 새 일을 자꾸 벌이려는 회사에는 기회가 생기지만 움츠리고 있는 조직에는 부정적 에너지가 훨씬 빨리 퍼진다. 대담한 모험을 벌이는 것이 너무 위험스러워 보이면 도전을 위한 작은 회사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사내 벤처가 이때 도입하기 가장 좋은 제도이다.
모두가 경제 위기에 강타당했다가 이제 서서히 나름의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하는 때가 됐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방향성이다. 대담하거나 깐깐하거나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하지만,정부를 포함해 영향력이 큰 회사들은 이왕이면 대담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래야 투자가 늘고 일자리가 생기고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당시 조그만 회사에 불과했던 일본의 마쓰시타가 1932년 발표한 장기 계획은 무려 250년짜리였다. 구조조정도 깐깐하게 못 하면서,내년은 물론 올해 계획도 제대로 결정 짓지 못하는 회사들이 대부분이라면 우리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살아 남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리더와 조직들은 의미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리스크를 보는 다른 방법
리스크(risk)는 사실 '위험'이라고 번역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불확실성에 더 가깝다. 불확실성이라고 번역할 때와 위험이라고 번역할 때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불확실성은 어쩌면 좋은 사업기회다. 그 가능성을 높이 보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크게 망하든 크게 흥하든 도전하는 자의 몫이다. 그러나 위험이라고 하면 도전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요, 나쁜 일로 여겨지는 문제점이 있다.
지금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금융위기를 리스크와 관련해서 생각해보자. 앞으로 투자를 포함한 경영활동이 위험회피(risk averse)적이 될까, 아니면 위험감수(risk taking) 분위기가 생길까. 당연히 위험회피적인 풍토가 번지게 돼 있다. 은행,기업은 물론 나라 차원에서 큰 낭패를 본 뒤라 극도의 위험회피 경제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 경제위기가 바닥을 치고 급하게 솟구치는 V자형이나 완만하게라도 고개를 드는 U자형이 아니라 불황이 지리하게 계속되는 L자형이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내적으로 보더라도 위험회피적인 풍토가 이미 번져가고 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다그쳐도 은행이 꿈쩍도 않는 것이나,어쩌다 대출을 해줘도 기술신보 같은 곳이 전액보증을 서도록 하는 것은 극심한 위험회피에 다름 아니다.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는 것, 신규채용을 줄이는 것, 인력구조조정에 나서는 것이 모두 위험회피의 결과인 것이다.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은 절대 벌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위험회피는 그 본질상 손실을 피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그 밑바탕에 있다. 그러나 예상되는 손실보다 훨씬 많은 이득이 보이면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리스크'의 저자 피터 번스타인은 "위험감수야말로 현대 서구사회를 이끌어가는 기폭제"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각종 제한이 풀리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아지는 지금이야말로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못하고 있으니 투자하면 앞설 것이요, 남들이 채용을 줄이는 지금이 인재 뽑기에는 최고의 타이밍이며, 다른 은행들이 안 빌려주고 있으니 지금이 평생단골을 잡을 수 있는 적기라는 생각들을 해야 한다. 망하는 회사가 많으니 오히려 창업하기엔 좋은 시절이라고 기뻐해야 옳다. 이런 것은 역발상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이다. 원래 리스크란 말 자체가 '뱃심좋게 도전하다'의 뜻을 가진 초기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단어라고 한다.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리스크에서 기회와 도전거리와 밝은 미래를 찾아낼 수 있는 경제인들이 많아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불황의 터널이 끝날 때면 이전에는 눈에도 띄지 않던 나라나 기업이나 개인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도 위험감수적인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쓸 돈을 나눠주는 감세도 중요하지만, 창업자금을 풀어 새로운 기회를 주는 조치도 시급해 보인다. "사기꾼들만 타간다""옥석을 가려야 한다" 등의 위험회피적 염려들은 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보일 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009 경영화두
지난 7∼9일 두바이에선 의미 있는 국제행사가 열렸다.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이 주최한 제1회 '글로벌 아젠다 정상회의(Summit on the Global Agenda)'. 60여개국에서 750여명의 석학과 전문가들이 모였다. 한국에서도 조동성 서울대 교수,김현종 주유엔 대사 등 12명이 참여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신뢰와 지속가능성,그리고 책임감과 윤리적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세계 운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세계를 지탱해온 논리와 엔진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석학들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별 수 없이 내린 진단은 결국 이 한마디였다.
새해를 앞두고 많은 기업과 기관에서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고 아우성들이다. 원자재값,환율,금리,성장률 등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전망하기 어려워서다. 구체적인 지표는 말할 것도 없고 도대체 내년의 키워드 혹은 화두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예년 같으면 이럴 때 권위있는 국제포럼이나 국제기구의 전망보고서에 의지하겠지만 그 역시 올해는 정답 비슷한 것을 주는 곳이 적다. 다보스포럼조차 내년 1월 열릴 포럼의 경우 새로운 화두가 아니라 '경제위기 이후의 세계 질서 구축(Shaping the post-crisis world)'이라는 논의 과제를 주제로 정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내년에 좌표 없는 경영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요즘 경영자들의 고민인 것이다. 세계적인 포럼이나 예측기관의 리포트들을 참조해 정리해보면 "2009년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비즈니스에서도 변화된 세계에 적응하는 한 해가 될 것"('이코노미스트 세계대전망')임은 분명해 보인다. 변화된 세계의 모습은 불황,파산,생존,불신풍조,실업률 증가,규제강화,보호무역 등 기업을 억누르는 단어들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기업들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민첩성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리먼브러더스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서브프라임 위기라는 경고가 수개월간 계속됐는 데도 결국 대응하지 못한 것은 민첩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민첩성과 더불어 유연성도 새롭게 강조돼야 한다. 전통적인 고객기반이 붕괴되면 다른 업종이나 지역의 새로운 요구에도 응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공공부문과 경쟁할 수도 있는 것이고,중국이나 인도가 차지하고 있는 부문의 서비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업종의 카테고리를 깨고 퓨전형 경영을 할 수 있는 회사나 기관이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
신용과 신뢰라는 자산축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내년의 중요한 과제다. 회사나 개인이나 현금확보의 중요성을 절감해야 하는 것이 2009년이다. 이 밖에도 기후변화,에너지 문제,물부족 등 모든 기업과는 꼭 관련이 없다고 여겨져온 분야도 경영에 반드시 참조해야 할 화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희랍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실감할수 있는 해가 코 앞에 왔다. '희망'이라는 코드를 놓지 않으면서 전 사원들에게 역발상의 혁신,새 시장 개척을 위한 도전을 강조하는 경영자가 더 많이 나타나야 한다. 한경 가치혁신연구소장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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