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 15년 동안 이런 인수인계는 처음
[아주 특별했던 점심 산책길] 일을 대하는 자세를 알려주고 떠난 상사23.01.02 11:17l최종 업데이트 23.01.02 11:17l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
직속 상사가 한 직급 승진하면서 업무 재배치로 인해 타 부서로 가게 됐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결과였으니 매우 기쁘셨을 것이다. 사정을 아는 나도 진심을 담아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곧이어 현실적인 문제가 따라왔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조금씩 직원을 줄이고 있다. 퇴직자가 있으면 결원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충원은 하지 않는 걸로 결정됐다. 남아 있는 직원들끼리의 업무 재배치와 겸직으로 업무 공백을 해결해야 한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그는 업무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익숙해지면 점점 괜찮아질 거야.' 다짐인지 바람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업무를 하나씩 배워갔다.
상사와의 점심 산책
▲ 점심시간 산책길 인수인계 일을 떠나 일에 대한 자세를 배운 특별한 인수인계 | |
ⓒ 박은정 | 관련사진보기 |
상사가 떠날 날이 불과 이틀, 사흘 정도 남은 어느 날이었다. 그가 불쑥 자신의 점심 산책길을 인수인계해 주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는 동료들과 식사 후 회사 근처를 가볍게 걷는 것이 나의 점심시간 일과였지만 그날은 상사를 따라나섰다.
먼저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이 부서에 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상사와 둘이 식사한 뒤, "산책 가실래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본부에서 이곳으로 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상사는 회사 근처를 잘 모르셨다. 보통 늦게 점심을 먹었고, 식사만 마치면 바로 사무실로 돌아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걷기를 즐기는데 이런 곳을 이제야 알았다며 좋아하셨다. 그날로부터 몇 달이 흐른 지금, 상사는 그 길에서 더 나아가 자신만의 산책 코스를 찾으신 거였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 밥 먹는데 20분 정도 걸렸으니 4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발걸음이 나보다 빠른 상사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궁금해 하며 따라 가보니, 회사 뒤 작은 산으로 오르는 길 입구가 나왔다. 낡은 계단을 부지런히 오르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지다 또 구부러지고 오르막길이 계속 나왔다. 처음 길을 따라나섰을 때 왠지 길이 눈에 익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내가 이 부서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지사 직원 전체가 단합대회 등산을 했던 코스였다.
그때만 해도 회사가 이렇게 어려워질 줄은 몰랐다. 회사 분위기도 직원들과의 관계도 봄처럼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그때의 우리가 웃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던 전망대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지친 발을 잠시 쉬고 계셨다.
몇 발걸음 앞서서 걸어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이정표 삼아 열심히 걸었다. 분명 한 번 와 본 길이지만 낯설었고 새로웠다. 그는 종종 돌아보며 나를 챙겼고, 혼자 올 때를 대비해 포인트를 짚어주기도 했다.
예전에 왔을 땐 흥겨운 기분으로 걸었는데, 이번엔 조금 쓸쓸했다. 마치 지금 나의 상황 같았다. 회사는 추운 겨울에 접어들었고, 유일한 길잡이가 떠나면 이 길을 혼자 걸어야 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새로운 일들과 부딪혀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30분 만에 왕복할 수 있는 편한 코스라던 설명과는 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오래전 골절상을 입어서 많이 걸으면 아픈 발목이 조금씩 아려오기 시작했다. '왕복 30분이 가능한 건가? 언제 반환점을 돌 건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의구심이 뭉게뭉게 커지던 순간, 정말로 완만한 산길이 나타났다. 길이 편해지자 점점 간격이 벌어지던 우리의 거리도 어느새 좁혀졌다. 드디어 산책을 끝내고 돌아갈 반환점에 다다랐다. 우리의 점심시간도, 인수인계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오느라 고생했다'라는 표정으로 "돌아갑시다"라고 했다. 반환점에 서서 느낀 것은, 정상에 올랐을 때의 성취감도, 가슴이 탁 트이는 상쾌함도 아니었다. 이제 이 길을 내 발로 한 번 걸어보았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는 것은 처음 길을 나설 때와 비교해 한결 나았다. 어느 포인트에서 올라가고 내려가야 할지, 어디서 힘을 주고 빼야 할지 살포시 감을 잡았다. 돌아가는 길, 여전히 몇 걸음 앞서 가는 상사를 뒤따라 걸었지만, 걷기 전과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업무 재배치가 결정된 후 줄곧 품고 있던 불만과 두려움도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자'는 마음으로 살짝 바뀌었다.
상사의 진심어린 배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산책길을 알려준 덕분에 새로운 길을 찾았고, 자신도 점심시간마다 이 길을 걸으며 마음의 고단함을 달래고 다시 사무실로 돌어가 하루를 버틸 힘을 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상사는 짐작했을 것이다. 업무가 더 늘어 힘들어질 나의 복잡한 마음과 어려움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의 30분이라도 짬을 내어 자신과의 시간을 가지고, 스트레스를 풀어가며 이 힘겨운 시간을 헤쳐 나가길 바라며 이번 인수인계를 계획하신 것 같았다.
15년째 이 회사에서 일하며 5번의 인수인계를 받았지만 이렇게 특별한 인수인계는 처음이었다. 같이 일하며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때로는 불만도 갖고는 했다. 하지만 일을 처리하는 기술을 넘어서서 그것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준 이번 산책길 인수인계는 정말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며칠 뒤, 상사는 떠났다. 업무가 늘어난 만큼 하루하루를 분주하고 치열하게 보낸다. 종종 힘겨움에 짜증이 밀려들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반환점을 찍고 돌아오던 조용한 그 길을 떠올려 본다. 지금 새롭게 맞닥뜨리는 일도 알아가다 보면 익숙해지고 어디서 힘을 주고 빼야 할지 알게 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라고 마음을 편히 먹는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다. 날씨뿐만 아니라 국내외 경기가 얼어붙고 움츠러들고 있다. 경기침체가 막 시작되었고 올해 더 힘들어질 거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우세한 상황이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려움을 견뎌야 할 시간이 될 듯하다.
마음을 움츠러들게만 하는 일들도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상황에 맞게 헤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인수인계를 받은 산책길은 막막한 순간들을 헤쳐 나가는데 한결 큰 힘이 될 것이다. 종종 너무 힘겨울 때면 다시 그 길을 걸으며 답답함을 털어 내 보기도 할 것이고. 부디 각자의 방식으로 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시민기자들이 '점심시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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