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지난 2월 22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한수빈 기자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러시아가 우월한 군사력을 이용해 인접국을 침입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 이면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좁게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안보질서를 지탱했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도전이다. 넓게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러시아로 대표되는 현실주의 국제질서의 충돌이다. 여기에 미중 전략경쟁이라는 변수까지 더해야 비로소 우크라이나 사태를 해석할 수 있는 기본틀이 갖춰진다. 이마저도 문화적·경제적 접근은 빠져 있다.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전략이 새롭게 등장한 것도 해석을 복잡하게 만든다. 한동안 미국이 전쟁 계획을 공개하고, 러시아가 이를 부인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수만명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을 두고 ‘과연, 누구 말이 맞느냐’에 집중하는 상황이 됐다. 양국 정상의 말 한마디에 금융시장이 출렁거렸고, 우크라이나 국민의 공포감도 극에 달했다.
긴장감만 한껏 고조시키던 미국과 러시아의 설전은 지난 2월 24일(현지시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 군사작전’ 승인으로 일단락됐다. 우크라이나 내부의 반군세력과 우크라이나 정부군 사이의 교전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으로 커지게 됐다. 우려가 현실이 됐지만 여전히 뾰족한 대안은 없다. 미국은 격렬했던 설전과 달리 러시아와 직접 충돌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고 있다. 이번 사태로 사실상 ‘우크라이나’만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와 한국을 열강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중추국(Pivot State)’으로 함께 분류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가 왜 일어났는가’를 분석하는 것은 한국에 발생가능한 위험을 미리 살펴보는 의미가 된다. 이를 위해 우선 미국과 가치, 체제를 공유하는 데서 발생하는 심정적 친밀함부터 배제해야 한다. 한쪽에 치우친 접근은 현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반감시킨다.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것은 국제정치의 오랜 명제다.
‘플라자 프로젝트’ 12회는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와 우크라이나 사태를 분석했다. 지난 2월 22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1차 대면 인터뷰를 가졌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한 24일에 추가로 전화 인터뷰를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우크라이나 위기인데 우크라이나가 안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문제가 개별 국가의 외교정책을 넘어 유럽의 안보질서 충돌 문제로 비화됐다는 의미다. 탈냉전기를 전후해 유럽의 안보질서를 두고 여러 방안이 모색됐다. 이중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 중심의 ‘대서양주의’와 유럽을 중심으로 북미는 물론 러시아까지 포괄하는 ‘대유럽주의’ 간의 유럽안보체제 논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 중심의 안보질서가 형성되며 러시아는 유럽 안보에서 배제했다. 이번 사태는 러시아가 유럽의 안보질서를 조정해 동·서의 세력균형을 맞추고 자국 안보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약속을 어긴 게 미국이라는 지적도 있다.
“독일이 통일될 때, 미국은 동독 지방에 나토군 및 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약속을 어겼다. 1997년 파리 나토정상회담에서도 신규 나토 회원국에는 군대나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역시 무산됐다. 러시아를 배제한 유럽 안보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은 중동부 유럽으로 나토를 확장해 갔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서 다음은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그다음은 발칸반도 국가들로 확장하는 식이었다. 특히 발트 3국이나 폴란드는 미국과 양자관계를 강화하면서 나토의 전진기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러시아는 어느 한쪽(나토)의 안보가 다른 한쪽(러시아)의 안보를 희생하는 결과가 돼서는 곤란하다고 경고했다. 1990년대 이후 국력 약세로 ‘수세적 방어’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는 이런 상황에 실망을 넘어 모욕감을 느꼈을 것이다. 푸틴은 집권 2기에 들어서며 러시아의 대나토전략부터 ‘공세적 방어’로 변경했다. 핵심 이익을 침해하면 무력을 포함한 수단을 동원해 대응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럼에도 나토는 동진을 멈추지 않았다. 실제로 2008년 미국은 중부 유럽 평원을 관통해 러시아로 들어갈 수 있는 몰도바,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의 나토 가입을 논의한다고 밝혔다. 이 상황에서 조지아는 친러 분리주의자들의 활동으로 분쟁지역이 된 곳을 정리하려는 군사적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러시아가 적극 대응하면서 벌어진 게 2008년의 조지아전쟁이었다.”
-왜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갈등이 표면화 됐나.
“우크라이나는 국내정치적으로 분열돼 있다. 정부에 따라 외교적 지향성을 자주 바꿨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같은 지정학적 중간국은 양대 세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데 국내 여론이 갈리면서 정체성 정치가 작동했다. 즉 일부는 ‘우리는 유럽이다’를 주장하고 또 다른 일부는 ‘우리는 슬라브다’를 강조하면서 갈등했다. 국내정치가 분열되다 보니 동쪽은 러시아가, 서쪽은 미국이 동원하는 식으로 개입할 여지가 생겼다. 2013년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요구한 대규모 시위) 이후 친러시아 정권이 퇴진하고, 친서방 정부가 들어섰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 노력을 가속화했다. 이를 저지해야 하는 러시아는 조급해졌다.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이번 사태로 이어졌다. 사실 이 문제만 놓고 보면 독일과 프랑스 등의 유럽국가들은 입장이 또 다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들어오는 게 썩 달갑지만은 않다. 미국은 대륙이 떨어져 있지만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와 대륙을 무대로 직접 대면해야 한다. 게다가 러시아의 가스공급이나 유럽의 대러 투자 등 경제적 상호의존이 상당히 진척돼 있다.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켜 굳이 위험을 키울 필요가 없다.”
-갈등상황은 올해 들어 급속히 나빠진 것 아닌가.
“안보딜레마 상황이 있었다. 미국과 나토는 우크라이나와 지속적으로 군사관계를 강화했다. 러시아는 이를 굉장히 위험하게 인식하고 둘을 의심했다. 우크라이나-서방 간 연합 훈련 때마다 맞대응하는 식이었다. 지난해 11월, 마지막 훈련을 마친 러시아 군대가 곧바로 원대 복귀를 하지 않고 조금 지체했다. 이때 석연치 않은 일이 생겼다. 미국 언론 폴리티코가 이 사실을 기사화했고 미국에서 전쟁 시나리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대체 미국이 이 문제를 왜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러시아는 군사력 증강으로 맞받아치며 우크라이나의 지위와 러시아의 안보적 우려에 어떻게 답할 것인지 문서로 제대로 밝히라고 서방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미국이 판을 키우고 러시아가 강경대응하면서 사태가 급속히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민스크 협정 이행을 강조했다. 정확히 어떤 것인가.
“2015년 우크라이나-러시아의 갈등 상황을 현상동결로 묶은 합의다. 핵심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의 무력사용 중단과 광범위한 자치권 보장이다. 돈바스 지역을 분쟁지역으로 두면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에 중대한 결격 사유를 갖게 된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우크라이나도 돈바스 지역에서 반군을 몰아내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결과적으로 민스크 협정은 준수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에서 열린 합동 군사훈련에서 우크라이나 병사가 대전차포를 발사하고 있다.(왼쪽)/ 도네츠크=AP연합뉴스. 러시아 로스토프온돈에서 러시아군 장갑차 등 군사장비가 이동하고 있다. /로스토프온돈=타스연합뉴스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이 흥미롭다. 민감한 정보들을 공개하고 있는데.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미국이 러시아를 다루는 전략을 바꾼 것 같다. 러시아는 지난 조지아전쟁, 크림반도 합병 등에서 정보전, 가짜뉴스 배포, 사이버 테러 등의 비군사적 수단으로 사회를 흔들고 최소한의 무력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을 수행한 바 있다. 미국은 러시아의 이런 전략에 대응해 선제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배포하는 등 푸틴의 선택지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모양새다. 러시아가 국경 인근에 병력을 늘린 걸 두고 ‘러시아가 전쟁을 결심했다’, ‘모의 핵실험을 한다’, ‘전쟁 개시일이 16일 또는 20일이다’, ‘목표가 키예프다’라는 식의 정보를 확정적으로 계속 공개하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해 최소한으로만 움직이게 만든 성과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외교적 해법을 찾을 가능성은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강대강의 대립구도에 계속해서 연루되도록 만든다.”
-미국이 판을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은 고도의 국제정치적 계산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미중 전략경쟁 상황에서 자기편의 결속 강화 전략을 택한 것 같다. 러시아와의 갈등 상황을 나토 내부의 이견들을 확실히 정리하고 동맹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겠다는 복안이다. 여기에 더해 중립적 입장을 가진 핀란드, 스웨덴 등의 국가들에게도 ‘결국 러시아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계속 던진다. 확실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러시아를 유럽 안보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미중 전략경쟁 개입을 방지하는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의 국내정치적 상황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올해 말에 있을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부의 적을 확실히 만들면서 내부적 난국을 헤쳐 나가려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미국이 적절한 선에서 외교적 타협을 하면 오히려 러시아에 이용당한 것 아니냐는 비판만 나올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크라이나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우크라이나로선 이 정도까지 가지 않을 상황이 계속해서 커지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외정책이 변화한 건가.
“미국은 손상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국이 표방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러시아 같은 강대국이 힘을 앞세워 세력균형을 이루려는 현실주의가 서로 충돌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미국은 세계에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확산한다는 논리로 합리화하려 하지만 중국, 러시아, 이란 등의 국가들은 이를 체제 위협으로 느낄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단순한 안보질서 변화가 아닌 자유주의 질서의 확장 시도로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의 권위주의 정치체제는 민주화 압력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내정치적으로 심각한 도전이다.”
경향신문 자료
-러시아의 무력 침공은 어떻게 전개될 것으로 보나.
“러시아가 삼면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남부에서는 크림반도를 통해 진입하고, 동부에서는 돈바스 인접 지역에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북서쪽 진입로인데 이에 따라 세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번째 시나리오는 돈바스 지역에 있는 도네츠크 인민공화국(DPR), 루한스크 인민공화국(LPR)을 주민투표 방식 등을 통해 합병하는 수순을 지향하는 것이다. 두번째 시나리오는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넘어 돈바스 전체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나아가 북동부 하리코프나 남부의 마리우폴 등을 장악해 크림반도까지 연결하는 것이다. 이는 푸틴이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때 구상한 노보로시야(신러시아) 구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벨라루스에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쪽으로도 지상군을 진입시켜 서부를 포함하는 우크라이나 전역을 신속히 장악하는 것이다. 이미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해 무장 해제를 시키고 친러 정부를 수립해 완전한 통제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 뒤에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분할·편입하고 우크라이나를 핀란드화 하는 안을 가지고 서방과 협상할 수 있다. 이 때 러시아에 대한 제재 해제 등도 함께 협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나 서방이 군사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국은 러시아를 제재한다는 입장인데.
“1단계 상징적 제재부터 시작해서 아마 단계를 높여가며 후속 제재를 진행해 나갈 것이다. 이미 러시아에 상당한 타격을 주겠다고 한 만큼 강력한 제재가 예상된다. 반도체를 포함하여 핵심 부품은 물론 러시아의 무역구조 전반을 옥죄는 제재를 구상하고 있다. 다만 군사적 대응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에서 미국이나 러시아가 입은 손해가 있나.
“결국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우크라이나이다. 사실, 미국은 이번 사태를 통해 얻는 게 많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독일, 프랑스 등을 비롯한 유럽 동맹들을 결집했다. 러시아를 확실히 적으로 만들면서 국내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끝내 우크라이나를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실질적 손해는 없다. 오히려 미국 입장에서는 이 위기가 적당히 유지되면 이를 활용할 여지가 많아진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입장에서도 큰 손해는 없다. 러시아 세력권을 인정받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이번에 미국이 제공해준 빌미를 제대로 낚아 챈 셈이 됐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러시아와 미국은 잃은 것이 없다. 다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러시아는 국외는 물론 국내여론도 나빠지고 경제제재로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빨리 사태를 정리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도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 중국에게 틈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할 것이다. 중요한 점은 미국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복원 노력과 러시아식 지정학적 현실주의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충돌이 향후 미중 전략경쟁에 영향을 미치고, 다극적 신냉전 국제질서를 추동할 가능성이 높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지난 2월 21일(현지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긴급 소집됐다. / 유엔본부=AP연합뉴스
-사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우크라이나 지위를 어떻게 할 것이냐와 유럽 안보질서를 어떻게 할 것이냐 두가지가 문제다. 우크라이나 지위와 관련해 러시아는 이미 답을 내놨다. 나토에 가입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이를 지키면 더 이상 압박하지 않겠다는 거다. 우크라이나가 이를 받을 것이냐가 문제다. 사실 우크라이나도 고민을 좀 해야 한다. 미국이 지원한다고 해도 실제로 전쟁이 본격화되면 고통받는 건 우크라이나 국민이다. 또 핀란드화를 치욕이라고 생각하는데 핀란드는 서방 국가들이 당시 소련의 의중을 알아보는 전초국가이자 러시아가 서방과 교류하는 게이트웨이로 기능하며 번영을 누린 측면이 있었다. 중립화가 우크라이나의 선택지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국내정치적 구도, 국제정치적 환경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유럽 안보질서는 어떻게 재편해야 할까.
“미국이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푸틴으로선 바이든 행정부의 실패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 군사 활동을 통해 유럽 전체의 안보를 흔드는 방식이다. 발트해 지역에서 위기를 조장한다든지 칼리닌그라드에 순항 미사일이나 핵무기를 배치하면 유럽의 안보판이 흔들린다. 결국 바이든이 유럽을 결집시키려 했다가 발목 잡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바이든이 중간선거에서 패배하면 추후 트럼프 복귀도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일정 선 이상의 악화를 막는 수준에서 타협점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두고, 미중 전략경쟁 상황과 연계시키는 해석도 있는데.
“유럽 무대에서 시작한 지역질서 논쟁이 세계질서 재편 논쟁으로 본격화될 수도 있다. 러시아와 미국이 타협할 수 있느냐에 따라 미중 전략경쟁과 신냉전의 전개가 달라질 것이다. 미국은 러시아를 관리하면서 중국을 상대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면 갈등이 장기화된다. 중국과 러시아가 전략협력을 강화하면 북-중-러 신북방삼각과 한-미-일 신남방삼각 대립구도가 재연될 수도 있다. 미국으로선 러시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도 생각해볼 수 있다. 냉전 시기 미국이 중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냉전 구도에서 승기를 잡았다. 미국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전파라는 가치에 입각한 외교 못지않게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이라는 전통적 현실주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크라이나 상황이 한국 상황과도 유사해 보인다.
“경쟁하는 세력들의 영향력이 부딪히는 지정학적 단층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지질학적 단층대가 활성화되면 지진이 나는 것처럼 국제정치적 경쟁과 갈등이 활성화되면 위험이 발생한다. 지정학적 단층대 상에 위치한 중간국들은 굉장한 외교안보적 딜레마에 노출돼 있다.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한반도도 그렇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지난 2월 22일 서울대 아시아연구소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한수빈 기자
-다음 대통령에게 조언한다면.
“후보들의 외교안보 공약을 보면 지정학적 단층대에 위치한 한국의 현실을 좀더 포괄적이고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통해서도 두가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하나는 지정학적 단층대가 활성화될 때 급작스럽게 외교노선을 변경하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내정치적으로 분열하면 외부세력에 의해 이용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막으려면 첫째, 지정학적 중간국으로서 한국외교의 적절한 균형점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국제정치 환경을 정확히 인식하고 우리의 능력을 솔직하고 정밀하게 진단해 잘 계산된 외교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은 하나의 조그만 실수가 커다란 타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한미동맹이 한국에 중요한 만큼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갑작스럽게 외교노선을 변경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둘째, 비슷한 처지에 놓인 국가 간 연대를 강화해 외교적 자율성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국 연대나 소다자협력과 같은 창조적 전략으로 국제정치에서 균형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도 동아시아에서는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중간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러시아, 일본 등과 ‘환동해 협력 벨트’ 같은 것을 구축해 미중 경쟁을 완충하고 자율적 공간을 확보한다면 경제를 넘어 안보에도 득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국내정치적 분열을 어떻게 관리할 거냐 여부다. 이제는 한국도 우리만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외교를 정립해야 한다. 한국이 무엇을 지향하고 내부적으로 얼마나 결집돼 있는지 미중 양측에게 보여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