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난 12월 15일 미국에, 다음날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각각 일방적으로 작성한 협정문 초안을 전달했다. 미국과의 조약 초안은 모두 8개조인데, ①나토의 동진(東進) 중단 및 구 소련 소속 국가들의 신규 가입 중지 ②나토 가입국이 아닌 구 소련 소속 국가들에 군사기지 설치 중단 ③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과 핵무기 자국 밖 배치 중지 ④상호 공격 가능한 지역에 전략폭격기 및 군함 파견 중지 등이 주요 내용이다.
나토와의 협정문 초안은 9개조다. ①상호 적대 중단 ②유럽 병력배치를 나토의 동진 전인 1997년 상태로 복귀 ③나토의 동진 중단, 특히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허 ④우크라이나 및 기타 동유럽국가, 코카서스, 중앙아시아에서 군사행동 중지 ⑤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군사훈련 중단 등이 주요 골자이다.
나토 확대를 중단하고 동유럽으로부터 사실상 병력을 철수하며 핵무기 배치를 자국 내에 한정하는데다가, 구 소련 지역을 러시아 세력권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다. 미국과 유럽이 선뜻 수용하기가 어렵다. 러시아 외교부는 지난 12월 17일 미국과 나토에 전달한 협정문 초안 전문을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협정문 초안을 공개한 것은 막후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외교협상 관행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형식과 내용 면에서 미국과 나토가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하고도 진행한 사실상 최후통첩이다.
러시아의 이런 요구를 서방측이 거부하면 이를 구실로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 러시아로서 더는 후퇴할 곳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서방측에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이런 강압외교(coercive diplomacy)가 통하지 않으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까?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 비견될 만한 사태가 전개될 수도 있다. 러시아와 서방측이 합의에 도달해 전쟁을 피할 수 있지만 군사적 대결로 비화될 수도 있다.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
이런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1년 거대한 제국이었던 소련은 몰락한다. 푸틴의 브레인으로 불렸던 알렉산더 두긴(Alexander Dugin)은 그의 저서 <지정학의 기초>에서 최대 시파워(sea power) 미국에 최대 랜드파워(land power) 소련이 패배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푸틴도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비극'이라고 칭하며 1000년 이상 걸려서 획득한 영토 40%를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소련의 지위를 승계한 러시아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쇠락했다.
그런데 미국과 나토는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동진을 시작했다. 1999년 폴란드, 헝가리, 체코가 나토에 가입하고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는 2004년에 가입한다. 러시아는 당황했다. 독일 통일 무렵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에게 앞으로 나토는 소련이 위치한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구두로 약속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서화되지 않았지만 약속은 약속인데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미국은 그런 약속 자체를 부정하고 러시아의 오해라고 반박했다.
2007년 뮌헨 안전보장회의에서 푸틴은 미국을 맹렬히 비판한다.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를 거부하고 미국패권은 비민주적이고 작동할 수 없다고 비난한다. 핵심적 불만은 나토의 동진이었다. 그러나 푸틴의 연설은 불평에 그쳤다. 아직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러시아는 미국과 나토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후 유가상승 등으로 경제가 나아진 러시아는 군사력 고도화에 매진한다. 2008년부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 거론된다. 우크라이나에 반 러시아 정부가 들어서자 2014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반 러시아 측과 친 러시아 측의 내전이 발생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최근 10만 명 이상의 러시아 병력이 우크라이나 인근에 집결하자, 서방 측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외교적 공방을 계속해왔다. 지난 12월 7일 바이든 미 대통령과 푸틴의 화상회담이 있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12월 15일 러시아는 일방적으로 작성한 협정문 초안을 미국과 나토 측에 전달하고 이를 공개해버린 것이 지금의 정세다.
이와 관련, 푸틴은 최근 기자 회견에서 "서방이 러시아에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방측이 러시아의 안전을 보장해줘야 한다"며 "미국이 우리 문 앞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나토의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모스크바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미국과 나토의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된다면,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이 7-10분이다. 미국이 조만간 얻게 될 초고음속 무기로는 5분이면 도달한다. 이는 러시아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푸틴의 주장이다. 푸틴은 러시아의 요구가 최후통첩은 아니며, 정치외교적 방법으로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비외교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의 통첩은 사실상 최후통첩이다. 서방인들에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소해, 전면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가 도덕적 명분을 잃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또 러시아 국민들과 군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부가 모든 수단을 다 했지만 서방측이 계속 압박을 가해오니, 더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푸틴은 전했다. 최악의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 봉쇄전략을 창안했던 장본인인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1998년 아무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나토의 동진은 러시아의 적대적 반응을 유발할 것이므로 전략적 실수라고 지적했다. 현 사태를 예견한 것이다.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소장 드미트리 트레닌(Dmitry Trenin)은 이번 통첩을 두고 서방측이 러시아의 일방적 요구를 거절할 것으로 예상하고도 러시아가 의도적으로 행한 조치로 해석한다. 군사적 행동을 취할 구실을 만들 목적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측은 협상이 신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서방측 지연전술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미국이 신속히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파간의 견해 차이가 심한데다, 내년 말에는 중간선거가 있어서 바이든 정부는 정치적 후과도 고려해야 한다. 자칫 러시아와의 협상이 유화책으로 비난 받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유럽 각국의 사정도 비슷하다.
이미 나토 사무총장 스톨텐베르그(Jens Stoltenberg)는 러시아 측 요구를 거부했다. 러시아는 내년 초 개시될 협상이 두세 달 안에 끝나길 원한다. 만약 그때까지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강경한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야말로 이번 최후 통첩이 제1차 세계대전 시작을 알린 1914년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최후 통첩처럼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 될지, 아니면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처럼 극적으로 타결에 이를지 지금으로서는 전망이 어렵다.
왜 지금 이 시점에 러시아는 칼을 뽑았을까? 푸틴과 그의 참모들은 러시아가 미국과 나토를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자신한다. 또한 추운 겨울,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 부족,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4차 확산, 지역봉쇄에 대한 반대시위, 벨라루스-폴란드 국경의 새로운 난민 위기 등으로 유럽이 곤경에 처한 현재가 적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철군을 보고 바이든 정부가 공세적 입장을 취하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을 수도 있다.
만약 서방측이 러시아의 강압적 요구를 전면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러시아에 힘으로 자국 의지를 관철할 만한 카드가 있을까? 먼저 비군사적 수단으로 러시아는 나토 가입국에 자국 영공을 폐쇄하고 민간항공기 항행을 불허하는 조치를 예상할 수 있다. 러시아의 광대한 영공을 고려하면 항공업계에 미칠 타격이 클 것이다.
아울러 러시아는 에너지, 특히 천연가스를 무기화해 유럽에 대한 공급을 제한할 수 있다. 먼저 러시아 제재 동참 국가에 가스 공급 계약 체결을 중단하고, 더 강력한 조치로 러시아 제재국가 전체를 상대로 모든 계약을 해제하고 가스와 오일 공급을 전면 중단할 수 있다. 미국을 상대로 원유판매를 축소 또는 중단할 수 있다.
이미 러시아는 자국에서 폴란드를 거쳐 독일로 연결되는 '야말-유럽 가스관'을 통한 가스 공급을 중단한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유럽으로의 가스 공급량도 20% 가까이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에너지 가격은 최근 몇 달 동안 4~5배가량 올랐다. 이는 110억 달러를 러시아가 투자해 완공한 발트해 해저 관통 러-독 직결 가스관 '노르트 스트림-2'의 개통승인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러시아와 유럽의 대결이 본격화되는 최악의 경우 러시아는 이를 포기할지도 모른다. 대신 중국과 시베리아 파워 2 (Power of Siberia 2) 가스관을 개설하기로 해, 유럽시장을 중국시장이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스 비축량이 감소한 상황에서 유럽은 에너지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러시아는 유럽연합 가스 수입량의 약 40%를 공급한다.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면 유럽전역에 정전 사태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독일 경제 타격이 클 것이다.
러시아가 가장 믿는 구석은 최첨단 무기와 군사기술이다. 서방이 자국의 요구를 거절하면 러시아는 '군사적-기술적 대응'으로 미국과 그 동맹국에 위협을 조성하겠다고 이미 선언했다. 3년 전 푸틴은 핵추진 수중 드론 외에 핵추진 순항미사일, 미국 미사일 방어망(MD)을 피할 수 있는 RS-26 '아방가르드' 및 RS-28 '사르맛' 등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2종,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킨잘', 신형 레이저 무기 등 6종을 세계에 공개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을 전략무기시스템 개발과 배치에서 앞서고 있다고 러시아는 확신한다. 일년 전에도 푸틴은 신무기 배치를 강조하면서 미국의 적절한 대응을 촉구했다. 지난 24일에도 최대 마하 9 속도로 1천km 이상 비행하는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치르콘' 시험 발사에 또다시 성공했다고 러시아는 밝혔다.
러시아의 원격 무기들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 포함)은 러시아를 비롯한 어느 지역에서 발사해도 미국에 도달 가능하다. 러시아는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나토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자신한다. 러시아는 미국, 나토에 대해 전자전(electronic warfare)에서도 우위에 있다고 본다.
러시아가 믿는 또 다른 곳은 중국이다. 푸틴 대통령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양국 역사상 전례가 없다며 양국 협력은 국제무대에서 강력한 안정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15일 푸틴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화상 회담을 하고, 최근 미국 주도로 서방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는 가운데 미국에 맞선 양국의 전략 공조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과 나토에 최후통첩을 한 날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의 지정학적 파워를 제한하는데 전략적으로 이해관계를 같이 한다. 만약 러시아가 군사적 행동에 나서면,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러시아를 지원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미국의 군사력을 묶어 두기 위해 타이완 점령을 시도할 수 있고, 남중국해 미 해군에 공격을 감행할 수도 있다.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 두 나라를 상대로 양면 전쟁을 할 능력은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서방에 러시아의 도전을 제어할 제재수단이 있는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거나 다른 형태의 도발을 하면 미국과 유럽 동맹은 러시아의 은행을 겨냥한 제재를 취하고 루블화와 달러화의 교환을 저지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미 심각한 제제를 받는 중이어서 추가 제재 효과는 미지수다. 2014년 크림반도 병합 후 제재조치가 취해졌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개입하는 걸 예방하진 못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9년 서방측 제재로 러시아 경제 성장률이 2014-2018년 사이에 0.2% 하락했다고 추정한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얻은 대가 치고는 가볍다.
서방측 제재 중 국제결제시스템인 SWIFT에서 러시아를 축출하는 방안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SPFS, 중국은 CIPS 을 SWIFT 대체 시스템으로 운영 중이다. 2022년 후반기에 양국이 공동으로 구축한 새 시스템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지배 하의 금융거래 시스템과 미 달러에서 벗어나는 것은 양국 공통의 전략적 과제이다.
러시아가 군사적 행동에 나선다 해도 우크라이나를 직접 침공할 가능성은 낮다. 대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 위치한 친러 도네츠크 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만약 우크라이나가 이들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면 러시아는 두 지역을 비행금지영역으로 선포하고 자국의 우월한 군사력으로 원격 지원할 것이다. 다만 의도하지 않은 분쟁이 돈바스나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지역, 혹은 흑해에서 발생할 위험은 있다.
만약 러시아와 서방이 합의에 이른다면 어떤 내용일까? 양측이 모두 자신의 정치적 승리라고 주장할 만한 타협안이 나와야 한다. 나토는 확장을 중단하고 대신 러시아는 어느 나토 가입국도 공격하지 않겠다고 보장할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는 미사일과 핵무기를 유럽에서 제한하는 데 합의하고, 양국이 상대 나라 국경 부근에서 군사작전을 중단하는 데 동의할 수 있다. 미국은 러시아에 서쪽 방면 안전 보장을 제공하고, 러시아는 일부 병력을 철수할 수 있다.
서방측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대폭 줄이고 러시아는 현 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할 수도 있다. 즉 크림반도는 제외하고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인정하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이 자치권을 확보하면 굳이 주권국가로 분리 독립하지 않더라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에 대한 존재감을 유지하고 우크라이나 서쪽에 대한 영향력도 제한적이나마 확보할 수 있다. 이런 타협이라면 러시아는 정치적 승리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고, 서방도 돈바스의 분리독립을 저지해서 정치적 명분을 얻을 수 있다.
향후 진행 과정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내년 초부터 두세 달간 이뤄질 양측의 협상에 따라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칼을 뽑은 러시아는 신속히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단계적으로 압박수위를 높일 것이고, 서방의 대응여하에 따라서는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 세 나라가 직접 부딪치는 매우 위험한 국면이 전개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번 사태가 향후 세계의 지정학적 구도에 미칠 영향은 매우 크다. 냉전 종식 후 형성된 질서를 러시아는 힘으로 수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부분적 성과만 얻어도 새로운 세력 균형이 이뤄지고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상은 더 높아질 것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그 파장이 미칠 것이다. 러시아의 위상 제고는 중국에도 자신감을 불어 넣어 동아시아에서 기존 질서의 수정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해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