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9월 미국 뉴욕 유엔총회장에서 ‘종전선언’을 촉구하는 내용의 기조연설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가 모여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종료됐음을 함께 선언하자”고 제안했다.
‘이재명은 합니다’의 원조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의 선거 구호이지만 고집은 문 대통령도 만만치 않다.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임대차3법…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해도 문 대통령은 그냥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이재명조차 외쳐대는 “정권교체!”다.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는 황소고집의 문 정권이 5년 임기 대단원을 장식할 최종 병기로 주무르고 있는 것이 바로 종전선언이다.
● 임기 끝까지 밀어붙일 최종병기, 종전선언
북에선 27일부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 자리에서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종전선언 관련 입장을 내놓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통일부와 외교부는 이미 ‘2022 정부 업무보고’에서 “종전선언이 현재 교착 국면인 남북 및 북-미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이 내게는 소득주도성장을 국제무대로 확대한 논리처럼 들린다. 최저임금부터 올려야 성장도 가능하다고 문 정권은 강조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로, 종전선언부터 무작정 해버려야 대화도 가능하다는 게 문 정권의 담대한 논리다.
문 정권 집권 이후 한국경제는 2017년 3.2%→2018년 2.9→2019년 2.2%→2020년 마이너스 0.9%로 ‘거꾸로 성장’했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족보 없는 정책을 ‘문재인은 합니다’ 밀어붙인 결과였다.
● 평화협정 맺고도 침공당한 나라 수두룩
종전선언주도대화 역시 대화가 아니라 거꾸로 대화, 거꾸로 평화를 불러올 공산이 작지 않다. 문 정권과 같은 생각을 하는 세력을 제외한 상당수가 종전선언에 선뜻 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 7월까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에이브럼스는 문 대통령이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며 “오늘날 북한은 분명히 핵으로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7월까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한미연합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에이브럼스는 25일 종전선언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9월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에서 ‘화해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의미다. 실제로 세계를 둘러보면 평화협정까지 맺고도 망해버린 약소국 흑역사가 수두룩하다. 베트남 공산화로 끝난 파리평화협정(1973), 뮌헨평화협정(1938)을 맺고도 히틀러의 독일이 침공해버린 폴란드가 대표적이다.
● 대체 왜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 밀어붙이나
종전선언이 되면 북한은 유엔사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쟁이 끝났으니 ’정전협정 관리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유엔사가 지금처럼 존재할 경우, 북한이 도발하면 유엔안보리 결의안 채택 없이도 다국적군 전력을 신속히 구성해 한미연합사(또는 미래연합사)가 수행하는 전구작전을 즉각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엔사가 해체되면 달라진다. 주일 유엔사 후방기지 역시 90일 이내 철수한다. 북이 도발할 경우 유엔군이 나서려면 유엔안보리 결의안이 채택돼야 하는데 중국과 러시아가 찬성할리 없다. 북한 요구대로 주한미군까지 철수하고, 북한이 속전속결전으로 밀고 내려온다면 더 끔찍하다. 미군 지원전력이 한반도에 닿기도 전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종전선언을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북대화를 하려면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민주정부 3기‘라는 문 정권이 의심스러운 거다. 대체 왜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을 밀어붙이는 것인지. 민주당 정권 재창출을 위해? 진정 화해와 협력을 위해? 아니면…조선노동당 규약대로 ’전국적 범위에서 사회의 자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발전의 실현‘을 위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은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가운데 외교부는 “보이콧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동시에 한중 외교차관 전략대화에서는 양국 정부가 종전선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 태영호 “베이징에서만은 절대 안 된다”
문 정권의 종전선언이 성사된다면 내년 2월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세기의 이벤트‘로 펼쳐질 수도 있다. 이미 미국은 베이징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했기 때문에 정전협정 서명 당사자인 미국(유엔군 측 대표) 없이 종전선언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23일 한중 외교차관 전략대화를 나눈 한국 측은 “종전선언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며 어떻게든 ’베이징 종전선언‘을 살리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만약 종전선언이 성사되더라도 절대 베이징에서 해선 안 된다는 것이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의 경고다.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그는 “북한이나 중국이 베이징을 종전선언 장소로 채택하자고 하면 청와대가 받아들일 것이냐”고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 따졌다. 한국은 6·25전쟁의 피해자이고, 북한과 중국은 전쟁의 주범이며 공범이다. 피해자인 우리가 가해자의 땅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종전선언을 할 경우 ’항복 선언‘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 정전협정 때 그들은 개성을 선택했다
1951년 정전협정 때도 이런 경험이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역사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 시어도어 리드 페렌바크가 1963년에 쓴 ’이런 전쟁‘이라는 책에서 발견한 대목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힘으로 이길 수 없으면 협상을 준비한다. 당시 38선 남쪽에서 유일하게 공산군의 수중에 있는 장소인 개성을 (정전)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부터 유엔군 협상단이 공산군 점령지에 들어올 때 마치 항복하러 오는 것처럼 백기를 들게 한 것까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열린 회담은 우여곡절 끝에 10월 26일 판문점으로 옮겼다.)
그러나 페렌바크가 한반도 전역에서 소부대들을 이끈 소대장들을 인터뷰해서 쓴 이 책에서 내가 진짜 가슴을 친 대목은 따로 있었다. “미군들 중 자신이 왜 한국에 있는지, 또는 왜 미국이 북한 공산당과 싸우는지 설명을 들은 이는 없었다. 이들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 싸울 준비가 안 돼 있다면 항복할 준비나 하라
프린스턴대학 출신 저자조차 “이런 종류의 전쟁(This Kind of War)은 필요하기는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더러운 일”이라고 했을 만큼, 당시의 한국은 미군부터 미국 대통령까지 발을 빼고 싶어 했던 나라였다.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생존 가능한 경제가 되려면 2000년은 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랬던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국가로 도약했다. 문 정권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장기 경제원조를 받아내지 않았다면 가능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종전선언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를 겨냥해 “한국 정치인이 종전선언에 반대하는 일본 입장에 동조한다면 친일을 넘어 반역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70년 전 한국에서 서둘러 떠나고 싶어했던 미국이 지금은 거꾸로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임기 마지막까지 우리 대통령은 5년 내내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고도 모자라 안보위기로 몰고 갈 태세다.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종전선언에 반대하는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겨냥해 “한국 정치인이 종전선언에 반대하는 일본 입장에 동조한다면 친일을 넘어 반역행위”라고 했다.
’이런 전쟁‘은 “싸울 준비가 되지 않은 국민은 정신적으로 항복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맨 마지막장 ’교훈‘에 써두었다. 그래도 문 대통령은 끝내 베이징에서 종전선언을 하고 말 것인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