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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의 중요성

대한유성 2021. 4. 23. 06:18

직분의 중요성

 

임경근 목사(다우리교회 담임)

 

요즘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 가운데 있다. 교회는 성장을 멈추었고 뒷걸음질 치고 있다. 사회의 교회에 대한 기대는 크지만, 교회는 그 역할을 감당하기는커녕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교회 직분자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단 교회나 불건전한 교회 직분자들이 그 권위를 남용하고 때문에 주님이 교회에 주신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다. 기성 교회도 직분자들이 그 권위를 오용하고 자신들의 배와 이름만 높이고 있다면 타락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고 있던 시절 같다. 사람들은 교회 직분자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를 떠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 남아 있는 자들도 직분자의 권위에 대해 냉소적이다. 큰 문제다.

이런 시점에 직분의 중요성을 얘기해야 하는 것이 부담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교회의 섬김과 봉사가 직분자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지할 때 직분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은 필요하다. 몇 가지 현안 문제를 질문형식으로 던지며 그 답을 찾아보자.

 

직분인가, 섬김인가?

‘직분’(職分)이라는 한자어가 ‘벼슬 직’에 ‘분수 분’이다. 그러다보니, 교회에서의 직분을 벼슬로 여기는 분위기가 많다. 몇 달 교회 출석하면, 권찰이 되고, 몇 년 교회 다니면 서리 집사가 되고, 남자는 안수 집사와 장로, 여자는 권사가 되는 것이 벼슬의 단계다. 젊은 세대가 이런 교회의 잘못된 직분관을 거부하다보니, 직분 자체를 버리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직분’이라는 말보다는 그저 ‘섬김’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한다. 또는 직분이라는 단어보다 ‘리더십’(Leadership)이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그래서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군림하는 직분’(Dominant Officer)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한다. 이렇게 현대에는 직분이 부정적 어감을 지닌다. 권위주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의 직분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일반 사회에서도 직책이 있고 그에 맞는 임무와 권위와 책임이 주어진다. 그들은 국가 행정부나 혹은 사회의 직분자(officer)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직분으로 가득하다. 예수님 자신이 직분자이셨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막 10:45)에서 ‘섬김’(Diaconia)이라는 단어는 ‘직분’(Diaconia)으로 번역된다. ‘섬기는 자’(Diaconos)는 ‘직분자’(Diaconos)로 번역될 수 있어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도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기(요일 2:20)에 왕ㆍ선지자ㆍ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보았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직분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교회는 고정된 형태의 특수한 직분자를 교회에 허락하셨음을 발견하고 인정했다. 예수님 스스로 직분자이셨고, 12사도를 임명하셨다. 사도들은 7명의 집사(행 6장)와 장로(행 14:13; 20장)를 택하여 세웠다.

 

결론적으로 ‘직분’은 본래 그 의미가 ‘섬김’이다. 그 섬김의 형태가 다스림과 돌봄인 것이다. 만약 이 직분이 인간의 죄성과 약함과 만나면, 잘못된 형태로 둔갑한다. 그러면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직분, 아래부터인가, 위로부터인가?

직분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을까요? 별로 생각해보지 않는 질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교회의 동력이 사라졌을 때 조직과 직분이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능력이 약해졌을 때 조직과 직분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보면서 직분을 세속적 영향이라고 비판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늘 교회 역사 가운데 있었다. 현대에는 무교회주의자나 혹은 회중교회나 독립교회 형태가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에 18세기에 등장하고 부흥한 ‘제자교회’(Church of Dsciple)나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가 그런 경우이다. 그들은 기성교회의 왜곡된 직분적 고착화를 반대하고 성령의 역동적인 섬김을 강조했다. 기성교회에 실망한 수많은 신자들이 그런 교회로 모여 들어 수적으로 성장했다. 이런 생각은 다양한 교파에 속한 기독인들 가운데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위의 주장과 사상은 상당히 매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성경을 조금만 읽어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 설립과 함께 직분자가 나타난다. 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는 곳마다 장로를 세웠다. 이 장로는 교회가 만들지 않고 성령님이 세우신다고 한다. 물론 교회가 투표하는 방식을 사용했을 것이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행 20:28)다고 한다. 직분자는 교회를 보살피는 조직의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직분을 세속화의 결과로 보는 문제는 ‘성령과 형태’, ‘성령과 기구’, ‘성령과 조직’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과 직분을 대립으로 놓고 보는 것 자체가 실수이다. 오히려 성령과 직분은 밀접하게 관련되며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직분은 아래부터 사람이 필요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니다. 직분은 위로부터 온 것이다. 교회의 직분은 하늘, 곧 하나님의 소명과 임명에서 시작된다. 직분자가 신적 권위를 가지니, 군림할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직분자의 권위는 위에서 온 것이지만, 철저히 말씀의 범위 안에서 위임된 것일 뿐이다. 직분에 위임된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마 20:28; 벧전 5:2-3). 직분자가 교회에 존재하는 것이 교회의 유약함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직분자를 선물로 주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기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두 가지 선물이 있다. 첫째 선물은 모든 신자에게 주신 것인데 ‘은혜’(charis)다. 둘째 선물은 ‘직분’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렇게 직분은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다. 직분은 아래에서 인간의 필요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위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선물이다.

 

직분은 뭐가 있는가?

이 직분은 초대교회에 여러 모양이 있었지만, 교회가 정착되어 가면서 크게 두세 가지로 통폐합된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장로와 집사’, 혹은 ‘장로와 목사와 집사’, ‘장로, 교수, 목사, 집사’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국 장로교회는 여기에 ‘권사’와 ‘서리 집사’를 첨가했다.

 

장로교회(고신)는 항존 직분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행 20:17, 28; 딤전 3:1-13; 딛 1:5-9)로 정했다. ‘항존’이라는 말은 임기도 없이 평생 봉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교회 가운데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항상 존재해야 하는 직분을 의미한다. 고신교회는 준 항존직으로 ‘권사’를 두고 있다.

 

‘권사의 직무’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인을 심방하되, 특히 병자와 궁핍한 자, 환난 당한 자, 시험 중에 있는 자와 연약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힘쓰는 자(고신 교회정치, 제86조)이다. 남녀가 유별한 한국에서 여성들을 심방하는 데 유용하게 쓰임 받았다.

 

‘집사의 직무’는 당회의 지도 아래 교회의 봉사와 교회의 서무, 회개와 구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고신 교회정치, 제77조)고 규정하고 있다.

 

‘장로의 직무’는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 교회의 영적 상태를 살피는 일,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교인을 권면하는 일,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교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목회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목사에게 상의하고 돕는 일(고신 교회정치, 제 66조)이다.

 

‘목사의 직무’는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 찬송을 지도하는 일, 성례를 거행하는 일, 하나님의 사자로서 축복하는 일, 교인을 교육하는 일, 교인을 심방하는 일,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하는 일(고신 교회정치, 제40조)이다.

 

직분이 왜 중요한가?

교회의 직분이 왜 중요할까? 교회에는 직분자보다 일반 성도들의 숫자가 훨씬 많다. 일반 성도들의 섬김과 봉사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 하지만, 교회 직분의 섬김을 통하지 않으면 본래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특히 위로부터 오는 교회의 개념을 실현하기 어렵다. 교회는 위로부터 났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직분의 섬김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하늘 위에서 직분자를 세우고 그들의 섬김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이다.

그렇지 않고, 직분을 버리고 민주주의적 경영을 하는 교회는 어떨까? 그런 교회도 나름대로 운영되고 굴러갈 것이다. 하지만,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대로 가기는 어렵다. 아래로부터 만든 조직이나 리더십이 교회를 다스리고 통치한다고 생각해 보자. 현대에는 그런 교회가 멋있고 깨어있고 앞서나간다고 칭찬과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참신해 보이고 심지어 개혁적 교회라고 불리기도 한다. 직분자의 부정적 선입견이 없기 때문에 좋은 반응을 보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잘 받고 있을까? 민주적 교회가 성경적 다스림을 받는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까?

사사 시대에 참 왕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참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다. 그 삶은 삶이 아니었다. 고생과 슬픔뿐이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직분자로 ‘사사들’(Judges)을 보내어 그들을 죄와 벌로부터 구원해 주셨다.

새 언약의 시대에도 하나님은 교회에 직분자를 주셨다. 직분자는 교회를 세우는 데 앞서가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직분은 몸의 ‘뼈와 관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뼈와 관절은 중요하다. 몸에서 뼈가 없으며 굳건하게 서기가 어려운 것처럼, 직분자가 없으면 교회는 힘이 없고 곧 무너져 버릴 것이다. 직분은 관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직분자는 교회의 몸을 서로 연결되도록 돕는다. 그러니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가!

 

직분은 ‘근육’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육은 몸의 지체와 지체를 연결해 힘을 적재적소에 발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근육이 없으면 교회가 무기력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직분은 중요하다.

 

직분은 ‘동맥’과 같은 역할을 한다. 직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양식을 받아 교회의 몸인 성도들에게로 전달한다. 목사는 말씀의 직분자이고, 장로는 말씀이 성도들의 삶 속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며 권면하는 직분자이고, 집사는 물질적인 삶 속에 말씀이 적용되도록 섬기는 직분자이다. 직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직분적 섬김과 일반적 섬김의 차이는 무엇인가?

직분적 섬김과 일반적 섬김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하지만, 섬김의 지속성과 범위와 강조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직분자는 앞서 인도하고 방향을 제시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직분자에게 요구되는 행동은 솔선수범, 가르침, 모범, 버팀목, 자극, 협조, 결정, 일깨움, 교정 등이다. 성도 누구나 복음을 선포하지만, 직분은 책임을 맡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직분은 하늘의 다스림을 땅에서 보여준다. 모든 성도가 은사를 받지만, 직분자에게 좀 더 특별한 은사가 요구되고 또 은사를 받는다. 이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된다. 직분자는 하나님을 등지고 성도를 향해 섬긴다. 성도를 등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직분자는 성도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대사이다. 직분자는 성도들이 만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직분은 철저하게 신본주의적이다. 직분은 말씀의 권위와 가치와 능력에 의존할 뿐이다. 세상적인 어떤 기교나 능력이 교구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제시된 법으로 섬겨야 한다.

 

직분의 중요한 원리는 무엇인가?

이 모든 직분의 중요한 원리를 몇 문장으로 정리해 보자.

 

첫째, 직분은 교회를 위해 교회를 통해 온다.

둘째, 교회는 직분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를 만난다.

셋째, 직분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양 무리와 신부를 만난다.

넷째, 직분은 교회의 구원과 복지를 위해 존재한다.

다섯째, 직분은 언제나 교회적으로 기능한다.

여섯째, 교회는 항상 직분적으로 구조화 된다.

일곱째, 교회와 직분은 대립 관계가 아니고 경쟁 관계도 아니다.

여덟째, 성도는 직분을 경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홉째, 직분자는 교회를 비방하거나 얕봐서도 안 됨

열째, 직분자는 군림 할 수 없다.

열한째, 직분자는 먼저 앞 서 갈 뿐이다.

열두째, 직분자는 서서 일하지 않고 앞서 가며 인도 한다.

열셋째, 직분이 모든 일을 독차지 하지 않는다.

열넷째, 직분자는 교인을 고객이나 환자로 보지 않아야 한다.

열다섯째, 직분자는 복음으로 교회를 먹이고 교리와 삶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열여섯째, 직분자는 교인을 수동적이고 소비자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열일곱째, 직분적 봉사와 은사적 봉사가 경쟁할 필요가 없다. 교회는 은사적이며 동시에 직분적이다.

 

나가며

한국교회의 문제는 직분의 타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직분이 중요한 만큼 바른 섬김이 중요하다. 직분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오지만, 인본주의적 상식 수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경적 직분의 개혁이 절실하다. 종교 개혁가들의 수준의 직분 개혁이 필요하다. 그들이 닦아 놓은 좋은 길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종교 개혁가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린 종교 개혁가들의 직분관을 잘 배워 오늘 한국교회에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교회를 개혁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