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신앙2/리더십·CEO

제갈량(諸葛亮)의 지략과 탐구

대한유성 2021. 4. 18. 06:31

제갈량(諸葛亮)의 지략과 탐구

(제갈량)

 

제갈량[諸葛亮]의 지략과 탐구

 

제갈량의 역사상의 모습은, 역시나 '삼고초려' 를 그 보기 드문 시작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융중의 초막을 세 번 찾아갔다" 는 이 유명한 고사를

단순히 소설적 허구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밑에 나오겠지만, 제갈량 바로 본인이 쓴

'출사표' 라는 글에서부터 "일찍이 선제께서는, 신을 어리석다 내치지 않으시고

융중의 초막에 몸소 세 번씩이나 왕림 하셨나이다"라는 문구가 보이니까요.

 

뭐 어쨌든.

 

삼국지 매니아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제갈량은 27살이 되던 해에 얼핏 으로 보이기 쉬운

유비라는 인물에게 신변을 의탁합니다.

일부 야사에서는 그 전부터 제갈량이 '와룡선생' 이라는 별명으로

아는 거 많기로 형주 일대에서 꽤 날렸다고들 하는 경우가 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그냥 형주의 '선비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정도고,

세간에서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형주목인 유표와 꽤 깊은 혈연관계가 있었습니다만,

본인이 소소한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유비라는 사람이 워낙에 정치가 영입에 혈안이 되어 있었으므로

진흙속의 진주를 찾았다고 할 수 가 있겠지요.

 

물론 거꾸로 제갈량이,

한나라 황실의 부흥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사람을 주인으로 원했던 것도 사실이지만요.

 

 

사실, 유비가 이었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비 자신과 제갈량 둘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귀한 서천의 지도까지 저렇게 놓고 마주앉아

천하로 나아갈 길을 의논하고 있으니까요.

유비는, '한실부흥' 이라는 큰 꿈에 비해 가진 게 너무 없었지요.

예주목 이라던 지 좌 장군과 같이 아무 실권 없이 허울뿐인 직함에,

군사라곤 유표에게 비루먹은

몇천명 정도 뿐 이었습니다. 거기다, 충성심에 불타는 두 동생을 빼면

장군감으로서도 책략가로서도 믿음직한 친구들이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믿음직하기만 한 인재여서도 안 되고,

천하의 한신, 장량, 소하, 범증과 같은 호걸이어야만 했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유비에게는 없었습니다.

 

그저 신야라는 궁벽한 변방 성에서 하릴없이 날을 헤며

조조가 하북의 원소를 격파했다느니, 북중국을 통일했다느니 하는

소식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지요.

 

이토록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유비였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발목을 붙잡는 건 아무래도 근거지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땅에서 쌀이 나고, 땅을 차지해야지 비로소 군사를 징집할 수 있으며,

넓은 땅을 가질수록 뛰어난 인재도 많이 거느릴 수 있는 시대였으니까요.

 

우리가 알고있는 삼국지 1세대의 세 거두 중, 유비를 나머지 두명과 비교하면

그 절박함은 정말이지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조조는 중원에서 가로막을 자가 없었습니다.

유일한 라이벌이었던 원소를 관도대전에서 깨끗이 잡아먹었으니까요.

이 전쟁은 삼국시대라는 난세에서 가장 큰 전환점입니다.

대부분의 물자, 인구, 곡창 등이 밀집되어있던 황하 부근을, 단 한 사람의 제후가

차지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요.

이 싸움을 발판삼아 조조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군사를 거느린

제후로 거듭나게 됩니다.

 

거기다 황제까지 옆에 끼고서 조금만 빈정이 상하면 '어명 이오' 하며 시시콜콜 걸고넘어지니,

무얼 하려고 해도 불리한 입장에서 시작하는 셈이지요.

황제에 맞서면 그대로 불충한 역적이 될 뿐이니까요.

이것 역시 대단한 정치적 자산임에 분명했습니다.

 

현대 역사학자 선생님들의 의견에 따르면,

200년대 초반 조조가 동원할 수 있었던 총 군사 수는 어림잠아 40만 명 정도였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나머지 모든 제후들의 동원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와 당장 맞서는 건 유비에게 자살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손권은, 동오 진영의 시조이자 옛 영웅인 손견의 아들이며

2대 수장 손책의 동생입니다.

흔히들 손권을 '수성의 달인'이라 일컫는데,

비교적 적절한 평가라고 할수 있습니다.

아버지 손견과 형인 손책이 철저히 무력으로 일궈놓은 기반에

온갖 정치력 노력을 기울여 삼국지의 한 축을 이루는 '동오 집단' 을 지켜냈으니까요.

 

손책은 살아생전에 강동 6군을 모두 평정했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손책이라는 사람의 성정이 대단히 거칠고 난폭해서

강동 각지의 호족들과 그 사병들(宗敵)들을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른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손책이 죽자 너나할 것 없이 떠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렇게 어지러운 상황을, 손권은 아주 침착하고도 대담하게

진압해 나갔습니다.

물론 유비나 조조처럼 맨손으로 일어나 나라를 세운 사람들보다야

덜 힘들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고작 18살의 나이에 제 큰삼촌뻘, 큰형뻘 되는 중신들을 이끌고 국정운영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권은 정말로 강동 6개 군에 걸쳐 그 세력을 뻗쳤고

군사수도 7~8만 명 어름까지는 어찌어찌 길러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유비는요?

 

 

20년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고선 꼴랑 신야성 요거 하나 건진 겁니다.

그것도 남한테 빌린 땅이라서 언제든지 나가라 해도 할말이 없는 처지였지요.

 

여담이지만, 이 상황에서 유비는 나이까지 많았습니다.

당시로선 할아버지에 가까운 50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누가 보더라도 그는 이미 한물 간 사람이요, 허울 좋은 명사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를 택했습니다.

 

무너져가는 한나라 왕조를 다시 붙잡고,

찬란했던 옛 삼권분공의 권력구조와 공정한 인재등용 법제를 부활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유비를 제외한 다른 어느 집단도 '한 왕조'를 최종목표로 내걸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뿐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애초에 어느 집단에서든 파격적인 중용을 원했던 그로서는,

조조나 손권은 이미 거느린 인재가 너무 많았을 겁니다.

 

제갈량은, 장기적으로 유비가 힘을 키워 조조에 맞서려면

손권과의 동맹이 필수적이라고 말했고,

 

이러한 의견은 장강의 완전한 장악을 목표로 하던 손권 진영 내에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꽃보다 주공근)

 

이와 같은 이해관계로 맺어진 손유 동맹은, 한 번의 엄청난 싸움에서

조조를 크게 망신주는데 성공합니다.

그 싸움은 바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적벽대전' 입니다.

 

조조는 원소를 이긴 뒤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거진 중국을 통일했다 생각 했겠지요.

이렇게 지나친 생각이 아니었다면, 북방에서 말 타고 달리던 기마병을

수 천리씩 행군하게 해 형주에 다다를 즈음 기진맥진하여 풍토병에 걸리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수많은 배를 대여섯 척씩 묶어 화공법의 완벽한 타겟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전에)

 

무엇보다,

노숙, 제갈량, 주유, 손권, 유비 등등 당대의 영웅호걸이 한데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적을 상대로 처음부터 무리하게 자신에게 불리한 수전(水戰)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조조는 기어이 20만 이상의 대군을 일으켜

주유와 황개의 환상적인 화공 지휘에 완파당합니다.

 

적벽대전은 조조의 일생일대의 패착인 동시에, 유비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비는 적벽대전을 통해 형주의 절반 가까이와 익주를 차지하게 됩니다.

시골 촌구석에서 남의 문지기 노릇이나 하던 늙은 수장이,

중국에서 가장 큰 두 개 주를 점거한 어엿한 제후가 된 것입니다.

정말이지 하늘이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ㅋㅋㅋ님 좀 짱인듯)

 

이 일련의 행보가, 제갈량의 시대를 앞서간 혜안과 정치적 안목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유비가 반평생 천하를 헤메도 못 해낸 일을,

제갈량은 본격적으로 유비를 위해 일한지 10여년만에 해치운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북벌" 이라는 단어가 비로소 그 실효성을 갖기 시작합니다.

제갈량은, '한중 방향과 형주 방향 양쪽으로 조조를 치면 가히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한중에서,

 

유비가 조조군의 일급 지휘관인 하후연을 참살하며 조조군을 대파한 것입니다.

 

세상에 나온 이후 조조를 만났다 하면 도망갈 준비부터 하던 유비가,

직접 본인이 지휘하는 군대로 숙적 조조의 친정을 물리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한중왕을 자칭했습니다.

이제 형주방면에서 낙양, 허창 치고 올라가기만 하면, 옛날 한고조 유방이 익주땅에서 일어나

천하를 통일한 과거를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촉나라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 우리 됐어 ㅠㅠ)

 

형주 사령관으로 있던 유비의 동생 관우가, 북벌을 완성하기 위해 양양을 공격하던 도중,

동맹군이라던 동오의 여몽에게 배후를 습격당한 것입니다.

 

애초에 손유동맹은 그 기반이 너무 부실했습니다.

당장 조조라는 거대한 적이 몰려오니 일단 손을 잡고 물리치기는 했는데,

결국 두 편 다 노리는 건 형주였으니까요.

동오입장에서는, 적벽대전에서 같은 편인 유비보다 훨씬 사람도 많이 죽고 물자도 훨씬 많이 소모해서

겨우겨우 이겨놨더니, 당연한 전리품을 바로 그 유비에게 빼앗긴 셈이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이니, 손권같이 교활한 군주가 가만히 관우의 북벌을 놔둘리가 없었던 겁니다.

 

관우 자기 자신도 생포된 뒤 죽임을 당헀고, 촉한은 형주를 동오에 내주게 되었습니다.

북벌 계획의 두 축 중 하나를 영영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개빡친 유비 역시, 동생의 복수를 하겠답시고 오나라 정벌을 떠났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무명이던 육손에게 군사의 8할 이상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뜨게 됩니다.

'이릉대전' 이라 불리는 이 싸움에서, 촉한은 일반 군사는 물론이고

유능한 지휘관과 책사들을 많이 잃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위나라에 투항한 황권과 전사한 마량이 있겠지요.

이후에 촉한이 겪을 인력난, 물자난은 거진 이 전쟁 때문에 생긴 것 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 두 번의 큰 실패는, 유비 사후 촉한의 미래를 짊어진 제갈량에게

더할 나위 없이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북벌을 떠나자니 그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게 돼버렸고,

그렇다고 북벌을 하지 않자니 정권 자체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생각났을 겁니다.

 

그러나 제갈량이 누굽니까. 유비가 죽어 각 계파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몇 명의 익주 명사를 파직하거나 유배 보내는 방법으로 모든 상황을 종료시킨 뒤

그 와중에 남만정벌까지 이뤄내는 기염을 토합니다.ㄷㄷㄷ

전복 직전까지 갔던 촉한정권은, 제갈량의 무시무시한 정치력 덕분에

풍비박산이 되는 꼴을 면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내부 상황과 배후의 반란이 적당히 진압되자,

제갈량은 곧바로 유비의 아들인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립니다.

중국 3대 산문문학 중에 하나이기도 한 이 글은, 한실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본인의 절실함과 선제 유비, 2대 황제 유선에 대한 충성심이 배어나온

문장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은 본래 포의로서.. 선제께서는.. 어쩌구 어쩌구)

 

이 출사표를 올리고 떠난 맨 처음의 북벌전쟁에서는, 촉한의 상황이 꽤나 좋았습니다.

위나라가 전혀 마음의 대비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유비,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 뛰어난 장군들이 죽은 마당에

너희가 해봐야 뭘 하랴 싶었던 거겠지요.

그런데 막상 부닥치고 보니 만만치가 않은 겁니다. 천수, 안정, 무위 3개군이

동시에 촉한쪽으로 돌아서며 반역의 기치를 들었고,

그저 뒤에서 군량조달만 할줄 아는것 같았던 제갈량도

의외로 군지휘관으로서 녹록치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나라 조정이 매우 큰 불안에 휩싸였으며, 군신이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고 적고 있습니다. 진수가 대체적으로 그 책을 위나라와 진나라를 정통으로 서술한 것을 감안한다면,

아마 당시 위나라는 거의 서량을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던듯도 싶습니다.

 

만약 이대로 서량을 장악한다면, 제갈량은 그곳의 자금력을 끌어들여

조금더 수월하게 장안이나 낙양을 공략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번에도 촉나라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제갈량이 매우 아끼던 참모 중에 마속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릉대전에서 죽은 마량의 친동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친구가 말도 잘하고 기발한 책략도 잘 짜기는 하는데,

일군을 통솔할 대장감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난 잘생겼어 말도 잘해 전쟁도 잘 말아먹어)

 

그런데도 제갈량은, 위연과 오의 라는 경험많고 용맹한 지휘관을 두고

이 젊은이로 하여금 '가정' 이라는 요충지를 지키게 합니다.

촉한 군사들의 목구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속은, 산 위에 전군을 배치하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질러

위나라의 대장이던 사마의와 장합에게 크게 패하고 맙니다.

 

'반드시 물가에 군사를 배치하라. 넌 그냥 앉아서 밥먹으면서 버티기만 하면 된단다 꼬마야 제발 말 들어라'

 

라며 타이르던 제갈량의 충고를 무시한 결과였지요.

그나마 희망이 있던 1차 북벌이 허무하게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사마의) (장합)

 

이 전투의 책임을 추궁당하여, 마속은 죽음으로써 속죄하게 됩니다.

'읍참마속' 의 고사가 바로 여기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패장을 죽인다고 이미 어그러져버린 전쟁이 되돌아오지는 않지요.

사실 제갈량은 마속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닌데다,

나중에 더 큰 싸움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거기다 마속은 확실히 뛰어난 구석이 있는 인재에 속했습니다.

안 그래도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한 입장에서는 더더욱

뛰어난 사람들을 아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권 내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익주 본토의 호족, 옛 유언과 유장을 따르던 부하들, 또 유비가 끌고 들어온

외부의 인사들 계파간의 갈등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습니다.

유비가 익주에 들어오면서부터 세운 불문율이,

"나중에 들어온 사람을 윗자리에 앉힌다" 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우리가 아는 촉한의 주요 인물들인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위연, 왕평, 제갈량, 마량, 장완, 동윤, 비의 등등이 모두

익주 본토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한사코 주위를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하여 채용한 사람이

큰 전투에서 패했는데 만약 직접 감싸준다면,

평소에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습니다.

'너는 사람도 제대로 못쓰면서 무슨 염치로 승상 자리에 앉아있는 거냐!'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러한 정치적 배경이, 제갈량으로 하여금 아끼는 인재를

망설임 없이 내려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앞으로 계속 촉한정권을 이끌고

집권할 수 있느냐 없느냐, 북벌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에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문제였습니다.

 

결과부터 말씀 드리면, 제갈량은 6번씩이나 계속 출병했지만

장안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전장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작은 나라, 적은 병력, 부족한 군량미로는 역시 위나라 같은 대국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맨 처음 유비에게 의탁할 때부터 한실부흥이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조조가 이미 너무 강대하게 천하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에 비해 자기 주인인 유비는 꿈만 큰 객장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의 부릴만한 사람이 적다던가,

적이 너무 막강하다던가,

보급로가 길다던가 하는 문제는

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항상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모든 악조건을 안고서라도 스스로의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지요.

 

그를 역사의 패배자라 욕해도 별로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가 성공했느냐 실패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신과 주위사람들에게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입니다.

 

그는 출사표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노둔한 몸이나마 있는 힘을 다하여, 죽고 난 뒤에나 멈출 것입니다"

 

참으로 의지와 신념으로 가득 찬 문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아직까지 밝혀진 바로는 제갈량은 이 문장에 조금도 어긋남 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끝까지 자기 꿈을 쫓아가는 모습이,

자기 꿈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