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칭스킬/기타 낙서장

[스크랩] 한국 대표명시 100선 (41-80)

대한유성 2019. 1. 4. 11:32


41.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42. 사랑이 가기전에 / 조병화

 

사랑이 가기 전에 이렇게 될줄 알면서도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주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잎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될줄을 알면서도

 

43. 낙화 /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落花)……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44. 북치는 소년 / 김종삼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45. 어머님의 아리랑 / 황금찬

 

함경북도 마천령, 용두골
집이 있었다
집이라 해도
십 분의 4는 집을 닮고 
그 남은 6은 토굴이었다
어머님은 
봄 산에 올라
참꽃(진달래)을 한 자루 따다놓고
아침과 점심을 대신하여
와기에 꽃을 담아 주었다
입술이 푸르도록 꽃을 먹어도 
허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날에 
어머님이
눈물로 부르던
조용한 아리랑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엔 
가난도 많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울고
무산자 누구냐 탄식 말라
부귀와 영화는 돌고 돈다네
박꽃이 젖고 있다
구겨지며
어머니의 유산
아리랑 

 

46. 내 산하에 서다 / 이태극

 

일월도 서먹한 채

그늘 진 정은 흘러

핏자욱 길목마다

귀촉도 우는 구나

건널목 숲으로 가름한

저 언덕과 이 강물!

2

진달래 피어들고

단풍잎 불타나고

부르며 바라보는

어베들의 보금자리

배리(背理)는 화사(花蛇) 습성

굳어만 가는 마음벌!

3

얼룩진 수의(囚衣) 이기

되씹는 회한인가

깁소매 접어 넣고

활짝 열자 닫힌 창을

섭리는 새날의 기수

지켜서는 내강토

4

오랜 역사의 장()

갈피갈피 어엿하다.

한 핏줄 소용돌아

가슴 가슴 솟구친다.

갈림은 만남의 정점(頂點)

휘어잡는 내 손길-.

 

47. 라일락 향기 / 문덕수

 

네 품안에 할 알의 씨로 묻혀

너를 닮은 과일로 익고 싶다

내 물살의 칼날은 꽃잎이 되고

뾰족한 내 돌부리는 만월滿月처럼 깎이어

너를 닮아 차라리 타버리고 싶다

외길로만 뻗는 이 직선을 잡아다오

부러져 모가 서는 이 삼각을 풀어다오

꺾이어 모가서는 이 사각에서 놓아다오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기에

실은 우주도 너를 닮은 충실이기에

네 품안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로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이고 싶다

 

48. 울음이 타는 가을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겄네.

 

49. 항아리 / 박희진

 

무슨 흙으로 빚었기에

어느 여인의 살결이 이처럼 고울 수 있으랴

얇은 하늘빛 어린 바탕에

그려진 것은 이슬 머금은 달개비인가

만지면 스러질 듯 아련히 묻어오는

차단한 기운이여

놓이는 자리는 아무 데고

끝인 동시에 시작이 되는

너는 그런 하나의 중심이라

모든 것이 잠잠할 때에도

끊임없이 숨 쉬며 있는

오 항아리

너 그지없이 둥근 것이여

소리 없는 가락의 동결이여

물 위에 뜬

연꽃보다도 가벼우면서

바위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것

네 살결 밖을 감돌다 사라지는

세월은 한갓 보이지 않는 물무늬인가

항아리 만든 손은 티끌로 돌아가도

불멸의 윤곽을 지닌 너 항시 우러른

그 안은 아무도 헤아릴 길이 없다

 

50. 갈대 /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51. 저문 산 / 박용래

상칫단 씻는

아욱단 씻는

오 리 안팎에 개구리 울음.

보릿대 씹는

호밀대 씹는

일락서산(日落西山)에 개구리 울음

2

댕댕이 덩굴, 가시덤불

헤치고 헤치면

그날 나막신

쌓여 들어 있네

나비잔등에 올라앉은 보릿고개

작두로도 못 잘라

먼 삼십 리

청솔가지 타고

아름 따던 고사리 순

할머니 나막신도

포개있네

빗물 고여, 저문 산

묻혀 있네.

 

52. 풍선 날리기 / 성찬경

 

대축제다.
어린이들의 풍선 날리기다.
오색 풍선이 200개쯤
일제히 하늘로 솟는다.
풍선의 해방이다.
하늘에 뜬 꽃밭이다.
하늘이 너무 파랗다.
영감적인 너무나 영감적인.
이 놀이엔 의미가 없다.
절대의미絶對意味가 있을 뿐이다.
어린이는 영감靈感의 샘.
노아의 가족인가.
풍선들이 모두 함께 동남풍 미풍을 타고
서서히 흐르며
작아진다.
슬픈 원근법이다.
어린이 마술에 걸린 나는
언제까지나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풍선의 승천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하늘로 하늘로 사라짐.
세상에서 제일
축복 받은 운명이다.
, 이때 기적이 인다.
나의 눈이 1.5.
아니, 2.0이다.
바늘 끝만한 것이 계속 보인다.
빛깔은 이미 없고
반짝반짝하는 것.
대낮별이다.
아득히 남은 한 별,
하는 사이
하나가 다시 나타나,
두 별이다.
하는 사이
셋이다.
최후로
이젠 정말 하나다.
그것마저 영영 사라졌을 때
내가 보는 창궁蒼穹
올챙이꼬리 달린 풍선만한 별들이
일제히 헤엄쳐 들어와
불멸의 성좌 되어 찬란히 빛난다.

 

53. 대나무에게 / 최승범

 

설청의 눈부신 아침
너를 바라본다
너를 바라본다
따로 날이 있으랴
사철을
바라보아도
너로 설 수
없는 것을
설청의 이 아침에
너를 다시 바라본다
개운히 스미는 빛이여
성글어 맑은 소리여
빼어나
밋밋한 마디에
부추겨다오
나를나를

 

54. 백두산 / 고 은

 

모든 산들을 저 아래에 두고
몇 억만 년 지나도록
아직껏 이것은 산이 아니었다
, 너 백두산
그토록 나날이건만
새로이
네 열여섯 봉우리 펼쳐라
장군봉 망천후 사이
성난 노루막이 비바람처럼
가까스로 날라가 버릴 몸뚱어리 버티고 선
내 불쌍한 발밑조차
보이지 않아 캄캄하지만
수많은 어제였던 오늘이었고
내일이어야 할 오늘이었다
활짝 펼쳐라
여기 억만 년 세월의 가슴 있다면
그 가슴 삼아
열여섯 봉우리
네 이름을 부른다
열여섯 봉우리
스물여섯 봉우리에 걸어
이 나라 시원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너를 부른다
목 놓아
너를 부른다
푸른 피 엉겨
푸른 피 엉겨
너를 부른다
장군봉이여
백운 관명봉이여
삼기봉이여
천활 지반 왕주 제운봉이여
와호 고준 자하봉이여
화개 철벽 용문봉이여
관일 금병봉이여
오늘 네 이름을 부르고 부른다
네 이름 불러
하늘의 물
자손만대로 나아가는
천지여
네 거룩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 부른다
그리하여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의 나라
동방 옛 조선 이래
끝없이 앞을 향하여 가고 있다
그토록 숨돌릴 겨를 모르던 침노 한사코 물리쳤다
여기 백두산
힘찬 아기처럼 쩌렁 쩌렁 울어대는 환희일진대
눈부시어라
그 날을 네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
어서 오라
어서 오라 춤추는 빛발 아니고 그 무엇이리
여기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에 이어
삼천리 강토
수수천만 온갖 산 온갖 봉우리
온갖 골짜기
그 이름을 부른다
지난 날 이 겨레 극심하게 잃은 것들
기어이 칮아내는 기쁨으로
이름없는 모든 것 다
이름 붙여
그 이름 새로 부른다
이 나라 온통 하나의 백두산인 그 날을
네 이름으로
네 이름으로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른다
이여
이여
이여
이여
이여....

 

55.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56.  우리 앞이 모두 길이다 (신은 우리 편이 되어야 합니다) / 이성부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야 할 곳이 어디쯤인지
벅찬 가슴들 열어 당도해야 할 먼 그곳이
어디쯤인지 잘 보이는 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가로막는 벼랑과 비바람에서도
물러설 수 없었던 우리
가도 가도 끝없는 가시덤불 헤치며
찢겨지고 피 흘렸던 우리

이리저리 헤매다가 떠돌다가 

우리 힘으로 다시 찾은 우리 

이제 비로소 길이다
가는 길 힘겨워 우리 허파 헉헉거려도
가쁜 숨 몰아쉬며 잠시 쳐다보는 우리 하늘
서럽도록 푸른 자유
마음이 먼저 날아가서 산 넘어 축지법!
이제 비로소 시작이다 *

 

57. 이 세상의 긴강 / 마종기

 

며칠 동안 혼자,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가는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깊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몸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 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법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갑옷의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58. 노트북 연서 / 김후란

 

허공에 떠도는
언어의 축제
클릭한다
침묵의 대화로
사랑을 나눈다
목이 마르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다
젖은 글씨로 쓴
편지를 받고 싶다
살아있는 연인이고 싶다

 

59. 밥을 멕이다 / 정진규

 

어둠이 밤새 아침에게 밥을 멕이고

이슬들이 새벽 잔디밭에 밥을 멕이고 있다

연일 저 양귀비 꽃밭엔 누가 꽃밥을 저토록 간 맞추어 멕이고 있는 겔까

우리 집 괘종 붕알시계에게 밥을 주는,

멕이는 일이 매일 아침 어릴 적 나의 일과였던

생가에 와서 다시 매일 아침 우리 집 식구들 조반을 챙기는

그러한 일로 하루를 열게 되었다

강아지에게도 밥을 멕이고

마당의 수련들 물항아리에도 물을 채우고

뒤꼍 상추, 고추들 눈에 뜨이게 자라오르는

고요의 틈서리에도

봄철 내내 밥을 멕였다

물밥을 말아주었다

 

60. 살다가 보면 / 이근배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61. 조국(祖國) /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 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어 학처럼만 여위느.

 

 62. 풍경 / 김제현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무상無上의 별빘
,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63. 찔레꽃 / 허영자

 

가시와 꽃이

위태롭게 나란히

적의와 관능이

부딪칠 듯 나란히

울음과 웃음을

한 가지에 머금은

모순의 향기

하얀 찔레꽃.

 

64. 이 시대의 시쓰기 / 이승훈

 

물론 이승훈 씨는 시를 쓰신다

언어가 있기때문이다

언어라? 언어라? 언어라?

도대체 언어란 무엇인가? 그는 언어 때문

에 시를 쓰지만 언어 때문에 실패의 연

속이다 언어 유리디체여 그녀를 돌아보면

안된다 차라리 불을 지르라 물론 어려울 것

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훔쳐오기 그렇

다 이제 그는 유리디체를 훔친다 그가 읽은

, 그가 읽을 책, 그리고 최근의 경험,

라빠진 현실, 엉터리 꿈, 한낮에 졸고 있

던 약방, 카페에서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던 사람(얼마나 고맙던가?) 그는 작은

일에 약하다 말하자면 예민하다 그의 예

민성은 신경증이 되고 우울증이 되고, 신경증

엔 히스테리와 강박증이 있고, 우울증이 도

지면 의기소침해지고 그러나 우울증엔 여러

가지 유형, 험담을 하는 유형(최근에 그를

괴롭힌, 따라서 그를 즐겁게 한 여자가 이

유형임), 험담은 병이 아니라 이 시대의

상식이다 험담을 하고 모함을 하고 인간들은

우울증을 극복한다 그도 극복한다 우울증 환자

가운덴 알코올 중독자도 있고 투전꾼도 있고 약

물 중독자도 있고 요컨대 이승훈 씨가 쓰는 시는

우울증의 산물이다 오오 우울증이 무슨 죄란 말

입니까? 그는 불안이라고 하지만 아마 우울증

일 것이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우울증

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불안하면 도둑질도 한

다 무슨 짓을 못하랴? 그는 오늘도 그가 읽은 책

에서 언어를 훔치고 창문도 훔치고 종이도 줍고 물

론 불을 지를 순 없으리라 언어 속에서 언어를 훔

치는 이승훈 씨여 언어라는 아파트에서 그는 가

구나 물건들(예컨대 재떨이, 신발, 양말,

, 낡은 셔츠 등)을 훔친다 도둑질을 한다 그는

염치도 없이 염치도 없이 훔친다 벼락처럼 훔

친다 이젠 자신도 훔친다 그도 언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쓴 책 속에 그가 있다 이 시대의

시쓰기는 도둑질이다 자연파 시인들은 자연을 훔

치고 나 같은 자칭 언어파 시인들은 언어를 훔친

다 오오 표절 속에 표절 속에 2월이 간다 김춘수

선생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시에는 '가도

가도 2월은 2월이다'는 시행이 나온다 정말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낡은 시도 많고 새로운 시도 많고

나처럼 조금 미친 이승훈 씨도 있고 겨울 저녁 불을

켜고 앉아 언어를 훔치는 시인도 있다 그럼 이승훈

씨여 부디 분발하기 바란다

 

65. 푸른 하늘과 붉은 황토 / 조태일

 

아내와의 모든 접선도 끊어버리고

말 배우는 어린 새끼들과의 대화도 끊어버리고

나를 가르친 모든 책으로부터도

중고가 돼버린 철없는 장난감으로부터도

멍청한 가구들로부터도 떠나버리자.

아이고 무서워

아이고 무서워

그림자를 고요히 고요히만 밟혀주는

달빛 별빛으로부터도,

무수히 발바닥을 포개보던

광화문이며 종로며 태평로로부터도

자유다 평등이다 인권이다 민주다 의무다 국민이다

어쩌고 하는 한국적 표준말로부터도 떠나버리자.

아이고 무서워

아이고 무서워

망우리 근처 푸른 하늘 밑의 풀잎들은

그렇게 푸르기만 하며

푸른 하늘 밑의 황토들은

그렇게 붉기만 하며

푸른 하늘 밑의 무덤들은

그렇게 고요히만 누웠냐

아이고 무서워

아이고 무서워

바람 자고 소리 끊겨 고요하기는 해도

끝간데없는 푸른 하늘은 저리 답답하단다.

푸른 풀들이 흔들리긴 해도

하늘 밑에 깔린 황토들은 저리 답답하단다.

 

66. 우리들의 우산 / 김종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빗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리들 우산 안으로 들어와 있다

잠시 접혀 있는 우리들의 사랑 같은

우산을 펴면

우산 안에서 우리는 서로 젖지 않기

외로움으로부터 슬픔으로부터 서로 젖지 않기

물결 위로 혹은 꿈 위로 얕게 튀어오르는

빗방울 같은 우리 시대의 사랑법 같은

우산을 받쳐 들고 비 오는 날 우산 안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가기

비는 내려서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로 흘러가지만

정작 젖는 것은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다

우산 하나로 이 빗속에서 무엇을 가리랴

비를 가리기 위해 우산을 펴면

물방울 같은 서정시 같은 우산 속으로

바람이 불고

하늘은 우산만큼 작아져서 정답다

아직 우리에게 사랑이 남아 있는 한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은

하늘 같은 우산 하나

누구에게나 있다

 

67. 화엄벌판 / 이상범

 

억새꽃이 나부끼며 빛을 끌어당긴다

몸 비벼 금빛 띠고 다시 비벼 은빛 띠는

아직도 섬찍섬찍한 그 말씀의 영락소리

아득한 변방에서 물소리가 산을 오른다

망루의 높이에서 가슴을 치는 골물

내 눈빛 맑게 바래어 흩고 있는 억새꽃.

정수리 찍어대면 샘물 터져 뿜을까

좌대에 눈감으면 그 여운의 높은 파고

잃은 것 얻은 것 없는데 밀짚모자 홀로 간다.

가을 하늘 한 장 떼어 거울경문 걸어 두면

뉘이며 일어서는 비늘 빛 화엄설법

육신은 보시로 올리고 바람 속에 듣는다.

68. 편지 / 김초혜

 

먼저 핀 꽃도

나중 핀 꽃도

모두 다 지는 꽃이라

그대가 어제 피운 꽃 한 송이

오늘은 내게 와서 지고 있다
 

69. 너를 위한 노래 / 신달자

 

바람 부는 겨울

새벽 역두에 나가고 싶다.

쫓겨난 여자처럼 머리카락을 날리며

긴 코트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느린 걸음으로

역두를 서성이고 싶다.

그대여 그런 날 새벽에

우연히 널 만날 수는 없을까

나는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약속 없는

너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내가 탈 기차를 보내고

그 다음의 기차를 보내며

시린 가슴으로 떨고 있을 때

두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너를 만날 수는 없을까

새벽 역두에 나가고 싶다.

찬비 뿌리는 새벽

우산을 받쳐들고 역두를 서성이면

멀리 보이는 불빛들의 젖은

그림자 일렁이는 무늬 속으로

너는 보이고 그리고 없고

그러나 나 결코 떠나지 않으며

너를 기다리며

바람과 함께 흔들리며

비와 함께 떨어지며

너를 기다리며 그렇게

참으로 어리석은 낭만을 믿으며 나는

겨울 역두에 서 있고 싶다.

늦은 밤 자정인들 어떠랴

축축이 젖은 채로

널 우연히 만날 수만 있다면.

 

70. 노래의 자연 / 정현종

 

<사물의 꿈>- 정현종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1.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 정현종

한 처녀가 자기의 눈 속에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남자와
풍경 사이에서 깜박거린다
남자일 때 나는
말발굽 소리를 내고
풍경일 때 나는
다만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우리 눈동자도 돌리시느니
한 남자가 자기의 눈 속에서
처녀를 바라본다


2.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71.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72. 나는 내가 낳는다 / 유안진

 

누구의 유전자에도 오염되지 않은

무염시태(無染始胎)의 나는

내가 잉태하기로 했다

다시 태어나야 진정한 내가 될 수 있거든

나는 자궁을 가졌거든

누구의 간섭 어떤 의무도

어떤 관습에도 감시당하지 않고

어떤 규범에도 검토당하지 않는

모든 순치를 거부한 나를 살며

처음부터 끝까지 나로서만 살게 될 새로운 나는

아무도 낳아 줄 수 없으니까

성스러운 사랑과 추악한 스캔들은 동전의 양면이니

성스럽지도 추악하지도 말거라

저 나가 되기 위해서나 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부디 이 나를 배반하거라

나의 태아기는 280일로는 태부족이리니

무한 기다리리라

태초의 아담보다 더 최초의 나이기 위해서는

 

73. 눈 내리는 마을 / 오탁번

 

건너 마을 다듬이 소리가

눈발 사이로 다듬다듬 들려오면

보리밭의 보리는

봄을 꿈꾸고

시렁 위의 씨옥수수도

새앙쥐 같은 아이들도

잠이 든다

꿈나라의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밤마실 나온 호랑이가

달디단 곶감이 겁이나서

어흥어흥 헛기침을 하면

눈사람의 한쪽 수염이

툭 떨어져서 숯이 된다

밤새 내린 눈에

고샅길이 막히면

은하수 물빛 어린 까치들이

아침 소식을 전해 주고

다음 빙하기가 만년이나 남은

눈 내리는 마을의 하양 지붕이

먼 은하수까지 비친다

 

74. 바지락 줍는 사람들 (모두를 위한 시간) / 이가림

 

바르비종 마을의 만종 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 복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맞추는

간절함이여

거룩하여라

호미 든 아낙네들의 옆모습

 

75. 질라래비훨훨 / 윤금초

 

별똥별 튀밥같이 어지러이 흩어질 때

어둑새벽 등 떠밀며 달려오는 먼 산줄기

풍경이 풍경을 포개어 굴렁쇠 굴려 간다.

자궁 훤히 드러낸 회임(懷姙)의 연못 하나

제각기 펼친 만큼 내려앉은 햇살 속으로

염소 떼 주인을 몰고 질라래비, 질라래비...

이 땅의 잔가지들 손잡고 살 비비는가.

질라래비훨훨, 질라래비훨훨, 활개 치는 풀빛 아이들

봄날도 향기로 와서 생금가루 흩뿌린다.

 

76.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 이건청

 

한때, 나는

무당벌레가

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등허리에

선연한 7

 

검은 반점을 찍고

푸른 갈대 잎에

매달린 채

이슬에 젖고 싶은

때가 있었다.

 

77. 마음하나 / 조오현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놓아도

한 티끌 겨자씨보다

어쩌면 더 작을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다더라

 

78. 천년의 잠 / 오세영

 

강변의 저 수 많은 돌들 중에서

당신이 집어 지금

손 안에 든 돌,

어떤 돌은

화암사(禾巖寺) 중창 미타전(彌陀殿)의 셋째 기둥 주춧돌 로

놓이기를 바라고,

어떤 돌은

어느 시인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그의 빈 원고지 칸을 지키기를 바 라고

또 어떤 돌은

어느 순결한 죽음 앞에서 만대(萬代)의 의()를 그의 붉 은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지만

, 나는 다만 당신이

물 수재비 뜨듯 또 다시 강가에 나를

팽개치지 않기만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천년의 잠은

죽음보다 더 잔인할지니

흙 위에 엎드려 잠들기 보다는

급류 속의 일개

징검다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님이여, 장난 삼아 던질 양이면 차라리

거친 물살에 던지시라.

그리하여 먼 후일 당신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나는 즐겨 내 몸을 당신 앞에 바치리니

당신은 주저 말고 내 등을

밟고 건너시기를------.

 

79. 캘린더 호수 / 서정춘

 

나에게는 참개 밭의 꿀벌 같은

하도나 이쁜 늦둥이 어린 딸이 있어

오늘은 깨잘도  입에 달아주면서

캘린더 걸어놓고 숫자를 읽히는데

아빠

2는 오리 한 마리

아빠

22는 오리 두 마리

아빠

우리 함께 호수공원에 갔을 때

뒷놈 오리가 앞놈을 타올라 물을 먹여 주었어요

히길래설랑

나는 저런저런 하다가

나도 호숫가 물소리로 그럼그럼 했더라

 

80. 막다른 골목 / 강은교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 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 숨 막히는 삶


출처 : 무자천서 (자연의 책)
글쓴이 : 바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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