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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학문(學問)과 Francis Bacon (프랜시스 베이컨)

대한유성 2018. 12. 20. 10:55

" 책이 학문을 따를지언정 학문(學問)이 책을 따라서는 안된다.

역사는 현명하게 하고,

수학은 예민하게 하며,

理學(이학)은 深遠(심원)하게 하고,

윤리학은 重厚(중후)하게 한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만들어내듯

습득한 남의 지식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자기 학문을 창도해야 한다.

 

교활한 사람은 학문(學問)을 경멸하고,

단순한 사람은 학문(學問)을 찬양하며,

현명한 사람은 학문(學問)을 이용(利用)한다." - F.  베이컨

 

Francis Bacon (프랜시스 베이컨)

1561.1.22. ~ 1626.4.9.

영국 고전경험론의 창시자

1617.3.7 중세 영국 국왕의 최측근 관직, 옥새상서에 오르다

서양철학사를 통틀어 최고위 관직에 올랐던 인물을 꼽는다면

단연 프랜시스 베이컨일 것이다.

그는 제임스 1세

그러나 그 영광의 기간은 짧고 허망했다.

그의 진정한 영광은 과학적 귀납법을 제창한 ‘노붐 오르가눔’과

학문 개혁에 뜻을 두어 집필한 ‘학문의 진보’ 등의 저술을 통해 철학사에 길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의 기간은 짧고 허망했다.

그의 진정한 영광은 과학적 귀납법을 제창한 ‘노붐 오르가눔’과

학문 개혁에 뜻을 두어 집필한 ‘학문의 진보’ 등의 저술을 통해

철학사에 길이 남겨져 있다.

 

아버지에 이어 옥새상서가 되어 태어났던 관저로 다시 들어가다

중세 영국의 궁정 고위 관직인 옥새상서(玉璽尙書. 또는 국새(國璽)상서)는

국왕의 인장을 보관, 관리하면서 국왕의 명령을 공식화하는 책임을 맡았다.

 

국왕의 명이 공식화되려면

옥새상서의 승인을 거쳐 옥새를 공문서에 찍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책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옥새상서는 국왕의 최측근 관직으로

국왕의 뜻과 명령을 하늘처럼 받들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리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1617년 3월 7일 제임스 1세에 의해 옥새상서로 임명됐다.

지난 날 자신의 아버지가 맡았던 자리,

그러나 잡을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늘 저 멀리에 있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옥새상서가 됨으로써

베이컨은 자신이 태어났던 템즈 강변의 요크 하우스,

즉 옥새상서의 관저로 들어가게 되었다.

 

베이컨의 영광과 출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1618년 젊어서부터 열망해마지 않던 대법관이 되었으며,

 ‘벨럼의 남작’으로 귀족원에 진입하고 ‘세인트 엘번스 자작’이 되었다.

이러한 출세 길은 제임스 1세가 등극한 1603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베이컨은 기사 작위를 받았고

이듬해 국왕의 법률고문이 되었던 것.

철학자로서 베이컨의 주저로 평가 받는 ‘노붐 오르가눔 (Novum Organum)’이

1620년에 출간되었으니, 권력의 정점에서 그의 철학도 만개한 셈이라 할까.

 

“저는 모든 지식을 제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

설령 각하께서 저를 기용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깊은 곳에 놓인 진리의 광맥을 뒤지는 참된 선구자가 될 것입니다.”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모부 윌리엄 세실 경에게

1592년 베이컨이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라면

돈과 권력을 다 내놓아도 좋다는 것이 과연 그의 진심이었을까?

입신출세의 야망과 진리의 광맥을 뒤지려는 열망.

그는 이러한 야망과 열망을 모두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과연 뜻을 이루었을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젊은 옥새상서'라 불리다

  베이컨이 태어날 무렵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옥새상서와 대법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국왕의 최측근 총신이었던 것.

더구나 베이컨의 이모부 윌리엄 세실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573년 12살 때 형 앤소니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 베이컨은

3년 간 공부한 뒤 그레이인 법학원에 입학했다.

 

케임브리지 시절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를 만나게 되는 데,

당시 여왕은 베이컨의 남다른 지적 능력에 감탄하며

청소년 베이컨을 ‘젊은 옥새상서’라 일컬었다.

 

법학원 공부 도중

베이컨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를 보좌하면서

프랑스 각지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했다.

 

157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귀국해서 법학원에 복귀한베이컨은

1582년 법정변호사 자격 취득,

1586년 법학원 대표위원,

1588년 법학원 교수,

1600년 법학원 정교수가 됐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상속 재산 가운데 베이컨 몫은 적었다.

낭비벽이 심한 베이컨은 이때부터 많은 돈을 빌리기 시작해 늘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다.

베이컨은 출세욕이 남달랐다.

 

1581년 20살 나이에

콘월 주 의원직을 승계하고의욕적으로 의회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베이컨의 경쟁자로 떠오른 인물은

공교롭게도 이종사촌 동생 로버트 세실, 즉 이모부 윌리엄 세실의 아들이었다.

궁정 고위 관리로 출세하려면 권력자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모부는 자기 아들을 챙기느라 베이컨의 후견인이 될 가능성이 없었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던 2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브로와

돈독한 친분을 쌓았지만 이번에도 이모부가 걸림돌이었다.

 

베이컨은 법무장관이 되고 싶어 했지만

1593년 이모부가 후원하는 에드워드 코크에게 밀렸고

법무차관 지명에도 실패했다.

 

에식스 백작은 베이컨을 위로하기 위해

트위커넘에 있는 자신의 부동산을 베이컨에게 선물했고,

베이컨은 이를 팔아 1,800 파운드(현재 가치로 대략 24만 파운드)의 돈을 벌었다.

 

1590년대는

베이컨에게 ‘여러 사람의 재능을 통솔하는 지위, 권력은 있지만 충돌은 적은 자리’에

오르려는 욕망을 채울 수 없었던 좌절의 시기였다.

1598년에는 채무 불이행으로 체포되기까지 했다.

후견인 에식스 백작은 에스파냐 보물선 나포에 실패하고

아일랜드 반란 진압에도 실패하면서 여왕의 신임을 완전히 잃었다.

궁지에 몰린 에식스 백작은

1601년 여왕과 자신 사이를 이간질하는 무리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병력을 이끌고 런던에 진입했지만,

실패하고 반역 재판에 회부된다.

 

권력의 정점에서 부패 혐의로 실각, 런던 탑에 갇히다

여왕은 에식스 백작의 후원을 받는 베이컨도 불신하고 있었지만

반역 재판을 맡을 검찰관의 한 사람으로 그를 임명했다.

베이컨은 자진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피고인을 엄격하게 압박했다.

 

결국 1601년 2월 25일

에식스 백작은 참수 당했다.

 

베이컨 입장에서는 에식스 백작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염려하여

더욱 발 벗고 나섰다고도 볼 수 있다.

 

베이컨이 제임스 1세의 등극과 함께

빠른 출세가도를 달린 일은 이미 말했다.

 

자신의 저서를 제임스 1세에게 헌정하면서

함께 보낸 편지에서 베이컨이 아뢴다.

“이성의 경계를 확장하고 인간의 운명에 새로운 가치를 선물하는 일이야말로,

만인 중 이성의 가장 위대한 주인이시며 시혜의 주관자이신 폐하께

가장 어울리는 봉헌이나이다.”

이 헌정 편지에 제임스 1세는 크게 흡족해하며 답장까지 보냈다.

군주와 신하가 이렇게 친밀할 수 있을까.

밀월이라 해도 좋을 이러한 관계는 그러나 급작스럽게 바뀌고 만다.

 

1621년 5월

베이컨은 뇌물수수를 포함한 20여 건의 부패 혐의로

의회의 탄핵을 받고 기소 당했다.

낭비가 심했던 베이컨은 고위 관직에 오르면서 공공연히 금품을 받아 챙겼다.

특히 법관으로서 소송 당사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쁜 것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자신이 비록 금품을 받았을지언정

그것이 판결에 실제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당시 영국 정치 상황은

왕실과 의회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왕실의 특권을 앞장서 옹호했던 베이컨은

의회의 공격 목표가 되어 있었다.

 

베이컨은 결국 공직을 박탈 당하고

4만 파운드의 벌금형을 받고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6월 23일 고르햄베리의 옛집으로 옮겼다.

악화된 건강을 치료하기 위해 런던을 방문할 때를 제외하면,

베이컨은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연구와 저술에 전념했다.

 

필생의 목표인 6부작 '학문의 대혁신'을 완성하기 위해 선택한 권력의 길?

권력과 영광의 정점에서 급전직하한 베이컨의 삶은 불우했다.

빚에 시달려야 했고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사실상 이혼 상태가 되었으며

건강은 날로 악화됐다.

 

1626년 3월,

여느 때처럼 진료 받으러 런던에 갔다가 마차를 타고 집으로돌아오던 길이었다.

베이컨은 눈(雪)으로 부패를 지연시키는 실험을 해보려는 마음을 먹고

한 오두막 앞에 마차를 정지시켰다.

닭을 구해 죽인 뒤,

닭의 사체 안에 눈을 넣고 바깥도 눈으로 덮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마차에 올라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이컨은 극심한 오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집까지 못가고 근처 하이게이트에 있는 아룬델 백작의 집에 머물며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병세가 악화되어

1626년 4월 9일 부활절 일요일 아침,

베이컨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재산은 7천 파운드였고 빚은 2만2천 파운드였다.

 

베이컨은 권력욕과 부패 때문에 조롱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자도 권력을 탐하고 부패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인물로

그를 들기도 한다.

 

그러나 입신출세를 향한 베이컨의 물불 안 가리는 행태가

사실은 필생의 목표인 6부작 ‘학문의 대혁신(Instauratio magna)’을 완성하고,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둔 학문을 진흥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권력의 길이

지식의 길을 위한 방편이자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를 받아들이기에는

베이컨의 권력과 부를 향한 추구가 너무도 강해 보인다.

또한 이 견해를 완전히 물리치기에는

베이컨의 학문과 지식의 혁신을 향한 추구가 너무도 진지해 보인다.

진실은 베이컨 자신만이 알고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대항한 귀납법 제창

1620년에 출간된 베이컨의 주저 ‘노붐 오르가눔’은

영어로 ‘New Organ’, 우리말로는 ‘새로운 기관’ 또는 ‘신기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와 업적을 통틀어 ‘오르가논(Organon)’이라 하는데

‘노붐 오르가눔’은 바로 그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논리학, 즉 새로운 학문 방법을 뜻한다

(라틴어의 organum은 기관, 방법, 논리, 규준 등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은 ‘새로운 학문 방법과 논리’로 번역할 수도 있다.

 

‘노붐 오르가눔’은

베이컨이 집필을 계획한 전 6부작 ‘학문의 대혁신’ 중에서 제2부에 해당한다.

그는 계획한 6부를 모두 완성하지는 못했고

이 책을 포함하여 3부만 완성할 수 있었다.

 

그가 계획한 6부작 저서는

인류가 지닌 모든 지식의 일람표였다.

 

그는 인류의 지식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을 보충해야 하는지 밝힘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과 수단을 확장시키고자 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베이컨의 말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노붐 오르가눔’에서 제시한 새로운 방법과 논리란 귀납법이다.

 

그는 개별적인 사례들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관찰, 조사하여

보다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 내고,

최후에는 가장 일반적인 명제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바로 귀납법이라고 보았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 반대한 까닭은

그것이 귀납법이 아니라 연역법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삼단논법을 떠올려 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베이컨은 인간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이성적 동물이다.

 

이러한 삼단논법은

명제들 사이의 관계만을 이야기할 뿐, 새로운 지식을 알려주지 못한다.

베이컨이 인간인지 아닌지,

인간이 이성적 동물인지 아닌지

자세히 관찰하고 조사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관찰이나 실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명제는'우상(偶像)일 뿐이다

베이컨은 실제의 관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열(熱)의 본질,

즉 형상을 찾으려면

1. 열 현상의 모든 경우들을 열거한 일람표를 만든다.

2. 열이 나타나지 않는 모든 경우들의 일람표를 만든다.

3.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열 현상도 다양할 것이므로, 열의 정도 일람표를 만든다.

4. 열과 상관없는 성질들을 배제시킨다.

5. 열이 비교적 순수하게 나타나는 특징적 사례를 고려한다.

이러한 일람표와 사례들을 비교, 검토,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열의 본질을 알 수 있다.

 

관찰이나 실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일반적인 명제를 ‘우상 (이도라 idor)’으로 지목했다.

우상은 참된 지식에 접근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편견이자 선입견이다.

그가 말하는 우상은 잘 알려져 있듯이 네 가지다.

 

1. 종족의 우상(idola tribus)은

인류라는 종(種)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우상이다.

자연을 사람에 비기어 생각하는 것,

즉 의인화시켜 설명하려는 경향이 대표적이다.

 

2. 동굴의 우상(idola specus)은

개인의 특성, 성질, 습관, 교육, 직업 등에서 비롯된다.

한 사람이 자기만의 동굴 안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3. 시장의 우상(idola fori)은

언어의 부당한 사용에서 생긴다.

예컨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 만들어져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4.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은

권위나 전통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에 의지하는 데서 생긴다.

 

그가 저술한 <학문의 진보>는

방대한 유작 가운데 유일한 완성품이자,

그의 전 체계의 밑그림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철학자, 정치가, 과학·교육 방면의 개혁가로서 베이컨이 제안한

`근대적 프로그램`의 특징들을 다각도로 검토할 수 있게 해주며,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근대적 정신의 이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1권에서는

학문과 지식의 탁월함과

이를 논증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과 참된 영예의 탁월함에 대해 말한다.

또한 학문에 대한 오해나 비방에 대해 귀납법에 따라 반박을 펼친다.

2권에서는

본격으로 학문의 진보에 대한 논의에 들어간다.

베이컨은 먼저 국가가 학문의 진보를 위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학자들의 생계해결이나 연구를 위한 기구 설립 등

국가의 노력이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2권에서

베이컨은 철학, 신학, 역사학, 수학, 논리학, 윤리학, 형이상학과 같은 학문은 물론

정신, 질병, 전달의 방법, 선(), 시민사회 같은 일반 주제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분류 가능한 모든 학문과 지식을 분류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당대 지식세계 전체를 통관한다.

출처 : 한자 문화 뜨락
글쓴이 : 시너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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