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만자로는 높이 5,895m의 아프리카 최고봉입니다. 그리고 정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만년설로 더욱 신비로운 산입니다. 나는 적도의 만년설이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듣기 위하여 킬리만자로에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며 해
저무는 아프리카의 초원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마사이족 사람들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구름이 걷힌다고 장담해주었고 또 이미 정 상의 흰눈이
반쯤 구름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정상부근에 얼어죽은 표범의 시체가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헤밍웨이가 그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서두 에 화두처럼 던져 놓은 구절입니다. 마침 내가 찾아온 암보셀리
국립공원은 헤밍웨이가 머 물어 그 소설을 집필한 곳입니다. 나는 표범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표범이
킬리만자로의 꼭대기, 만년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기도 합니까?- '올라가지 않습니다. 눈이 있는 곳은 적어도
5천m이상이니까요." -만년설 부근에서 혹시 한 번쯤 표범의 시체가 발견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가장 높이 올라가는 동물이
원숭이 입니다만 원숭이도 4천m이상은 올라가는 법 이 없습니다.' -혹시 정신병에 걸린 표범이 올라갔다고 볼 수는
없을까요?- '천만에요. 동물은 정신병에 걸리는 법이 없을 걸요? . . . . 정신병은 사람들만 걸리는 병일
걸요?'
사람만이 정신병에 걸린다는 말에 나는 더 이상 물어볼 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여기 저기 한가롭게 초원을 걷고 있는
동물 떼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빈손 맨발'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을 빼앗길만한 물건들을 소유하는 일이 별로 없을 것같았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한 남자의 죽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탕자(蕩者)라고 할 수는 없을 지 모 르지만 결코 정직하게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유럽의 지식인이 원시의 땅
아프리카의 오지에 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죽음을 맞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헤밍웨이가 그의 죽음을 통하여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 고 있습니다만 해 저무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문득 얼어죽은 표범이 혹 시 아프리카의 대각점(對角點)에 있는
유럽의 '문화'와 '도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 니다. 우리의 문화와 도시는 사슴이나 얼룩말 같은 초식동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이러
한 초식동물들을 먹이로 삼는 육식동물로 살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표범으로 살아 온 역 사라 할 수 있습니다. 킬리만자로에서 얼어죽은 표범이
문득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 온 동물사파리 관광객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느낌입니 다. 가장 가고 싶은
나라가 바로 동물의 왕국 케냐라는 설문조사가 말해주듯이 수많은 사 람들이 도시문명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이곳을 찾아옵니다. 만년설을 찾아가는
지친 표범 같습니다.
도시는 한마디로 '반자연 공간'(反自然 空間)입니다. 자연을 거부하며 자연과 끊임없이 싸우 는 공간입니다.
내가 방문한 여러 도시들에서 받은 인상이 그랬습니다. 도시가 문화공간이 며 역사공간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연으로부터의 거리를 문화의
높이로 계산하 고 있는 것이 도시의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나 돈 없는 도시의 모습은 돈 없는 사람의 모습 보다 훨씬 더 초라하였습니다. 단
하루라도 닦고, 쓸고, 때우고, 칠하지 않으면 금새 회색의 공간으로 남루하게 변해버리는 것이 도시였습니다. 나는 서울을 떠날 수 없는 당신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복고적 메시지를 띄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항대립의 도식으로 문명사를 농단할 수도 없지만 이곳 아
프리카에서는 그 광활한 자연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가슴아프게 하는 자연의 황량함을 끊 임없이 목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황량한 초원에서 선 채로
밤을 맞이하고 있는 얼룩말떼는 내게 충격이었습니다. 이 막막한 초원에서 그들은 서서 자고 있었습니다. 전혀 몰랐던 일은 아니었고 또 그것이 곧
자연이 라고는 하지만 육중한 아프리카의 어둠속에 묻혀가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한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암보셀리 롯지에서 우연히 만난
한 마리 원숭이와의 독대도 나의 생각을 한없이 휘저어 놓 았습니다. 멀고 먼 아프리카의 들판에서 잠시동안 마주한 그와의 독대는 실로 우연의 극치
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에게도 나와의 만남은 우연이고 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는 잠시동안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모르고 그도 또한 모 기에 물린 나의 말라리아 걱정을 알지 못합니다. 원숭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사이족 마을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어린이도 마찬가지입니 다. 잿불에 구운 감자 알같이 새카맣게 먼지 찌들은 아이들의 이마를 들여다 보면서 우리 들에게는 서로 나눌 수 있는
기쁨이나 슬픔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아득한 거 리감과 쓸쓸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쓸쓸함이면서 동시에 허전한 자유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것이 자유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아마 이 아프리카대륙의 황막한 자연의 원시공간에서 깨닫 는 개체로서의 나자신의 무게가 깃털만큼이나 가벼웠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프리카의 초원에는 누가 심지도 않은 외나무들이 띄엄띄엄 눈에 뜨입니다. 하나같이 키 작은 우산입니다. 거꾸로
든 우산 같은 모양도 있습니다. 나무는 빗물 때문이라고 대답했습 니다. 인색한 빗물을 한 방울이라도 더 받으려는 자세라고 하였습니다. 발밑의
물기를 조금 이라도 더 오래 갈무리하려고 나지막이 팔 벌여 그늘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절실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물은 간절한 소망이면서 생명이었 습니다. 내가 만난 원숭이나, 마사이족 마을의 어린이나, 한 포기 푸나무
그리고 비록 선채 로 비맞으며 잘 수밖에 없는 얼룩말들에게도 물은 생명이고 소망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대륙을 비행하면서 내려다보면 하얗게 멈추어
선 모래강을 내려다 볼 수 있습 니다. <흐르지 않는 모래강> 저 강에 다시 물 흐르게 할 수는 없을까. 모든 표범들의 값비 싼
무기를 강물로 만들어 흐르게 할 수는 없을까. 나는 만년설부근에서 얼어죽은 표범과 함께 이 메마른 모래강에 목을 대고 죽어 있는 목이 긴 사슴을
생각합니다. 표범과 사슴이 동시에 구제되는 방법은 없을까? 아프리카에서 달리는 생각이 부질없기가 이와 같습니다. 잠못이루는 아프리카의 밤은
참으로 찬란합니다. 어느 하늘 구석이든 잠시만 시선을 멎으 면 거기 가득히 별이 쏟아져 내립니다. 시선을 타고 쏟아져 내린 별들은 나의 가슴에
와서 분수처럼 퍼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