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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문화의 상식<4>연중풍습 & 城

대한유성 2013. 1. 20. 04:58

 

4. 연중 풍습

설날 음식

우리나라와 같이 설날 제사가 없으므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신년을 맞이하면 오세치(オセチ)라고 하는 특별요리도 먹기도 하고, 길게, 오래오래 장수를 기원하고 행복을 뜻으로 소바(そば)를 먹기도 하는데 이 때 먹는 소바를 토시코시소바(と しこしそば)라 한다.

그리고 나서 신사를 찾는데 보통 3곳을 참배하고 돌아와 이 대부터 푹 잔다.

소바 이외에 죠우니(雜煮, 찹살떡 떡국)가 있는데 이것은 섣달 그믐날 새해를 여는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다. 설날이 되면 이 음식을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신에게 바치는 음식이 므로 年男(토시오토코, 연장자)가 만드는 것이 풍습이다.

오토시다마(お年玉, 세뱃돈)

세뱃돈 전용 작은 봉투가 있어서 그 안에 넣어 나누어 준다. 우리나라와 같이 그냥 돈을 손에 쥐어주는 일은 없다. 복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일도 없다.

카키죠메(書き初め, 신년휘호)

그 해의 이미지를 장식하거나 기원하는 뜻으로 글자를 하나 선택하여 국민이나 가족에게 알리는 것으로 천황이나 가장이 쓰는 글을 말한다.

히나마쯔리 : 3월3일에 여자아이들을 위한 ひな人形まつり.

여자 어린애에게 인형을 선물한다. 그 외에 베로된 조그만 인형을 종이배에 실어 강물에 뛰워 보낸다. 상당히 고가이다.

こいのぼり : 5월에 남자아이들을 위한 마쯔리. 잉어모양의 연을 선물한다.

4월부터 각 집에 장대에 잉어모양을 한 연을 장대에 걸어 놓았다가 5월 5일 후에 내린다.

오봉(お盆)

우리나라의 추석을 의미하며 메이지 유신 이전에는 일본도 음력으로 추석을 맞이하였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양력으로 오봉을 맞는다. 달력에는 휴일의 지정이 없으나 공무원을 제외 한사업체는 연휴이므로 고향으로 돌아가 제사는 없지만 하카마와리(조상의 유골무덤에 가 서 돌을 깨끗한 물로 씻고 딱아 낸다)를 한다.

고요우오사메(ご用納め, 종무식)

종무식을 말한다. 이날 1년을 마무리하는 대청소가 이루어진다. 전 직원이 자기 부서의 구 석구석을 깨끗이 정리하고 종무식을 갖게 된다.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 재야의 메밀국수)

매달 그믐날을 脢日(미소카)라고 하고 섣달 그믐날을 오오미소카, 오오쯔고모리, 오오도시, 죠야(除夜)라고 한다.

5. 성(城)

일본은 역사적인 산물로 각 현(옛날의 藩)에 성이 많으며 지어진 시대에 따라 각각의 특색이 있다. 그러나 전쟁과 화재 등으로 많은 성이 소실되었다가 2차대전 후에 복구된 성이 대부분이다.

현존하는 옛 모습 그대로의 성 : 姬路城(兵庫縣), 松本城(長野縣), 犬山城(愛知縣, 나고야),

彦根城(滋賀縣, 히꼬네), 松江城(島根縣)

나고야성(名古屋城)

이 나고야 성은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12년(慶長 17년)에 아들 德川義直의 거처로서 완성한 평지에 축성된 대표작품으로 유명(3대 평성: 나고야 성, 오카야마 성, 히로시마 성)하지만, 모모야마(桃山) 후기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원래는 이마가와(今川)가 1521년~1528년에 축성하였던 것으로 조선침략을 기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佐賀県 鎭西町에 나고야성(名護屋城)을 세워서 출병기지로 하고 임진·정유왜란(文祿·慶長의 役1592~98)을 일으켰으나 그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재 축조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천수각과 킨사치(金鯱)가 유명하다.

천수각에는 당시의 번주의 생활과 성아래의 생활등을 전시하고 소개하고 있다.

2차대전 때 소실된 것을 전후 1959년에 복구하였다. 天守閣 용마루에 설치된 2개의 킨샤치가 금18 K로 만들어졌는데 개당 45 여킬로그람 정도가 소요되었고 전체 중량은 1.3 톤

정도이며 처음에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미신적으로 설치되었다고 하나 후에는 성주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고 한다.

히메지성(姬路城)

히메지는 옛날 하리마지방의 중심지이다,

異 稱 : 히메야마성(姬山城), 시라사기성(白鷺城)

시 대 : 초축 1333년, 수축 1580년, 재축 1601년 , 모모야마시대에서 에도시대에 걸쳐서 완성

소재지 : 일본 효고현 히메지시 혼마치 (日本 兵庫縣 姬路市 本町)

규 모 : 23ha(내성)

대천수갓을 중심으로 3개의 소천수로 구성된 연립식 천수각.

지정사항 : 세계문화유산

최초로 성곽을 축성한 자는 호족인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가 1333년에 이곳에 요새를 만들고 그의 아들 사다노리가 1346년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 그 후 고테라씨와 구로다씨가 이 지역을 통치했다.

158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명령으로 모리(毛利) 정벌에 나선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른 이름)가 전투 준비를 위해 구로다 요시타카(黑田孝高)에게 토목공사를 맡기었고, 이소베 나오미츠(磯部直光)에게 건축공사를 시켜서 1581년에 3층의 천수가 세워졌다고 한다. 1600년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 이에야쓰의 사위)가 입성하여 1601년 대대적인 개축공사를 한 이후 현재와 같은 대성곽으로 변신하였다. 1618년 혼다 타다마사(本多忠政)가 입성하여 아들 타다도키(忠刻)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千姬, 오사카의 도요토미 히데요리 멸망시의 부인, 오사카성 공격시에 화재속에서 센히메를 구출한 사람은 조선출신 사카자키 나오모리라 한다.)를 부인으로 삼으면서 서측 구역(니시노마루 ; 西の丸)의 건물들을 대대적으로 개수한다. 니시노마루의 개축에는 토요토미가문의 후시미성에서 훔쳐온 건축자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300m의 긴 회랑을 이룬 건물 곳곳에는 시녀의 방이 있으며 맨 안쪽에는 센다.히메가 휴게실로 사용하던 케쇼야구라(化粧櫓)가 있고 그녀의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이 있다.

그 후 성주는 마쓰다이라씨, 사카키바라씨로 바뀌고, 사카이씨가 1749년 성주가되어 메이지유신을 맞았다.

히메지성의 모습은 두 개의 작은 구릉을 잘라내어 축성된 전형적인 평산성의 모양을 띠고 있다. 화살과 조총 등을 발사할 수 있는 개구부(狹間)가 설치된 무기창고·문·담을 지형에 맞게 조합시킨 구조를 살펴볼 때 히메지성은 전투를 위한 실전형 성곽시설로서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철포(조총)사격을 위한 시설이 지붕 밑에 설치되어 있다. 성곽 배치법에서 특이한 점은 침입한 적군이 방향을 잃도록 유도하는 각종 시설(三國濠 ; 산고쿠보리)과 함께 천수에 근접할 수 없도록 미로를 구성하고 있다.

현재, 다이텐슈와 3개의 쇼텐슈, 이들을 연결하는 와타리야구라(이상 국보)를 비롯해, 게쇼야구라 등의 성루 27동, 성문 15동, 흙담 약 100M(이상 중요문화재)의 건조물과 내호, 중호의 대부분이 남아 있고, 중호이내는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쌰치호코 (鯱)

일본 옛 날 성의 天守閣(성주가 거주한 제일 높은 집) 용마루 鷲頭(우리나라에서는 하늘의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전통 건축물 용마루양쪽에 얹는 상징적 장식물)에 설치한 쌰치호코 (鯱, 金鯱, 킨샤치 :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부적으로 성 지붕의 용마루 양끝에 다는 머리는 호랑이 몸은 등에 가시가 서 있고 꼬리는 고래꼬리가 치켜 올린상상의 동물모양의 부적이 유명하다.

물고기는 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화재를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보통 성의 용마루 끝에 장식하고 있으나 지방(시고꾸의 무로또지방)에 따라서 일반 가정의 건물에도 설치된 곳이 있다.

코시꾸루와(腰曲輪)

둥근 곡선의 기다란 창고. 우물은 물론 장기 농성에 필요한 소금, 쌀 저장고.

텐슈가꾸(天守閣) : 모모야마 시대에 많이 지어진 성의 중심이 되는 고층누각.

지상 6층, 지하 1층 건물로 지름 1m의 거대한 기둥나무 기둥 2개가 떠받치고 있다.

이 기둥의 하나는 둥근형이고 하나는 사각의 기둥으로 되어 있다.

1581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세웠고 이 후 이케다 데루마사가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했다.

꼭대기의 조그만 신사는 축성할 당시 성밖으로 이전 시켰으나 신의 재앙이 두려워 다시 성내로 들여왔다 한다.

어린이들이 겨울이면 즐기는 팽이 놀이는 히메지가 원조라고 한다.

오사카(大阪)

현재의 오사카는 明治이전까지는 大坂이라고 표기하였으나 明治시대에 大阪으로 표기를 바꿨다.

1495년 가을, 불교의 정토진종의 렌뇨라는 사람이 오사카성 부근에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를 세웠다.

신도들 세력이 막강하여 대명(다이묘)들과의 싸움으로 확대 되었고, 1575년부터 1580년까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평정될 때까지 1세기 동안 그 세력을 떨쳤다. 이때 오다노부나가에 의한 무자비한 정벌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절은 파괴되었다.

노부나가 수하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카마쓰 성 공략 전투시, 적의 연합군에 숫적 열세가 보이자, 히데요시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교토로 달려가 오사카의 혼노사에 여장을 풀었는데, 아군측의 배신자(아께치 미쓰히데) 로 인해 불의의 기습을 받아 훨훨 불타는 혼노사에 들어가 자결하였다.

한편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청했던 히데요시는 크게 놀라고, 다행히 사태 수습을 하고 교토로 달려가, 배신자인 미쓰히데 군사를 대파하고, 천하를 거머쥐었다.

1583년 천하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고 전망했기 때문에 石山本願寺 자리에 대규모 축조 공사에 착수하여(1583년), 三國無雙(일,중,인도에서 으뜸임)의 평을 듣는 호화스런 성곽을 완성했다.

성의 주위에 소또보리(外堀)과 우찌보리(內堀)의 두 해자(垓字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인공 호수)를 만들고 성을 가파르게 축성하여 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여 난공불락의 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성도 히데요시 사후 17년을 지나, 도꾸가와 이에야쓰가 숙적 도요토미 일가를 제거하기 위해 20만의 대군으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豊臣秀 ?)를 정벌하면서 1615년 전소 되었다. 1620년부터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개시하여 10년 뒤 1629년 완성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오사카성=현재의 성)

그러나 이차대전 중에 폭격으로 전소되었다가 1967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오떼몬(大手門) : 1620년에 처음 세워진 정문으로 높이 약 6m로 이런 모양의 문을 코라이몬(高麗門)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건축양식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지은 오사카성, 구마모토성(가토오기요마사가 축성)의 색갈은 검은색인데 비해 이에야스가 지은 히메지성은 흰색이다.

다음은 6. 오마쯔리 (お祭り)  7. 일본의 춤

출처 : 紫軒流長
글쓴이 : 紫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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