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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도요토미 히데요시

대한유성 2013. 1. 20. 04:56

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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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일본어: 豊臣秀吉, とよとみ ひでよし, 153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는 일본의 무장이다.

오와리쿠니(尾張國, 현재의 아이치 현)에서 하급 무사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고자루(小猿)이다. 후에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지하라 히데요시(藤原秀吉)로 개명하고, 다이죠 다이진(太政大臣)과 간파쿠(關白)의 지위를 겸임하게 되면서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썼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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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정치적인 활약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본래 전국 통일을 눈 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는데, 항상 신발을 들고 노부나가의 뒤를 따라다녔으며, 노부나가는 이러한 그의 충실함을 보고 신임을 하게 되어 크게 중용하였다. 히데요시는 기지와 용병술에 뛰어나 각 지방을 정벌하여 세력 확장에 공을 세워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히데요시는 천하인(天下人)을 자처했으며, 그의 오사카 성에는 늘 오다 노부나가에게서 물려 받았다는 천하포무(天下布武)라는 네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또 자신의 칼에도 천하포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는 1584년에 동부 일본의 큰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고, 1590년에는 천황의 권위를 빌려 마지막 남은 여러 영주와 호족을 정복하여, 죽은 노부나가와 자신의 숙업인 통일을 이룩하여 100년 간에 걸친 센고쿠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편집] 임진왜란

이후 그는 대륙 진출에 대한 야망을 꿈꾸며 2년 후 20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점차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1598년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노량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 간 끌어오던 전쟁은 실패하고 일본군은 총퇴각하였다. 이 전란을 통해 일본은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귀나 코를 베어가는 등 잔학 행위를 자행하였다. 또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들을 약탈하고 2-3만 명의 도공들을 납치해 이후 도자기 문화 같은 에도시대의 화려한 문화 발전을 이룩하는 터전으로 삼았다.

그가 사망한 후 일본은 도쿠가와세력과 도요토미 충성세력간의 전쟁인 세키가하라 전투와 토요토미 지지자들에 대한 숙청작업을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다. 이로써 도요토미 정권은 2대째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편집] 기독교 전래

도요토미 시대는 일본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된 시대이기도 했다. 에스파냐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은 개신교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중남미아시아에서의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프란시스 하비에르(Francis Xavier)였다. 예수회 설립자중 한 사람이기도 한 그는 일본은 선교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1549년 일본 가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다이묘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이를 묵인[1]했고, 도요토미도 서양의 문물 전래 통로인 기독교의 선교활동을 묵인했다. 하지만 그의 묵인정책은 강경정책으로 바뀌어 26명의 순교자들이 나가사키에서 순교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종교를 앞세운 서양의 식민정책에 대한 경계를 위해서였다.[2] 이러한 기리시단에 대한 박해정책은 도쿠가와 정권, 즉 에도 막부 시대에도 이어진다.

[편집]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실록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출신과 그가 정권을 장악한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3]

원래 그는 출신이 매우 비천하여 꼴을 베어 파는 생활을 하였다. 어느날 오다 노부나가가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히데요시가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에게 변소지기를 일을 시켰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노부나가는 이에 자신의 신을 만들게 하였는데 역시 정성을 다해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노부나가가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출세의 길이 열렸다. 이후 일본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노부나가는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그가 토벌을 자청하였다. 이때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노부나가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노부나가가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는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노부나가를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후계자가 되어 간파쿠(關白)가 되었다.

[편집] 각주

  1. 기독교의 전래당시 일본사람들은 불교의 한 종파가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2. 네루는 《세계사 편력》에서 일본인들이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서 몰라서 묵인했지만, 서구 제국주의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는 박해로 돌아섰다고 하였다.
  3. 조선왕조실록
출처 : 紫軒流長
글쓴이 : 紫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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